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죄하는 대학로 무명배우가 살아가는 방식 [인터뷰]
- 김한 “아직 저의 연기 열정은 수치로 찍히지 않았어요.”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돌직구 인터뷰] 어떻게 보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위가 바로 ‘인터뷰’다. 전혀 모르는 상대가 갑자기 나타나 ‘기자’란 이름을 내 걸고 이것 저것 질문하면 인터뷰이는 꼼짝없이(?) 대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포장된 말로 답하든 어쩔 수 없이 응대하든 그 대화 내용은 인터뷰 기사로 만들어져서 나온다. 이런 인터뷰의 거품을 걷어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처음 만나자 마자 인터뷰를 하지 않고 세 번에 걸쳐 만나서 조금씩 쿡쿡 찌르는 대화를 했다. 그는 스스로를 무명배우 김한(36)으로 소개했다. 미키짱을 향한 찌질한 오타쿠 삼촌팬들의 파란만장 팬심 라이프를 그린 연극 <키사라키 미키짱>에서 키사라기 미키에 관한 모든 자료를 스크랩한 미키짱 퍼펙트 콜렉션을 보물로 여기는 ‘이에모토’에 빙의된 배우다. 마지막 공연을 사흘 앞두고 긴 대화를 나눴다.

■ ‘리얼’(?)한 대화

-(7월 공연을 보고 나서 나눈 대화이다.) 연기를 잘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고 너무 잘 생긴 게 흠이네요.
“저 그렇게 잘 생긴 거 아닌데.”

-잘 생긴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 뮤지컬 배우가 잘 생기면 플러스 요인이 되는데 연극배우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것 같아요. 그 배우가 정말 연기를 잘 하지 않는 이상, 잘 생긴 연극배우가 무대에 서면 이상하게 몰입이 안 되거든요.
“말 하시는 게 돌직구 스타일이신대요. 오늘 보신 연극 <키사라기 미키짱>이 마음에 별로 안 드셨나 보내요. 다음에 한 번 더 보러 와주세요.”

-커튼콜 때 보여준 춤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졌어요.
“거의 눈이 뒤집혀서 춤을 추는데 절대 튀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저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는 미키짱을 위한 ‘진혼’의 의미가 담겨있는 춤이거든요. 온 정성을 기울여 추지 않을 수 없는 춤이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드라마 <골든타임>으로 유명해진 배우 이성민이 출연한다고 해서 화제가 된 연극 <거기> 개막 즈음 8월경 다시 대화를 했다.

-전 그동안 배우 이성민 씨가 나온 연극 작품을 많이 봤는데 이렇게 뜰 줄 알았어요.
“이성민 선배를 보신 그 혜안, 저에게도 보인다고 해주세요.”

-그런 혜안은 없어요. 근데 김 배우님 출연작을 많이 못 봐 뭐라 당장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역시 거침 없네요. 기자님이 칭찬하심 진짜라고 보면 되겠네요. 다른 작품으로 다시 인사드리고 싶어지는걸요.”



■ ‘상품’에서 ‘배우’로

배우 김한은 20대 초반부터 방송에 입문해 KT 기업광고, 초코하임, 초이스커피 CF, 영화 <달콤한 인생> <어린 신부>, 드라마 <단팥빵>등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렇게 2005년도까지 달려왔다. 떠오르는 신인배우로 스포트라이트도 받았다. 그러던 중 한동안 그를 TV에서 볼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의 머릿 속에서 잊혀지는가 싶었다. 그랬던 그를 30대 중반이 지나 만날 수 있었다. 대학로 연극배우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20대는 그냥 서 있는 예쁜 그림이었던 것 같아요. 연예인들에 둘러싸여 뭔지 모르지만 항상 붕 떠 있는 기분이었거든요. 주변에서 얘는 방송 어디 나오는 친구다 이렇게 말하면 괜히 우쭐해지는 기분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이제야 다시 제대로 돌아온 느낌이에요. 제 인생에 발 붙인 기분이랄까요. 후질근하게 하고 돌아 다녀도 아무말도 안하는 지금이 좋아요.”

-그렇다면 20대 때는 연기자가 아니라 ‘상품’ 이었단 의미인가?
“예쁜 캐릭터로만 존재한 거죠. 대중들이 TV에 나오는 남자 배우에 대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20대 초반엔 예쁘기만 해도 충분해요, 그러다 남자가 군대를 갔다 오면 또 원하는 게 달라져요. 예쁜 건 기본이고 연기도 조금은 해줘야하거든요. 20대 후반이 되면 외모 반, 연기 반을 요구하게 되죠. 그런 상황에서 20대 후반에 접어들었어요. 배우로서 존재감이 아예 없어져버린 시기죠. 그 시기에 소속사와의 사이도 틀어지면서 안 좋은 생각도 했을 정도니까요.”

