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은 밤, 드라마 캐릭터들의 가상 대화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밤 KBS 드라마국 대본연습실의 불이 꺼진 지는 이미 오래다. 캄캄한 공간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오직 그 주에 방송될 드라마 대본들뿐이다. 물론 도착하지 않은 몇몇 드라마의 쪽대본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회의용 탁자에는 누가 읽다가 내버려두고 갔는지 두 편의 대본이 날개달린 책자 모양으로 엎어져 있다. 한편은 주말연속극 <내 딸 서영이>, 나머지 한편은 수목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다.

“이봐요, 거기 누구 없습니까?”
다소 피곤에 지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밤의 정적을 가로지른다. 이렇게 날개달린 책자처럼 대본을 놓아두면 가끔씩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제멋대로 살아나서 떠드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방송국 경비원들 사이에서 드라마국 대본연습실에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도는 걸로 봐선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난 서은기예요. 내가 깨어 있는 걸 어떻게 알고 나를 찾는 거죠?”
“아, 그렇습니까? 제가 딱히 그쪽이 깬 걸 알아차리고 부른 건 아닙니다. 그냥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혹시 눈뜬 캐릭터가 없나 불러본 거죠.”
“원래 그렇게 사람이 솔직하지가 못해요? 누가 깨어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부르기부터 한다,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요?”
“좋습니다. 그 쪽이 깨어 있는 걸 알았다고 치죠. 하지만 말입니다. 전 답답해서 하소연 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저 강우재를 맡고 있는 배우 미스터 리 때문이죠.”
“좋아요, 들어줄게요. 배우들에게 불만이 많은 캐릭터가 한 둘은 아니니까요. 나 서은기를 맡은 여배우에 대해 나도 할 말이 많거든요.”

젊은 남자의 깊은 한숨이 흘러나오고 강우재(이상윤)와 서은기(문채원) 두 캐릭터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강우재: 처음에 솔직히 미스터 리가 나를 맡는다고 했을 때 불만이 없던 건 아니었습니다. 나 강우재는 사랑 밖에 모르는 남자거든요. 이런 남자는 뭐랄까 상대를 압도하는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파리의 연인의 남자주인공을 연기한 미스터 박이 그랬죠. 하지만 제가 미스터 박을 기대한 건 아니에요. 나 강우재는 미스터 박보다는 젊은 남자고 아직 사랑을 잘 모르는 풋풋한 남자의 매력도 풍겨야 하거든요. 하지만 미스터 리는 뭐랄까, 너무 막내동생 같은 남자 같더라고요. 아직 사랑에 빠진 주인공을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뭐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서은기: 그렇군요. 하지만 미스터 리란 배우가 이미지는 꽤 좋던데요. 학벌도 좋고 성실한 모범생 같은 훈남 분위기도 풍기고요. 특히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드라마에서의 역할, 나는 나쁘지 않았어요. 겉보기엔 철없어 보이지만, 그래요, 형에 대한 이해심은 넓은 그런 남자였잖아요.

강우재: 맞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미스터 리에게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는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김수현 작가의 주말연속극 막내들에게는 항상 비슷한 캐릭터가 주어지죠. 착하지만 늘 투덜거리고 그러다가 엄마나 누나에게 엉덩이 맞거나 꿀밤 맞고. <사랑은 뭐길래>의 미스터 김이나 <목욕탕집 남자들>의 미스터 정이 그랬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미스터 리 역시 그런 녀석들 중 하나였다고요.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다들 막내아들들의 대사 톤을 떨쳐내기가 쉽지가 않은가 봐요. 그 중에서도 미스터 리는 김수현식 투덜거림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가 너무 힘든 건지, 다른 드라마에 출연해도 대사만 길어지면 자꾸 툴툴거립니다. 미스터 리가 그 후 드라마 <짝패>라는 사극에서 주인공을 맡았는데 사극의 인물이 툭하면 이 투덜거리는 톤으로 이야기하더라고요.



서은기: 그러고 보니 이번 드라마에서도 미스터 리가 종종 투덜거리더군요. 멜로물의 남자주인공이 투덜거리면 여주인공은 보통, 키스보다는 꿀밤을 때리고 싶어지죠.

강우재: 맞아요, 그래서 나 강우재가 여자 앞에서 멋있어지는 역할인데 아쉽습니다. 내 대사가 멋있을 때가 많거든요. 이걸 왜 잘 살리지 못하는지……

서은기: 그것보다 면도부터 먼저 좀 하라고 하세요. 미스터 리의 얼굴은 수염이 잘 어울리는 외모는 아니에요. 수염은 타이거JK에게나 어울리는 거지 미스터 리는 꼭 밤샌 대학원생 같아요. 깔끔하고 젠틀하게 다듬어놔야 더 보기 좋은 걸 연출자도 알고는 있겠죠.

강우재: 수염 문제는 뭐 모르겠습니다. 깎고 싶을 때 깎으면 되는 거지 뭘 그런 것까지 간섭합니까? 수염이 무슨 죄예요? 코털도 아니고 그냥 코밑과 턱밑에 털 나는 건데. 그것보다는 미스터 리가 이 드라마에서 강해 보이고 싶었는지 투덜거릴 때가 아니면 또 너무 딱딱해요. 내 생각에는 힘 조절을 잘 못하는 것 같더군요. 예를 들어 화를 낼 때 낮은 도와 높은 도 사이를 오가야 연기의 감정이 보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화가 나면 높은 도로 계속 나가니까 정말 화난 사람처럼 보이는 거죠. 그게 제일 걱정입니다.

서은기: 그래요, 그 문제라면 처음 나 서은기를 맡았던 배우도 비슷했어요. 동공과 안면근육과 입술에 너무 힘을 주더군요. 대사를 닭다리 잡아 뜯듯 치는 것 같았어요. 미스터 리의 문제도 비슷하겠네요. 하지만 나 서은기를 연기하는 배우는 내가 남자주인공 마루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연기가 부드럽고 감정의 흐름은 자연스러워졌죠. 사랑이란 뻣뻣한 사람들을 부드럽게 만드는 마음의 섬유유연제라는 것 정도는 아시겠죠?

강우재: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 강우재가 지금 사랑에 빠져있는데 이게 또 걱정입니다. 밀고 당기다가 울컥하는 장면들도 있을 텐데 화난 사람처럼 보이면 이건 또 답답하다, 이거죠. 어디 연기의 섬유유연제 같은 것 좀 찾아주세요. 미스터 리한테 팍팍 좀 뿌려 보게.

서은기: 제가 보기에는 강우재 씨 캐릭터에는 미스터 리가 딱이네요. 진짜 사랑을 모르는 남중 남고 나온 공대생 남자가 처음 사랑에 눈떴을 때 보여주는 물불 안 가리고 펄쩍 뛰는 행동. 그게 딱 강우재 씨 같은데요? 어딘가 공대생 같은 분위기의 미스터 리와도 잘 어울리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터 리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요? 그럼 이건 어때요? 강우재 씨가 미스터 리에게 속삭여주는 거예요. 힘을 빼요, 미스터 리. 사랑의 감정연기이란 수학문제처럼 머리로 풀어가는 게 아니라고 말이지요.

강우재: 정신 좀 차리세요, 서은기 씨.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배우들이 우리 캐릭터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나 있습니까? 어째 착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인물들은 판단력이 막 흐려지나 봅니다? 전 이제 그냥 잠이나 실컷 자야겠습니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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