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현 “배우는 항상 불완전한 존재” [인터뷰]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뮤지컬 <명성황후>의 홍계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알베르트, 혹은 <원효>의 의상으로 배우 이상현(35)을 기억하는 이들이 훨씬 많겠지만 기자에겐 <렌트>의 콜린스를 항상 떠올리게 한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현대화한 2004년 뮤지컬 <렌트>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은 컴퓨터 천재로 여성복장을 한 거리의 드러머 엔젤(김호영)과 동성애를 형성하는 인물. 당시의 기억은 “객석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저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였다. 이상현의 데뷔작인 2003년, 2004년 <와키키키 브라더스>도 만났으니 배우의 데뷔부터 지켜 본 셈이다. 그럼에도 인터뷰 할 기회는 생각만큼 빨리 찾아오지 않았다.

드디어 2012년 뜨거운 여름, 오랜 시간 무대에서 만나온 배우 이상현을 대학로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뮤지컬 <렌트>의 기억부터 꺼내들었다. 수 차례 다른 배우들로 꾸려진 <렌트>를 봤지만 콜린스 역에 그 만큼 적역은 없었다는 게 개인적인 평이었기 때문이다.

“제 작품을 많이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난스럽게) ‘저 자식은 무대 위에서 자주도 보네’ 이러셨겠는데요.(웃음) 저에게도 정말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렌트> 입니다. 배우로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 역시 <렌트>와 관련된 거니까요. 당시 청각장애인 관객이 분장실로 찾아와서 ‘노래 정말 잘 들었어요’ 라고 말을 해 주신 적이 있거든요. 순간 놀랬죠. 못 듣는 분이 노래가 들렸다는 거잖아요.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진동 혹은 그런 것들로 들렸다고 표현하신 거겠죠. 감사하다는 마음이 계속 들었어요. ‘무대 위에서 함부로 하면 안 되겠구나’는 생각 역시요”

◆ 새로운 깨달음을 준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

2010년 초연된 뒤 ‘제5회 뮤지컬 어워즈’에서 소극장 창작뮤지컬상을 받고 2011년엔 경희궁 숭정전에서 고궁뮤지컬로 선보이기도 한 극단 죽도록달린다의 <왕세자 실종사건>이 다시 돌아왔다.

서재형 연출과 한아름 작가의 작품으로 본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란 중심 이야기 속에 자숙과 구동의 살구처럼 시린 사랑이야기가 감성적으로 자리한다. 왕세자가 사라지기 전 몇 시간을 극 중 인물들과 관객이 함께 반복·추리하는 과정에서 영화를 보다 필름을 거꾸로 돌려버린 듯한 역모션 플래쉬 백 연출 기법을 선보여 화제가 된 바 있다.

이상현은 2011년 <왕세자 실종사건>부터 ‘왕’ 역으로 합류했다. “작년 공연은 제대로 해내지 못해 후회가 많이 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땐 왕의 위엄만 가지고 캐릭터에 접근했던 거 같아요. 힘만 잔뜩 들어간 연기와 소리로 오히려 배우 스스로를 깎아 먹었죠. 관객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구요. 나쁜 놈처럼만 보였다고 평하셨어요. 역할 자체가 악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스스로 마음을 내려 놓게 된 듯 해요. 힘을 줘야 할 때와 빼야 할 때를 알게 되니 보시는 분들도 많이 편안해졌다고 하시더군요.

어찌보면 ‘왕’이 쉽다고 여길 수도 있는데, 알면 알수록 절대 쉽지 않구나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요. 그러다 ‘왕은 왕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니 더 편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구요. 제가 맡은 ‘왕’에 대해 모르는 부분도 분명 있을 거에요. 그런데 연출님은 해 보고 싶은 건 다 해봐라라고 지시한 뒤 (액션을 보시고)그게 맞다고 확신을 불어넣어주세요. 의심하지 말라. 계속 해내라 이러시면서.”

◆ 진지하지만 스위트한 왕 ‘이상현’

2012년 <왕세자 실종사건>은 이상현-서태영-박은석-김유영-송희정-이천영 조합 대 조순창-홍륜희-김경수-이지숙-연보라-김남호 조합으로 번갈아 가며 무대에 오른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크로스 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배우 김선표, 김재형, 김혜인은 원캐스트로 매번 무대에 오른다. 각 캐스팅 조합에 따라 빨간 발가락 : 초록 발가락 팀으로 나뉜다고 한다. 연습강도가 세 배우들의 발에 물집이 마를 날이 없는데, 팀마다 다른 색깔로 테이핑을 해 논 게 팀 이름으로 굳어진 이유다.

서재형 연출은 더블 캐스팅 된 배우들에게 각기 다른 옷을 입혀줬다. 정지현 홍보팀장은 “‘왕’ 역에 더블캐스팅 된 조순창씨는 보다 단단한 왕이고 상현씨는 조금 더 스위트한 왕이라는 느낌을 줘요”라며 두 캐스트에 대한 각기 다른 호감을 표했다.

