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가 못나서 그랬다. 이숙아 미안하다. 이 할미가 어리석었다. 어리석어서 내가, 이 착한 너를. 내가 얼마동안이나 살아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 있는 동안엔 니 생일, 내가 챙겨주마. 꼭 그러자 내 새끼.”

- KBS2 <넝쿨 째 굴러온 당신>에서 할머니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KBS2 <넝쿨 째 굴러온 당신>을 볼 때마다 늘 '딸들이 하나같이 왜 저 모양일까?‘ 하며 혀를 차곤 했다. 우선 큰 딸 일숙(양정아)이부터 살펴보자면, 바람난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했으면서도 가족에게 하소연 한 마디 못하고 숨기고 사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건만 가족과 힘을 모아 대처할 생각을 못하고 왜 감출 생각만 하느냔 말이다. “왜 말을 못하냐고!” 위자료는 물론 양육비도 못 받는 그녀가 가족에게 이혼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전전긍긍할 때마다 답답해서 화면을 향해 눈을 흘기곤 했다.

당당하지 못하기로는 둘째 딸 이숙(조윤희)도 언니 못지않다. 눈치꾸러기 모양 주변 기색을 살피는가하면 빼앗기고 손해를 보는 걸 당연하게 여기니 말이다. 그렇다고 눈치가 빠르다면 또 모르겠다. 그저 주눅이 들어 밤낮으로 남의 눈치만 보고 있는 거다. 날개 한번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청춘. 다들 아시다시피 이숙의 자존감 결여와 열등의식의 배경에는 오빠 귀남(유준상)이가 있다. 마침 이숙이가 태어나던 날 금쪽같은 아들 귀남이가 실종되었기에 이숙은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던 것.

그런가하면 막내 딸 말숙(오연서)은 언니들과는 달리 살아보겠다고 홀로 용을 쓰는 스타일이다. 일숙과 이숙이 애정 결핍을 안으로 감추려 든다면 말숙은 드러내놓고 자기 몫을 챙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경우라고 할까?

이 세 자매를 이리 만든 책임은 일차로는 부모에게 있겠으나 실질적으로 가장 큰 원인제공은 할머니(강부자)가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게다. 귀한 손자를 잃어버렸다며 평생 어머니를 구박해 왔고 그래서 손녀딸들, 특히 이숙은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며 살아온 셈이 아닌가.



다행히 지난 주 모든 비극이 작은 어머니(나영희)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가 이숙에게 눈물을 훔치며 사과를 한다. “니 생일을 내가 챙겨줬어야 되는데. 생일은커녕 한번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했어. 너를! 그 어린 게 내 눈치를 슬슬 보는 걸 알면서도 말 한 마디를 따뜻하게 내가.”

그제야 이숙은 속내를 슬며시 내보인다. “솔직히 할머니, 어렸을 땐 할머니가 무섭고, 싫을 때도 있고 그랬는데요. 크면서 그러셨을 수 있다, 내가 얼마나 미우셨겠냐.” 할머니가 이제와 ‘니가 왜 미웠겠느냐, 금쪽같은 내 손년데’라고 위로한들 이미 망가진 세 자매의 어린 시절을 누가 되살려 낼 것인가. 따라서 어떤 이유를 댄다 해도, 그 어떤 변명을 한다 해도 작은 어머니는 책임을 면키 어렵다.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말고는 큰 풍파가 없는 집안이었다. 그럼에도 딸들이 기를 못 피고 성장했거늘 극한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라면 알게 모르게 얼마나 문제점이 많겠나.

“의료 봉사 활동을 하며 세상을 참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사람은 고귀한 존재라고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생각하는데,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지면 사람도 힘들어지고 가족도 깨질 수 있다는 걸 실제로 접하게 됐어요.”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를 통해 안철수 씨가 남긴 많은 얘기들이 가슴에 남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의료봉사를 다니던 대학생 시절 직접 목격했다는 한 조손 가정의 비극은 며칠이 지나도록 잊히지가 않는다.



중학생짜리 손녀가 삶에 지쳐 달아나는 통에 할머니가 굶어 돌아가신 사건이었는데,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단 둘이 살게 된 아이. 처음엔 할머니께서 힘이 닿는 한 어떻게든 살림을 꾸려나갔으나 불행이 또 다른 불행을 부른다고 류마티스에 걸려 꼼짝을 못하게 되시는 바람에 손녀딸이 초등학생 때부터 신문 배달을 해가며 가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지은 밥을 드셔야 하는 할머니의 마음은 오죽이나 아렸을꼬.

안철수 씨는 그 상황을 소설보다 참혹한 현실이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처음에는 그래도, 아무리 철부지라고 해도 ‘어떻게 편찮으신 할머니를 버려?’라며 기막혀했다. 하지만 아이의 처지를 하나하나 떠올려 보니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났다. 어린 것의 어깨에 얹힌 삶의 무게가 얼마나 버거웠으면 의지 가지할 곳 없는 아이가 할머니를 두고 도망을 갔을꼬. 설마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어느 누가 이 아이를 나무랄 수 있겠나. 물론 30년 전의 얘기라고는 하나 지금도 이런 경우가 전혀 없다고는 장담 못할 것이다. 사람이 너무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신성불가침일 것 같았던 가족 관계도 얼마든지 깨질 수 있다는 사실, 드라마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숙이 할머니처럼 나중에 후회하고, 위로하고, 사과할 게 아니라 가정이든 사회든 미리미리 준비하고 방비해야 옳지 않을까?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사진=KBS2,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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