-자살을 생각했다는 말인가.
“들어오는 작품마다 잘리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일이 계속 됐거든요. 은둔생활을 했죠. 그런데 죽지 못했어요.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당시 어떤 모델이 자살했다는 기사에 달린 댓글이 너무 충격이었거든요. ‘이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은 누구야. 죽어서 신문에 나고 좋겠네.’ 이런 식의 댓글이었는데, ‘부관참시’가 따로 없더라구요. 정말 죽은 사람에게 다시 한 번 형벌을 가하는 거잖아요. 유명해지기전엔 죽을 수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

-세상에 대해서 많이 원망했겠다.
“당시엔 힘들었지만 지금은 잘 됐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건들이 없었다면 지금도 방송국 근처에서 단역이라도 따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살고 있었을 것 같거든요. ”

-20대 후반에 연기에 대한 지적을 그렇게 많이 받았나.
“결정적으로 제 목소리 톤이 여자 톤인 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그래서 그걸 커버하려고 억지스럽게 굵은 톤을 내기도 했는데 결국 연기 부족으로 비춰진 것 같아요.”

-지금 목소리 듣고선 상상할 수 없다.
“지인을 통해 노력여하에 따라 목소리가 변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발성과 보컬을 배우면서 최근 2년 사이에 목소리가 바뀐거죠. 지금은 목소리 좋다는 말도 간혹 들을 정도에요.”

-연기트레이닝을 받을 생각은 안했나.
“당연히 받았죠. 그런데 테크닉은 누구나 3년만 투자하면 배울 수 있는 것 같아요. 그 이상이 되면 인간성이라고 하죠. 배우의 살아온 삶이 연기에 묻어 나오는 것 같아요. 테크닉은 기본으로 깔고 더 너머 드라마를 보여주지 않으면 매력이 나오지 않잖아요.



■ 노력하는 재능밖에 없는 천재

김한과 같이 20대 초반에 쇼 프로로 데뷔한 동기 40명 대부분은 현재 TV에서 볼 수 없다. 15년이 지난 현재까지 연예계에 남아있는 이는 탤런트 연정훈 뿐이다. 이를 두고 배우의 운명은 ‘관뚜껑 닫힐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

요즘 배우 김한의 화두는 ‘연기를 잘 하는게 뭔지 모르겠다’였다. 자신은 별로라고 생각한 연기를 관객들은 좋아하는 경우도 봤고, 자신은 너무도 좋다고 생각했던 다른 배우의 연기를 관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례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좋은 배우는 뭘까?’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연기 교집합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란 생각을 자주 해요. 배우에게 연기란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과정과도 같거든요. 그렇다면 배우가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 거잖아요. 전 많은 사람을 사귀지는 못해요. 오히려 깊이 있게 적은 사람을 만나는 스타일이죠. ”

-어떤 연기에 자신 있는가.
“전 어떤 상황에서도 노력하는 재능밖에 없어요. 아둔하죠. 대신 제 바보머리로도 이해할 수 있고 존경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은 잘 소화해낼 자신 있어요. 결핍된 인간이지만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인물 있잖아요. 최근에 본 뮤지컬 <헤드윅>이 바로 그런 역할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미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왜 나만 불행해야 돼? 피해의식 같은 게 있는 인물이죠. 결국은 가슴으로 이해가 돼요.”

-배우로서 연기의 정점을 찍고 싶은 건가
“‘정점’에는 두 가지 차원의 접근이 있겠죠. 인지도라는 상업적 정점과 본인만 아는 예술적 정점. 상업적 정점을 찍으면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돼서 장점이 따르죠. 예술적 정점은 보여주고 평가받는 게 아니라 자신만이 아는 거죠.”

-듣고보니, 연기인생 30년중 25년이 무명배우였던 배우 최일화 씨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지도를 얻게 되자, 무명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극 캐스팅 관련 연락이 온다. 이를 젊었을 때부터 나누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하셨다.
“항상 선택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배우의 운명은 프로메테우스와 다를 바 없죠. 또 다시 기다리고 기다리는 운명 말이죠.”

-관객들은 김배우의 인지도가 높아지길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연극 무대에 설 수 있을만큼만 유명해지길 바랄 수도 있을 것 같다.
“제가 그렇게 유명해질거라는 그림이 그려지진 않지만 드라마나 영화로 바빠질지라도 1년에 꼭 한편 이상은 연극무대에 서고 싶어요. 연극은 저에게 ‘인풋’이에요. 드라마는 ‘아웃풋’의 극치인데. ‘인풋’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연기의 정점에 대해 마저 질문하면, 김배우의 예술적 정점은 본인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말인가.
“메이저 리그 305승의 레전드 투수 톰 글레빈이 그랬다죠. ‘야구를 향한 나의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고. 아직까지 저의 열정은 수치로 찍히지 않은 것 같아요.



■ 속죄하는 배우 혹은 변태?

연극은 배우의 생활, 그리고 인생과 연결된다. 그러한 연기는 배우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나누어진다. 그래서 빨리 외적인 성장을 이룬 뒤 확인받고 싶어하는 배우들은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끊임없는 자기 불안과 의심을 넘기고 성장했을 때 배우 자신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 힐링을 주는 위치에 서게 된다. 김배우는 20대를 바보 같이 보냈다고 하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조금 특별한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다.

