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안 잤어요. 그때는 눈만 감으면 자꾸 생각이 났어요. 꿈인데 계속 생각나는 거 있죠. 진짜 수만 번 눈만 감으면 계속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안 잤어요, 일부러. 눈 붙이기가 싫었어요. 계속 생각나서. 자꾸 ‘할 수 있을까?’. 부러지는 생각이 자꾸 드니까 겁이 나는 거예요. 제가 17년 역도를 했는데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게 역도였고, 내가 누구한테 자랑할 수 있는 게 역도였는데 그 순간 역도가 정말 싫어졌어요. 싫어졌고 무서웠어요. 무서워지니까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 'SBS 스페셜 - 노메달리스트 그대 눈물은 뜨겁다'에서 사재혁 선수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SBS 스페셜 - 노메달리스트 그대 눈물은 뜨겁다'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부상으로 꿈을 접은 선수들이 그제야 생각나다니. 축구를 비롯한 승리에 취해 웃고 떠드는 바람에 보듬어야 마땅할 우리 선수들의 고통과 눈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무심할 데가 있나. 런던 올림픽 역도 77kg 급 결승 경기에서 사재혁 선수가 뜻하지 않은 부상을 입는 순간, 현장에는 이내 가리개가 쳐지는 통에 안위를 확인 할 수 없었지만 이형근 역도 남자국가대표팀 감독 얼굴에 번져가는 안타까움은 목격할 수 있었다.

규정에 따라 다가가지는 못했어도 아마 부모님과 다를 바 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오랜 시간 한 마음 한 뜻으로 오직 이 날만을 위해 하루하루를 보내오지 않았겠나. 그리고 이틀 후 사재혁 선수는 급히 귀국을 하게 된다. 그것도 취재진을 피해 다른 통로로 도망치듯이. 현재는 이름까지 바꾼 채 외딴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그. 수술을 마쳤다고는 하나 앞으로 혹독하고 외로운 재활 과정을 거쳐야 한다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32강전에서 오른쪽 팔꿈치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4강전에서 아쉽게 탈락했던 유도의 베이징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왕기춘 선수도 남몰래 귀국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필이면 쾌거를 이룬 펜싱 선수들과 한 날 한 시에 돌아오게 된 권투의 신종훈 선수는 공항을 빠져나갈 일을 생각하며 막막해 했다. 악수를 청하는 이들에게 연신 “저 펜싱 아니에요.”라며 손을 내젓는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불과 10여일 전 런던으로 떠날 때만해도 금메달 유망주로 취재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그가 아닌가.

그러나 당연한 일일까? 16강 탈락이라는 전적으로 돌아온 그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공항에서 펜싱부가 막 주목을 받고 있을 때, 저는 그걸 지켜보고 있었어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그냥 진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찢어질 것 같았는데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계속 참았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공항에 있었던 그 시간이.” 펜싱 팀에게 몰리는 환영 인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종훈 선수의 씁쓸한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정훈 유도 국가대표팀 감독의 말처럼 다른 나라들은 올림픽 참가 자체를 영광으로 여기고 즐기는데 왜 우리나라 선수들만 유독 죄인이 된 느낌으로 인천 공항을 밟게 되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스포츠라는 건 승부가 갈리기 마련이고 따라서 성적에 의해 평가 받는 게 인지상정이긴 하다. 하지만 기대를 저버렸다고 역적 취급을 하며 질책을 할 것이 아니라 선수들의 재기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따뜻한 격려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 아닐는지.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달려온 4년이건만 단 한 차례의 경기로 희비가 엇갈린 순간, 본인만큼 가슴 아픈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똑 같이 열심히 했는데 누구는 떨어지고 누구는 올라간다는 게 감당이 안될 만큼 마음이 아프고요. 힘들고요.” 신종훈 선수는 동료인 한순철 선수가 은메달을 따는 장면을 지켜보며 비로소 속내를 털어 놓았다. 물론 패자가 자숙이나 할 일이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TV에 얼굴을 내미느냐 나무라는 이들도 있을 게다. 어쩌면 그런 따가운 시선들 때문에 대대수의 선수들이 그토록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게으름을 피웠다면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온 국민의 기대를 받으며 올림픽 무대를 밟는 마당에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은 선수가 어디 있겠는가. 부디 희망과 용기는 주지는 못할망정 사기를 꺾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왕기춘 선수의 말이 너무나 가슴 아프지 않나. “도와주신 분들께 죄송하고요. 제 노력이 아직 부족했나 봐요.”

천만다행인 건 수영에서 박태환 선수가 은메달을 목에 걸면서부터 ‘아쉬운 은메달’이라느니 ‘금메달 획득 실패’라느니 하는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프로그램이 방송 된 후 인터뷰하기 싫다는 선수들을 굳이 귀찮게 따라다닐 필요가 있었느냐는 지적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노메달리스트’로 규정짓는 제목 자체가 또 다른 상처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교양에서 예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메달리스트를 초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때, 우리 선수들이 쏟아온 노력의 가치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또 나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이었다고 생각한다. 운동이든 또 다른 인생이든, 다시 시작하는 그들에게 무한한 칭찬과 성원의 박수를 보낸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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