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화, 미자, 민자, 그리고 계화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SBS 드라마 <다섯 손가락>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얻은 여주인공은 누구일까? 물론 <다섯손가락>을 집필한 김순옥 작가는 아니다. 그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그 흐름은 자극적이면서도 지루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시청자들에게 주었다. 주연 여배우 채시라 역시 이 드라마로 큰 이득을 본 주인공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깍쟁이처럼 연기를 잘 한다는 걸 증명했지만 시청자들 중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과거 채시라는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 <서울의 달>의 영숙 <왕과 비>의 인수대비처럼 굵직굵직한 캐릭터들을 맡아왔다. <천추태후>에서 조금 삐꺽거렸던 그녀의 캐릭터는 <다섯 손가락>에서 그 정점을 만난 것 같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여인이라면 여주인공 영랑의 계모 나계화를 맡은 차화연일 것이다. 차화연은 이 드라마에서 속물적이어도 밉지 않고 매력 있어 보이는 팜므파탈 같은 중년여인을 만들어냈다. <다섯 손가락>의 홈페이지에서 계화에 대한 캐릭터 소개는 간략하다. 세상에서 돈이 최고인 여자. 그녀가 드라마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지만 주어진 대사의 분량이 많거나 대사들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차화연은 이걸 자기의 말투와 표정에 녹여내서 고급스럽고 멋진 대사처럼 만들어낸다. 80년대를 대차게 훑고 지나갔던 여주인공 차화연의 능력이다.

드라마에서 차화연을 처음 본 것은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을 각색한 에서였다. 이 드라마에서 차화연은 여주인공인 술집 작부 백화 역으로 등장한다. 백화는 험하게 살아 입은 걸지만 마음만은 하얀 눈밭처럼 깨끗한 여인이다. 추운 겨울임에 틀림없고 백화의 내면 역시 추울 것이 분명한데도 화면 속의 이 여배우는 이상하게 추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차화연은 추운 겨울과 잘 어울리는 배우다. 80년대 동시대 여배우 중에서도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눈물이나 정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눈, 앙다문 입술, 찬바람 부는 뾰족한 목소리. 그녀는 눈보라 속에서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겨울여우 같은 느낌이었다. 혹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 벽난로 앞에 앉아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홀로 커피를 마실 것 같은 이미지거나. 그 장면에서 남자주인공은 필요 없다. 다른 여배우들이 남자주인공과 함께 있을 때 더 빛나는 것과 달리 그녀는 홀로 있을 때 존재감이 더 빛났다.

<사랑과 야망>의 미자 캐릭터는 그런 면에서 차화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최고의 진주목걸이였다. 시골마을 가난한 집에서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했던 미자. 하지만 그 시골에서 평생을 썩기는 죽기보다 싫었던 이 인물은 꿈을 이루기 위해 과감하게 고향을 떠난다. 미자는 단순히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아니라 성공을 위해 고향을 떠났던 우리 시대 모든 남녀의 상징이기도 했다. 악착같은 의지로 야망은 이루었지만 마음을 채울 것은 얻지 못해 언제나 공허했던 존재 미자.

<사랑과 야망>의 미자는 은막의 스타지만 여자로서 사랑은 얻지 못한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냉정하고 보수적이지만 매력은 넘치는 태준이었다. 하지만 태준과의 결혼은 미자에게 사랑의 결실이 아닌 족쇄로 다가오고 그녀를 끊임없이 무기력한 나날로 이끌어간다. <사랑과 야망>의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보통의 드라마가 통상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는 것과 달리 이 드라마는 태준과 미자의 불꽃같은 싸움으로 끝을 맺는다. 늦은 밤 집으로 들어온 태준에게 나이트가운 차림의 미자는 화를 낸다. 두 사람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마치 절정의 순간에서 그대로 암전으로 끝나버리는 한편의 연극처럼.



<사랑과 야망>의 그 장면을 끝으로 차화연은 TV 속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평범한 시간 속에 녹아들었다. 그토록 강렬했던 미자의 모습 역시 20여년의 세월이 가는 동안 빛이 바래갔다. 그리고 2008년 차화연은 <애자 언니 민자>라는 SBS 일일드라마에서 미자에서 민자로 다시 TV 속 세상으로 돌아온다. 백화나 미자와 달리 민자는 수더분한 인물이었다. 민자는 사업가 남편과 결혼해 잘 나가던 동생 애자가 집안이 망해 민자네로 들어왔을 때 다독여주는 착한 언니였다.

하지만 차화연에게 착한 언니라는 옷은 어딘지 맞지 않는 옷처럼 여겨졌다. 화면 속의 차화연도 세월을 거스를 수 없었는지 너무 초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컴백한 중년의 여배우에게 그 정도 역할이 어찌 보면 최선일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그 후 차화연 역시 다른 중년의 여배우들과 비슷하게 조연의 길을 가리란 짐작이 들었다. 착한 엄마, 나쁜 엄마, 수다스러운 이모, 엄친아 자랑하는 얄미운 엄마친구. 하지만 그 후 4년이 지난 지금 차화연은 민자의 옷을 벗고 조연이지만 그녀 특유의 성격을 덧입힌 인물들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그 시작은 KBS 수목드라마 <가시나무새>에서부터였다. 이 드라마에서 차화연은 망가진 일류여배우 윤명자를 연기한다. 마치 <사랑과 야망>의 미자가 모든 것을 잃은 후의 모습 같았다. <적도의 남자>의 마희정은 재벌 남편을 거느린 상류층 사모님이지만 수많은 드라마 속 재벌 사모님과는 달랐다. 그 드라마에서 그녀는 교양 있고 우아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교양 있어 보였다. 그건 우아함 속에 잘 벼른 칼 하나를 숨기고 있는 모습까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섯 손가락>에서 그녀가 맡은 사악하면서도 지능적인 계모 계화는 한발 더 나간다. 놀랍게도 이 드라마에서 차화연은 작가가 쓰지 못한 부분까지 직접 만들어내 계화를 연기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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