-배우로서 행복한가
“<키사라기 미키짱>을 하면서 배우의 행복에 대해 많이 알아갔다. 팬들에게 정말 고마워요. 그들이 공연보는 1시간 동안 0.1%라도 행복했다면 빚진 느낌이 덜어져요.

-빚진 느낌이란 게 뭔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에도 나오지만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는 기분이랄까. 사회구성원으로서 느끼는 행복에 가깝겠내요. 어떤 관객이 배우 김한이 출연하는 연극이다는 생각으로 두 번 관람하면 안 기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야기로 보면 수십번을 보더라도 기뻐할 수 있거든요. 이렇게 되면 속죄의 기분이 들기도 해요.

-최근 뮤지컬 <헤드윅> 무대 앞에 불려가 엄청 부끄러워했다고 하던데. 남 앞에 나서는 걸 안 좋아하는 사람이 왜 배우가 됐나.
“어찌보면 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케이스 일 수도 있어요. 사실 낯도 무지 가린다. 우울증 기질도 약간 있다. 물론 이런 점을 배우의 또 다른 자의식으로도 볼 수 있어요. ”

-그렇다면, 무대 위 쾌감을 잊지 못해서 계속 배우로 살기로 한건가
“30대 초반에 쫙 가라앉은 우울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책꽂이에서 몇 년만에 눈에 띈 책 한 권이 보이는거에요. 최형인 선생님이 쓰신 <백세개의 모노로그>라고. 수학의 정석처럼 연기지망생의 필독서죠. 스탕달의 ‘적과 흑’ 모노로그 장을 펴서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독백을 했어요. 옆에 룸메이트가 있다는 것도 잊고 한거죠. 조금 뒤 제일 친한 사람 앞에서 그렇게 했다는 걸 깨닫고는 속옷을 다 벗고 군중들 앞에서 선 기분을 느꼈어요. 무대 위 배우들은 항상 올 누드를 하고 있어야 하니 ‘변태’죠(웃음)

-그 뒤로 연기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가.
“한번 그런 경험을 겪고 나니까 연기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이젠 무대위에서 거짓말 하는게 두려워졌죠.”

-40대가 멀지 않은 것 같다. 10년 뒤에는 어떤 사람이 돼 있을 것 같은가.
“신뢰주는 배우, 인품이 좋은 사람, 봉사할 수 있는 사회구성원이 되고 싶다. 아니 이 중에 한 가지만 이뤄졌으면 좋겠다. 주변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말을 마친 뒤 갑자기 한숨을 쉰다.)

-왜 말해 놓고 한숨을 쉬었는가
“주변에 민폐만 안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을 바꿔야 할 듯 하내요. ”

-소심한 성격인가
“내가 배우 원빈 정도의 인지도를 갖는 배우라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직 난 일개 무명배우이다. ‘지까짓 게 뭔데’ 저렇게 말하고 다녀 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말을 조심하는 거다.

-그간 진지한 인터뷰를 몇 개 했던데, 난 김배우의 인생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가 살아온 인생은 한가지인데, 인터뷰 결과물은 다 다르게 나와요. 그게 참 신기해요. 나이 들수록 남들이 보는 내가 아닌 내가 보는 나. 즉 알맹이가 더 중요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그런데 제가 인터뷰 정리를 힘들 게 한 건 아니죠.”

■ 경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한 섹시한 남자

화를 낼 수 있는 기능이 살아있어 자기 경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한, 그런 사람은 상당히 섹시하다. 김한 배우의 엄청나게 울퉁불퉁한 근육 팔뚝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섹시함은 예상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가던 김배우가 흥분했던 타임은 ‘연극’을 드라마의 하위장르로 놓고, 연극배우를 방송으로 진출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 보는 시각과 연극배우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일부 몇몇의 선입견을 이야기 할 때였다.

“소싯적 학창시절에 너도 나도 연극부였다. 연출부였다 말하면서 연극배우 앞에서 뭔가를 가르치려는 분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뮤지컬 배우 앞에서 노래를 가르치겠다고 나서겠어요? 클래식 악기 연주자 앞에서 자신의 연주 실력을 자랑하겠어요? 왜 유독 연극배우들의 능력은 쉽게 보는지 화가 날 때가 있어요.”

‘대학로 연극 배우들, 목숨 걸고 죽어라 하는 거거든요.’라고 피치를 올리던 그. 그리고 털어놓았다. “연극은 인물들간의 관계 설정이 중요하죠. 분장실 분위기가 곧 그 연극 분위기이구요. 좋은 연극을 자세히 보면 모난 배우가 없어요. 설사 있다 하더라구 그걸 커버해주는 배우가 있구요. 모든 게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거든요.” 지나치게 잘 생겨서 매력 없던 배우 김한은 사라지고 어느새 노력하는 재능밖에 없다고 말하는 우둔한 천재가 능청스럽게 앉아있었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정다훈 기자, CJ E&M]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