“연출님이 배우 스타일에 맞게 옷을 살짝 살짝 씩 바꿔주는 편이에요. 저는 평상시 남을 잘 웃기지 못하는 스타일이라 그런지 ‘진지’라는 내재의 옷을 주셨어요. 초연때 ‘왕’역을 조휘 배우가 했는데 그 친구는 위트가 좋아 저와는 다른 캐릭터 옷을 보여줬죠.”

그는 이번 작품이 체력적으로 힘들기보다는 정신적으로 힘든 작품이라고 말했다.

“‘진지’와 ‘외로움’을 내재해야 해서 분장실에서도 떠들지 못해요. 차분하게 대기하고 있지 않으면 공연 첫 시작부터 힘들어지거든요. 예전엔 술 마시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쓸데 없는 곳에 에너지 소비를 자제하기 위해 작품 외의 것은 안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경희궁에서 보여줬던 ‘왕’과는 다른 걸 찾아보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극단 ‘죽도록 달린다’의 작업이 많은 걸 변화시켰어요. 경희궁 때 공연에서는 뭘 몰랐었기 때문에 극단 배우들과 더 친해지는 데 신경을 썼죠. 반면 이번엔 연습이나 공연이 끝나면 바로 귀가하는 편입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극중 ‘왕’으로서 ‘다른 걸’ 찾아보고 싶은 이유로 저를 ‘격리’ 시키고 있어요. 동료들과 어울리기도 모호하고 안 어울리기도 애매한 관계가 된 듯 해 동료배우들이 오해할 수 도 있을 듯 해요. ”



◆ “주역을 받쳐주는 배우도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지금껏 그가 선보였던 캐릭터는 대부분 주역보다는 주역을 받쳐주는 조역이었다.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는 남자라면 대개 탐낼만한 ‘베르테르’ 역보다는 ‘알베르트’로 무대에 섰다. <왕세자 실종사건>에서 주역구분은 다소 무리가 따르겠지만, 그럼에도 대중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남자 배우 역은 ‘구동’이다. 그가 맡은 ‘왕’ 역은 특별히 눈에 띄지도 않지만, 행여나 조금만 잘 못하면 욕을 먹기 쉬운 역할이다. 주역으로 무대에 서고 싶진 않았을까?

“배우라면 주목받고 싶은 마음은 분명 있을 거에요. 그런데 ‘인정’을 받는다는 게 그냥 되는 건 아니잖아요. 열심히, 그리고 잘 해야지 따라오는 거죠. 묵묵히, 성실하게 해 나가고 있어요. 전 많은 분들에게 인정받기 보다는 소수일지라도 저를 알아봐 주시는 분이 있는 게 좋아요.”

이상현은 중앙대학교 성악과 출신 뮤지컬 배우다. 음역대는 중후한 베이스였다고 한다. 문득 낮은 음역대 특성이 역할을 한정 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역대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하이 내추럴 톤이 주역들의 목소리로 적합한 면이 있겠죠. 하지만 제 목소리도 이전보다 많이 높아졌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주역을 서포트 해주는 조역이 있어야 재미있는 거잖아요. 저는 길게 오래가고 싶어 주인공 욕심은 별로 없어요.(웃음)”

탄탄한 체격의 이상현과 여린 ‘구동’의 이미지가 전혀 어울릴 것 같아 보이진 않지만 가끔은 예상을 뒤엎는 캐스팅이 의외의 효과를 내는 법. 단 한번도 ‘구동’역을 탐내진 않았을까. 특히 초연 때 구동 역을 꿰찬 배우 김대현은 그 작품 하나로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배우가 됐다.

“(엄청나게 놀란 표정으로)저는 여자한테 질질 끌려다니는 비현실적 인물인 ‘구동’역을 정말 못 할 것 같아요. 물론 캐릭터 자체는 상당히 좋죠. 그런데 심벌까지 잘려가며 결국 들은 말은 ‘니가 남녀간의 정을 알아’죠. 결국 그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사랑에 빠지는 인물은 개인적으로 싫어요. 물론 초연 구동 역을 맡았던 대현이의 미소는 저 역시 잊혀지지가 않아요. 참 똑똑한데 순수한 친구에요. 연달아 무대에 선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에서도 약간은 어눌한 면을 보여줘 ‘바보전문배우’란 칭호도 있다고 하던데요.(웃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 역시 제 취향과 너무도 다릅니다. 여자에게 질질 끌려 결국 자살하는 인물이잖아요. 아니다 싶으면 빨리 유턴해야 하는데, 아닌데 앞만 보고 달린다는 건 무모한 일이죠.”

◆ 창작뮤지컬 전문 배우 ‘이상현’

이상현은 데뷔 초반 <틱틱붐> <노틀담의 곱추> 등 몇몇 라이센스 작품을 하기도 했지만 그의 필모그라피를 보면 창작뮤지컬 전문 배우라고 해도 될 정도로 창작 작품이 많다. <겨울나그네>, <명성황후>, <겨울연가>, <진짜진짜 좋아해>, <돌아온 고교얄개> 등을 거쳤다.

