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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잔혹함 속에 철학과 종교를 담아내다
기사입력 :[ 2011-04-07 11:09 ]


- 라스 폰 트리에 <안티크라이스트> 리뷰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새영화가이드] ‘충격의 고문 포르노’, ‘악마적 호러’, ‘극단적 고어의 향연’ 등등 뒤늦게 국내에 개봉되는 라스 폰 트리에의 2009년 작품 <안티크라이스트>에는 온통 야유가 깃든 수식어가 붙는다. 잔혹한 장면이 많고 표현수위가 매우 높은 건 사실이다. 남녀 노출, 인터코스 장면은 오히려 가볍게 느껴질 정도다.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정말 끔찍하게 느끼는 건 성기 훼손이다. 영화 속 아내(샬롯 갱스부르)는 고립된 산장에서 점점 더 광기에 빠져 남편(윌렘 대포)의 성기를 뭉개 버린다. 기절한 남편의 성기를 잡고 피가 날 정도로 마스터베이션을 시키고, 급기야 녹슨 가위로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잘라 낸다.(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개봉판에서는 이 여성 성기 훼손장면은 삭제됐다. 수입사는 등급심의 직전 상영불가 판정을 우려해 이 장면을 자진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은 온통 여자의 하복부에서 쏟구친 피로 호수를 이룬다. 아마도 이런 류의 장면은 의도적으로 연출된 스너프 필름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안티크라이스트>의 스크린은 그렇게 온통 아수라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심지어 철학적 상상력을 마구 자극하기까지 한다. 영화는 매우 잔혹하지만 그만큼 논쟁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비난이나 비판받는 한편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자격이 있어 보인다. 성기를 훼손하는 장면 때문에 포르노 취급을 받아서는 안될 영화다.

<안티크라이스트>의 이야기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첫 장면은 모노 톤의 느린 화면에 헨델의 ‘울게 하소서’가 흐르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한참 성 행위를 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아내나 남편 모두 서로의 육체에 깊이 빠져있다. 무엇보다 지금 한창 절정에 오를 참이다. 문제는 둘다 아이가 침대에서 살며시 기어 나와 창가쪽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는 것이다. 아이는 결국 눈이 내리는 차가운 바닥으로 추락해 죽게 된다. 아이를 잃은 여자는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고 심리학자인 남편은 그런 아내를 직접 치료하기에 이른다. 치료 장소는 아내가 가장 공포감을 느낀다는, 별장이 있는 숲이다. 하지만 숲속 별장에서의 생활은 치료는 커녕 점점 더 악화돼 간다. 남편은 그런 아내의 정신적 질병을 이성적 대화로 치료해 가려 하지만 여자는 보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성 행위를 원할 뿐이다. 여자의 광기는 점점 더 구체성을 띠어 가는데 결국 남편의 성기를 짓이기고 그의 다리를 나사로 뚫은 다름 큰 디딤돌을 매달기까지에 이른다. 그 모든 일은 남자가 자기를 버리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남자는 더욱 여자로부터 도망치려 하지만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여자는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 간다.

아이를 잃은 부부가 그 정신적 상처를 극복하려 하지만 병이 점점 더 깊어져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과 위해를 가하게 된다는 이야기인 것처럼 꾸며 놓았지만 라스 폰 트리에는 이 이야기 구조에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다양한 문화적,종교적,역사적 코드들을 숨겨 놓았다. 영화는 때론 매우 프로이드적으로 곧 정신분석학적으로 읽히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기독교 정통 교리의 일부를 그대로 갖다 놓은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에는 반대로 그 교리를 180도 뒤집는, 제목 그대로 반그리스도적 입장으로도 읽힌다. 영화는 내내 두 남녀의 엎치락뒷치락, 성 행위와 폭력의 얘기처럼 보이면서도 또 어떤 때는 이게 결국 한 사람의 얘기, 혹은 사람 자체에 대한 얘기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선과 악의 심성이 계속해서 충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남자는 치료 와중에 여자에게 얘기한다. “자꾸 선과 악을 구분해서 얘기하지 말라니까!”



남편과 아내가 막바지 파국을 향해 치달아 가고 있는 장면에서는 신약의 한 부분이 연상되기도 한다. 예수는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되고 결국 거기서 벗어나 성령의 권위를 얻게 되는데 성경만으로는 그 과정이 그리 드라마틱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조금만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예수와 사탄은 그때 그 광야에서 정말 격렬하게 싸웠을 것이다. 영화속 남편은 정신질환에 걸린 아내를 이성적이고 차분하게 대한다. 예수도 처음엔 사탄을 그렇게 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결국 아내가 자신을 대하듯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아마 예수도 그랬을 것이다. 예수가 사탄을 물리치는 방식은 처절할 만큼 폭력적이었으며 ‘사탄다웠을 것’이다. 아니 사탄 이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사탄이며 사탄은 예수이다. 우리가 지금껏 찬양해 오고 봉헌해 왔던 기독교적 방식, 곧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는 예수를 인자하고 따뜻하며, 비폭력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해 온 특정 종교계급의 오랜 역사적 조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의 신성을 되찾는 것, 올바른 종교적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히려 반그리스도의 입장과 태도를 가지는데서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안티크라이스트>는 그러나, 그 어떤 하나의 플롯, 그 어떤 하나의 주제로 좁히지 못하게 할 만큼 다층적이고 다의적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프롤로그에서 세가지 에피소드와 에필로그로 이어지는 영화의 전체 구성은 난해한 반(反)소설을 읽는 느낌을 준다. 영화 속 아내가 원래는 중세시대 마녀사냥에 대한 논문을 준비한 예비 학자였음을 빌어 당시 시대의 기묘한 괴담과 전설, 섬뜩한 우화를 중간중간 끼어 놓기까지 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지적 장난 혹은 대담한 사기처럼 보이기까지 하지만 여성을 마녀처럼 취급했던 시대의 광기와 그 어두운 아우라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장치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렇게 사사건건, 속속들이 이 영화를 파헤치듯 해석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을까. 아마도 그건 매우 지루한 논쟁이 될 것이다.

종교적인 의미든, 아니면 심리적인 의미든 라스 폰 트리에가 애기하려는 주제, 그리고 그 방식이 이렇게까지 폭력적인 필요가 있냐는 부분을 두고 ‘지적 선정주의’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비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같은 선정성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고담준론을 논하기가 어려운 세상이기도 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선정주의는 그래서 매우 정치적인 선택으로 읽힌다. 어쨌든 성 행위하고, 치고받고, 피흘리는 장면을 통해 사람들은 종교와 역사, 남자와 여자, 세상의 폭력과 내 안의 폭력에 대해서 얘기하게 될 것이다. <안티크라이스트>의 폭력이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과했다고 생각하느냐는 보는 사람들, 각자의 몫이다.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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