- 한글 창제 모방설, 왜 자꾸 우기나!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조선왕조실록>이 이처럼 훈민정음이 “옛 전자(篆字)를 모방했다”고 기록한 이래 한글의 어떤 글자의 모양을 본떴는지를 두고 수많은 가설이 나왔다. 성현은 <용재총화>(1525)에서 한글이 범자(梵字ㆍ산스크리트 문자)를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이익은 <성호사설>(1740)에서 한글이 몽고 글자를 참고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모방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근래 들어서도 속속 다른 글자를 들고 나온다. 고대 근동지역 언어ㆍ역사학자인 조철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 신화의 비밀>(2003)에서 한글이 히브리 문자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했다.

끊이지 않는 모방설은 한글이 우수하다는 방증이다. 모방설의 심리적 뿌리는 ‘이렇게 뛰어난 문자가 갑자기 만들어질 리는 없다’ ‘이토록 완벽하게 다듬어지기까지 중간 단계의 문자가 분명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모든 모방설은 한글과 문자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왔다. 언어학자 스티븐 로저 피셔는 <문자의 역사>(2010)에서 “한글은 다른 모든 문자로부터 독립적이며 완전하다”고 분석하고 평가했다. “한글은 기존 문자를 개량한 게 아니라 언어학적 원리에 의한 의도적 발명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한글처럼 만들어진 문자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도 없다. 한글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문자다. 이론적으로는 한글은 알파벳 같은 음소문자를 능가하는 자질문자(資質文字ㆍ feature system)이며 최초이자 유일한 자질문자다.

자질문자로서 한글은 소리의 특성을 낱자의 형태에 반영하고, 비슷한 소리의 낱자는 기본형에서 파생시킨다는 원리에 따라 만들어졌다. ㄱ 에서 ㅋ 을 만들었고 ㅁ 에서 ㅂ 과 ㅍ 을, ㅅ 에서 ㅈ ㅊ 을 추가했다.

모방설은 자질문자로서 한글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낱자의 모양에 집착하는 오류에 빠졌다. 모양은 모양일 뿐이다. 한글 자음 ㅁ 은 한자 구(口)와 동형이다. 그렇다고 해서 ㅁ 이 구(口)를 본떴다고 우기는 격이다. 모방설을 주장하려면 낱자의 제자 원리가 한글과 같고 그 결과 모양도 닮은 글자를 찾아야 한다.

한글은 단기에 창조됐다고 보기엔 너무 완벽하다. 다른 글자를 모방했다고 하기엔 너무 독창적이다.

다만 나는 한글 자음 창제에 기존 이두 표기가 어느 정도 영감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두는 한자의 뜻과 소리로 우리말을 표기했다. ‘없거든’은 ‘無去等’으로 적었다. 無는 뜻으로 읽었고 去와 等은 소리로 읽었다.

乙은 조사 ‘을’로 쓰였다. 또 돌(乭) 같은 글자를 만드는 데 받침처럼 들어갔다. 乭 은 예를 들어 사람 이름 돌손(乭孫)을 표기할 때 활용됐다. 이로 미루어 乙은 ㄹ 발음으로 통했고, 이는 한글을 창제할 때 참고가 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글자는 ㅁ 대신 쓰인 音이다. 音 역시 ㅁ 받침 자리에 들어갔다. 놈쇠를 老音金이라고 적었다. 金은 쇠로 읽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音’과 ‘음’의 형태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音을 흘려 쓴 초서는 더 비슷하다. 音의 초서에서 日은 ㅁ 처럼 쓰인다.

※ 최근 재야 학자가 “3000년 전 중국에서 화폐로 쓰인 칼에 새겨진 글자는 ‘돈’과 ‘노’를 한글로 쓴 것”이라며 “이 문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돈>이라는 책에서 “따라서 한글은 남의 글자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옛 문자를 되살려 만든 것”이라는 설을 내놓았다.(연합뉴스 ‘한글 3천년 전부터 사용됐다’) 반박할 필요가 없는 가설이라고 본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smitten@naver.com


[사진=동방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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