제작팀이든 배우든 위험을 감수하고 덤벼야 하는 창작뮤지컬 무대에 매번 선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을 터. 배우로서 입을 타격을 감수하겠다는 의미도 들어있으니 말이다. 이게 대해 이씨는 ‘창작은 도박이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좋은 마음으로 창작뮤지컬을 시작됐다가 어두운 마음으로 헤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그 작품 쓰레기였어’라고 말 할 정도로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런 작품을 거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건 사실이고, 여러 가지가 몸 속에 쌓여 제 자신을 빌드 업 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 라이센스 작품은 정해진 메뉴얼 대로 하다보니 배우가 편해지는 면도 없지 않아 있죠. 반면 창작뮤지컬은 배우가 새롭게 인물을 창조하는 거잖아요. 초연 때 만들어 낸 캐릭터가 차후 배우들에게 모델이 되는 경우도 생기구요. 배우 스스로를 시험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좋은 창작 뮤지컬을 찾다가 <왕세자 실종사건>에도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다정다감한 배우 이상현

<왕세자 실종사건> 팀 내에서 이상현은 다정다감한 배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스탭이든 배우든 하나 하나 일일이 챙기면서 안부를 묻는다고 했다. 홍보팀장의 말을 듣다보니 평상시 행동이 섬세한 연기로 묻어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 정도였다.

이상현은 ‘사람들이 들어갈 문을 열어놓는 배우. 마음이 넓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 말이 의례적인 멘트가 아닌 점은 인터뷰 분위기 속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상대가 들어갈 문을 열어 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지 않는가. 인터뷰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데 인터뷰어만 주구창창 질문을 던질 수는 없는 노릇.

“질문하고 싶은 게 많으신 기자님이네요”라며 사람 좋은 미소를 띄던 이상현은 “배우에게 필요한 건 ‘배려’라고 말했다.

"'배려심'을 저의 무기로 내 세우고 싶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저 역시 예전엔 남의 대사를 잘 듣지 않고 무대에서 저 혼자 연기한 것 같아요. 이젠 무엇보다도 ‘남의 대사를 잘 들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야 하는 거구요. 남의 대사에 키포인트가 들어있어요. 상대의 대사 속에서 내 캐릭터가 살아나, 치고 갈 때와 나갈 때를 알게 되니까요.”

‘얼굴이 명함이 아니라면 배우는 개인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명함 카드를 가지고 본인을 홍보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그. 최근 행보는 어떨까.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지만 그의 팬이라면 기대할만한 작품으로 돌아올 예정.

“배우 10년차인데 처음으로 겹치기 공연을 하게 됐어요. 물론 연습 일정이 겹치는 것이긴 하지만요. 전 멀티가 안 되는 배우에요. 그렇게 하는 배우들을 보면 나쁜 의미가 아닌 정말 대단해보여요. ‘어떻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왔다갔다 하는 게 가능하지? 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글쎄요. 저도 결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요.(웃음)”

스스로를 연예인으로 여기고 있는 일부 뮤지컬 배우들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

“연예인과 같이 무대에 서면서 본인을 ‘연예인이다’ 라고 가끔 착각할 수는 있을 듯 해요. 하지만 전 다르다고 봐요. 공인은 공인이지만 연예인과는 달라요. 무대란 성스런 곳이거든요. 이걸 잊어버리고 뮤지컬 무대 경험으로 방송에 나갈거야. 이제 시작해서 인기 얻는 친구들이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나중에 찾아야 할 것을 벌써부터 찾고 있는 거죠. 이런 생각을 하는 친구들의 생각이 아쉬워요. 다른 한 편에서는 기획사의 티켓파워 강요도 없진 않았을 듯 합니다.

무대를 꾸준히 지키는 배우들이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성기윤, 이건명 선배 등이 존경스럽습니다.“

◆ “배우는 항상 불완전해요.”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은 배우들의 역모션으로 인한 현재에서 과거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배우들의 동선은 언뜻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치고 빠지는 순간을 철저하게 계산한 탓에 리듬과 템포 및 특유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배우들의 ‘걸음걸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는 ‘무대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는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했다.

“‘잘 좀 걸어 다녀라‘ 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았어요. 30대가 지나, 하나 하나 알아가다 보니 점점 무서워지는 점도 있어요. 물론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건 맞죠. 하지만 무대가 갖고 있는 중압감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

배우는 ‘완전체’가 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그.

“배우는 항상 불완전한 존재에요. 오히려 불완전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좀 더 단단해지는 존재가 맞을 듯 합니다. 배우란 절대 완전체가 되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

그의 꿈은 ‘외도 안하는 뮤지컬 배우’이다.

“전 끝까지 스테이션에 남고 싶습니다. 지금 제가 있어야 할 곳,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곳은 무대인 것 같아요. 다른 장르는 제 길이 아닌 것 같아요. 기회가 되면 좋은 뮤지컬 작품을 만드는 일도 하고 싶습니다.”


칼럼니스트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극단 죽도록 달린다, 정다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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