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가수2> 한영애, 노래로 들려주는 모노드라마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90년대 중반 대학에 입학했던 나는 한영애 음악의 열정적인 팬은 아니었다.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음유시인으로 여겨지는 가수는 김광석이었다. 당시 나는 연극동아리에 속해 있었는데 소극장에서 연습이 끝나면 선배들은 늘 음향실에서 김광석의 노래를 틀었다. 텅 빈 무대에 울려 퍼지는 김광석의 목소리는 한 사람의 노래가 하나의 연극이 되는 순간을 체험하게 했다. 한영애의 노래를 그 연극무대에서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한영애에 대해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연극동아리의 술자리에서였다.

나보다 한참 학번이 높은 선배가 자신의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라면서 과거 한 연극무대 뒤풀이에서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 술자리에 노래 잘 하는 여배우가 한 명 있었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노래 한 곡을 청했다고 한다. 키 작고 수줍은 표정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멋지게 노래를 불렀고 사람들은 박수와 함께 앵콜을 청했다. 여배우는 다시 한 곡의 노래를 불렀다.

소주와 막걸리, 조촐한 안주와 뿌연 담배 연기 가득한 술집은 순간 콘서트홀로 변했다고 한다. 앵콜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밤새 여배우는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여배우가 바로 젊은 시절의 한영애라는 이야기였다. 그 선배가 한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니면 술자리에서 즉석으로 지어낸 것인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한영애의 이미지는 그날 이후로 그렇게 각인되었다. 밤새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배우 같은 가수.

그렇다고 한영애의 콘서트를 찾아가거나 그녀의 레코드를 사서 듣지는 않았다. 텔레비전 출연도 많지 않은 가수라서 쉽게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라디오를 듣는데 새벽 서너 시쯤 <완행열차>라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특급열차 타고 싶지만 왠지 쑥스러워서/완행열차 타고서 간다 그리운 고향집으로'라는 담담한 첫 소절을 듣고 눈물이 핑 도는 경험을 했다. 노래를 들으면서 그런 경험을 하기는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후에도 한영애의 음악을 찾아듣지는 않았다. 추억이 떠오르는 가수들의 노래를 들을 때도 그녀는 제외되었다. 우리에게 추억의 가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듀스였고 또 몇 년 후배들에게는 S.E.S나 핑클이었다. 그 사이 한영애의 CD를 처음으로 구입하긴 했다. 바로 그녀가 흘러간 옛 노래를 리메이크한 앨범이었다. <목포의 눈물>이나 <황성옛터> 등의 곡이 수록된 그 앨범을 들으면서 나는 다시 옛날에 선배가 들려주었던 여배우 이야기가 떠올랐다. CD의 음악이 재생되는 동안 공간과 시간이 응축된 연극무대에서 모노드라마를 하는 여배우의 노래를 듣는 기분이었다. 때가 묻은 낡은 광목 같은 목소리라고 할까, 그때 느껴졌던 그녀 목소리의 질감이 그러했다.



한영애가 <나는 가수다-시즌2>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나는 반갑지 않았다. 그녀의 오랜 팬은 아니었지만 밤새 담배 연기 가득한 곳에서 노래하는 여배우의 이미지가 망가질까 두려웠다. 또한 마음 한 구석에 이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아직도 사람들이 한영애의 목소리를 좋아할까? 연극적으로 여겨지는 그녀의 창법이 이제는 과잉으로 들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한 편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나는 가수다-시즌2>를 챙겨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 동영상으로 그녀의 무대를 조심스럽게 엿보곤 했다. 오랜만에 텔레비전에 출연한 한영애는 늙지 않았다. 독특한 의상과 고양이를 닮은 얼굴이지만 고양이보다 사자에 어울리는 압도적인 분위기 역시 그대로였다. 의외의 모습도 보였다. 인터뷰 할 때 느린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하는 이 거물 여가수는 생각보다 수줍음이 많아 보여 귀여웠다. 하지만 예상대로 한영애와 대중들 사이에 약간의 괴리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첫 번째 공연 <이별의 종착역>은 그녀 본인의 매력과 나가수 콘셉트에 맞추려는 편곡이 부딪치면서 살짝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 무대에서 부른 <바람이 분다>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를 담담하면서 드라마틱하게 끌어올리는 이소라의 원곡에 더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영애의 목소리는 어딘지 한스러움 같은 것이 배어 있는데 그게 이 노래에서는 부담스러웠는지 몰랐다.

팝송 'Knocking on heaven's door' 무대는 그런 면에서 사람들의 호불호가 정확히 갈렸던 무대였던 것 같다. 초반부의 속삭이듯 흐느끼는 목소리가 나는 좋았다. 그것은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는 그 느낌이 과장되거나 우스꽝스럽게 들렸던 것 같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안타까운 무대는 조용필의 노래 <미지의 세계>를 부른 무대였다. 빠른 템포의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한영애는 아이슬란드 여가수 뷰욕 같은 독특한 메이크업과 무대의상으로 무대에 올랐다. 일렉트로닉한 느낌으로 이 노래를 얹어가는 편곡은 좋았지만 한영애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 노래를 세련되게 빼려면 사실 뷰욕처럼 금속성에 날카롭게 파고드는 보컬이 어울릴 것 같았다. 한영애의 목소리는 우리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보다 어딘지 느릿느릿한 추억의 완행열차와 맞닿아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영애 역시도 무대를 휘어잡기보다 주춤주춤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다음 무대에서 한영애는 가장 자신에게 어울리는 곡을 찾는다. 그녀가 부른 <옛사랑>은 요란한 편곡 없이 지르는 클라이막스도 없이 담담한 목소리만으로 노래를 끌고 간다. 이 노래를 부르고 <나가수> 경연에서 한영애는 최저 순위로 떨어졌다. 그렇더라도 순위와는 상관없이 한영애는 자신에게 제일 어울리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옛사랑-바로 지나간 시절의 추억이 담긴 시간을 한영애는 무대로 끌고 왔다.

8월 마지막 경연에서 한영애는 들국화의 히트곡인 <사랑한 후에>를 불렀다. 한영애의 <사랑한 후에>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으로 툭 떨어진다고 표현하면 어울릴까? 사랑은 이미 흘러간 <옛사랑>이고 노래는 <사랑한 후에>의 감정을 노래하지만 무대 위의 이 여배우가 노래로 들려주는 멋진 모노드라마,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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