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한남자>, 알고보니 질 나쁜 여자들 천지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맞춤법 표기 논란으로 방송 2회 만에 제목이 바뀐 KBS2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빗발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이며 굳이 ‘차칸’을 고집했던 데엔 뭔가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짐작컨대 그냥 우리가 흔히 아는 답답증을 일으킬 정도의 ‘착한’은 아니라는 의미였지 싶지만. 그러나 제목에서는 ‘착한’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 드라마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착한 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훨씬 많다. 뭔가 암울한 느낌, 꼬여있고 곤두서 있고, 늘 죄다들 심기가 불편하다. 물론 가장 나쁜 건, 주인공 강마루(송중기)를 나쁜 남자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한재희(박시연)일 게다.

참으로 빤한 이야기가 아닌가. 연인의 배신으로 상처받은 주인공이 급기야 복수를 결심한 끝에 하루하루 상대방의 숨통을 조여 가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전개가 예상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한재희가 아무리 날이면 날마다 가증스러운 언행을 일삼는다 해도 강마루의 변화를 합리화시킬 초석이려니 하고 심드렁하게 바라보게 된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어져야 강마루가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이든 거부감이 들지 않을 테니까. 강마루가 택한 복수의 첫 단추 역시 구태의연하다. 지난 날 연인이었던 여자의 의붓딸 서은기(문채원)를 유혹하려 든다거나 그 의붓딸이 ‘날 이렇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하게 된다거나, 모두가 우리에게 익숙한 설정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 빤한 소재가 진부하게 다가오지 않는 건 빤한 캐릭터를 빤하지 않게 만드는 몇몇 연기자들이 아닐는지. 특히나 송중기가 연기하는 강마루. 이런 느낌의 나쁜 남자는 처음이다. 마냥 착한 것도 아니면서도 맑고 순수한, 뭔가 복합적인 느낌이다. 그래서 이 남자가 착한지 안 착한지 따지고 들고 싶지가 않다. 오히려 아련한 눈빛으로 미안함을 담아 쳐다볼 때면 그냥 무조건 편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이해해주고 싶어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행동, 즉 연인의 호출을 받고 달려가고자 아픈 동생 강초코(이유비)를 아랑곳 안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자꾸 발목을 잡긴 하지만.





어쨌든 한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일 만큼 사랑했던 두 남녀가 지금은 발톱을 세운 채 맞서서 으르렁대는 형국이 되었지만 닥쳐올 그들의 미래가 그다지 궁금하진 않다. 물어뜯고 피나게 싸우다가 결국엔 한재희는 권선징악의 응징을 받을 게 분명하고 강마루와 서은기는 해피엔딩을 맞겠거니 짐작만 할뿐이다. 대신 다른 의문이 하나 생겼다. 도대체 딸을 두 번씩이나 버린 초코의 엄마(조은숙)가 더 나쁠까? 아니면 애인에게 살인죄까지 뒤집어씌우면서 얻은 어린 아들이 남편 서정규(김영철) 회장의 전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또 다른 악행을 이어가는 한재희가 더 나쁠까?

아마 한재희는 ‘난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어’ 하는 식의, 어느 드라마에선가 나왔지 싶은 핑계를 대며 끊임없이 죄를 쌓고 또 쌓아 갈게다. 권력으로, 돈으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감언이설로, 그도 안 되면 남편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누군가를 유혹해 범죄에 끌어들일 테고 그 범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만들겠지. “아무에게도 뺏기지 말고 니가 다 가지라고, 아들. 알았지?” 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대사인가.






그러나 나는 초코 엄마 역의 연기자 조은숙의 현실감 넘치는 연기 때문인지 스무 해만에 엄마를 찾아온, 그것도 몸이 아픈 딸을 냉정히 내치는 그녀가 악녀 한재희보다 더 밉고 끔찍했다. 얻어 터져 멍이 든 얼굴을 하고서도 자식 없이는 살아도 20년이나 살 맞대고 산 지금의 남편 없이는 못 살겠다는 그녀. 미안하지만 너한테 정이 없다고 솔직히 털어놓는 그녀. 더 낳은 환경으로 딸을 떠나보낼 마음에서 내뱉은 어깃장일지도 모르지만 차마 자식에게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혹시 딸이 결혼할 때 되면 연락이나 해달라는 염치없는 말에는 아, 정말이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하지만 연락 안하겠다는 의붓아들 강마루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는데 그 씁쓸한 표정에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엄마이긴 했던 거다.

역시 ‘꼭 가고 싶은 길이 있고 그 길을 막는 사람은 누구든 용서 안 하겠다‘는 한재희가 더 나쁜 여자라는 결론이다. 질 나쁜 천하의 악녀가 어떻게 몰락하는지, 착한 남자 강마루가 그녀의 마수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 강마루와 서은기, 두 사람을 응원하며 지켜볼 밖에.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그림 정덕주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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