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정우와 마초 그리고 전원일기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흔히 배우 하정우 앞에는 마초라는 닉네임이 붙는다. 그가 움직일 때면 수컷냄새라는 수식어도 향수처럼 따라다닌다. 누군가는 홀아비냄새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옛날부터 한국 영화계에는 남성성이 강한 마초배우들이 많이 존재해 왔다. 60년대 신성일까지는 거리가 너무 머니까 길게 언급하지 말자. 70년대에 액션물과 애정물 모두에서 전천후 성공을 거두고 남성화장품 쾌남 CF에서 뺨때리며 스킨 바르기 장면하나로 남성미의 상징처럼 된 신일룡이란 배우가 있다. 짙은 눈썹에 울퉁불퉁한 근육, 강렬한 눈빛의 그는 마초배우의 대명사였다.

그 후에도 최민수나 최재성, 김보성으로 이어지는 마초남 캐릭터들은 끊임없이 가지를 치며 진화해 왔다. 최민수나 최재성에게는 터프함에 더해 고독함이 덧발라졌다. 이대근은 마초배우지만 에로틱하기보다 코믹함이 가미되었다. 김보성은 전형적인 마초배우의 인상이지만 그가 <투캅스2>로 인기몰이를 할 무렵에는 서서히 마초배우들의 전성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마초배우들은 점점 코믹한 조연 내지는 촌스러운 캐릭터의 상징으로 자리잡아갔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90년대 중반 영화계에서 요구하는 남성성은 달라졌다. 90년대가 원하는 남자배우들이란 울퉁불퉁한 근육 대신 안경이 어울리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인물들이었다. 문성근이 너무 뾰족한 금속성이었다면 한석규는 살짝 부드럽게 연마한 금속성의 배우였다. 안경 쓰고, 많이 배웠지만, 아직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는 남자들. 천리안과 하이텔, 나우누리로 대표되는 90년대의 남성상이었다.

그렇다고 하정우를 시대를 거슬러 새롭게 부활한 마초배우로 정의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이 케이스로는 오히려 영화 <돈의 맛>이나 드라마 <해운대 연인들>에 등장하는 김강우가 더 가까울 것 같다. 김강우는 21세기에 맞추어 잘 가공된 조각 같은 말끔한 마초의 느낌이 있다.



하지만 하정우는, 혹은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혹은 하정우의 연기타입은 마초가 아니다. 그의 연기는 남성성을 과장하거나 혹은 전형적인 마초의 틀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잘 단련된 근육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보여주는 남자들이 남자처럼 보이는 까닭은 ‘날 것’의 길거리 남자이기 때문이다. 당구장, 만화가게, PC방, 혹은 호프집에서 자주 눈에 띄는 20대에서 30대의 남자들. 검은 수트보다는 늘어진 티셔츠와 후줄근한 추리닝이 어울리는 남자들. 그 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변부에 위치했던 이 평범한 남자들을 그는 주연급으로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늘 조연급의 코믹한 캐릭터였던 이 평범남들을 하정우는 어떻게 매력 있는 인물로 만들었을까? <용서받지 못한 자>들과 <비스티 보이즈>를 비교해 보자. 그리고 전도연과 함께한 <멋진 하루>와 많은 남자배우들과 함께 했던 <국가대표>도 생각해 보자. 퀴퀴한 <황해>나 달달한 <러브픽션>도 괜찮겠다. 각 영화의 인물들은 상당히 찌질하고 성깔도 있지만 반대로 ‘사랑스러운’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시나리오 때문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의 표정, 손짓, 혹은 어투 같은 것에서 배어나온다. 영화 속 가공의 인물이 아닌 실제 주변의 친구나 선후배 혹은 연인이었던 한 남자에게 존재했던 버릇들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러니까 영화 속의 한 캐릭터가 아닌 언젠가 내가 아는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배우는 평범한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각각 그 성격에 맞게 조금씩 변주하면서 보여준다. 어쩌면 남자답고 털털한 배우라 여겨지는 하정우의 연기법은 상당히 섬세하고 꼼꼼한지도 모르겠다. 그가 보여주는 영화 속 인물들은 타인에 대한 관찰과 타인을 자신에게 덧입히는 과정이 아니면 나오기 힘들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그런데 배우 하정우는 언제부터 수많은 평범남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연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을까? 혹시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에 보았을 <전원일기>에서 온 건 아닐까? 최장수 농촌드라마인 <전원일기>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평범남들의 집합소 격이었던 드라마였으니 말이다.

마음은 따스하지만 따뜻한 말보다 호통 치는 일이 더 많았던 평범한 그 시대의 아버지 김 회장, 장남의 도리는 다하지만 아내의 속은 잘 몰라주는 전형적인 효도남 용진, 시골에서는 미남이지만 막내답게 투정도 많고 괜히 센 척하다가 사고도 잘 치는 용식, 일용엄니의 외아들로 귀찮은 일이 생기면 짜증부터 내는 일용이, 촐랑대면서 헤헤 웃다가도 어느 순간 퉁방울눈을 내리깔며 토라지는 응삼이, 노마를 혼자 기르는 착한 홀아비이지만 다혈질 성격 탓에 자주 씩씩거리는 귀동, 곱상한 얼굴에 샌님처럼 얌전한 명석, 리더십 있는 체육선생님 같은 창수까지 이 드라마의 남자들은 너무들 다르다. 뿐만 아니라 동네 할아버지들 역시 그 성격이 천차만별이다. <전원일기>란 드라마는 평범한 남자들의 집합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성 있는 남자 캐릭터들의 카니발이었던 셈이다.

초록색 모자를 푹 눌러쓴 하정우를 떠올려 보자. 하정우는 <전원일기>의 어떤 캐릭터와 제일 잘 어울릴까? 어쩌면 모두 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러브픽션>, <황해>, <멋진하루>, <힐링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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