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페라 <돈 조반니> 주역 베이스 전준한 [인터뷰]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돌직구 인터뷰] “무대 위에서 막이 올라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꼭 애인 만나기 10초 전 기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긴장과 설레임이 함께하는 순간이죠. 다만 전 긴장보다는 ‘설레임’이라는 긍정의 에너지를 가지고 무대에 오릅니다. 무대는 항상 행복한 곳이니까요.”

“마약 같은 오페라 무대에 취해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가정에 찬 바람이 분 적이 많았다”고 속내를 밝힌 성악가 전준한은 ‘그럼에도 이 길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했다. “음악 외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 가족에게 미안한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여기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많은 음악인들이 이 길을 갑니다. 묵묵히 응원해준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2012 서울시오페라단 정기공연 “모차르트 오페라 시즌”이 오는 17일부터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모차르트 오페라인 <돈 조반니>,<코지 판 투테>,<마술 피리>세 가지 작품을 하루에 한 작품씩 번갈아가며 공연하는 방식이다.

“모차르트 오페라 시즌”의 첫 막을 여는 <돈 조반니>의 주역을 맡은 베이스 전준한을 만났다. 전준한은 바람둥이 돈 조반니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도맡는 시종 레포렐로 역을 맡아 베이스 바리톤 장철유와 번갈아 무대에 선다. 돈 조반니 역엔 바리톤 조현일• 차종훈이 캐스팅 됐다. 김홍승이 연출을 맡아 무대 세트 큰 틀을 바꾸지 않고 영상과 소품으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예정이다. 김주현이 지휘를 윤정섭 이 무대미술을 담당한다.

■ “주인님이 사랑한 여자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객석의 관객”

‘돈 조반니’는 스페인어 ‘돈 후안’의 이탈리아식 발음이다. 주인공인 에스파냐의 호색귀족 돈 조반니는 탕아에다 무신론자다. 오페라 <돈 조반니>는 전설 속의 실존 인물 ‘돈 후안’의 사랑의 행각과 파멸을 표현한 작품. 그의 하인 레포렐로가 벌이는 좌충우돌 여성 편력기가 재치와 유머 넘치는 모차르트 선율로 세밀하게 표현되는 게 특징.

서울시오페라단은 이번 공연에서 무대 장치는 축소화하면서 영상에 포커스를 맞추어 더욱 새롭고 신선한 오페라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여러 겹으로 겹쳐진 평면에 영상을 투영함으로써 새로운 무대 표현을 시도하는데, (미리 찍어 논)영상 속 가수들이 적재적소에 실제로 튀어나와 관객의 상상력을 유발할 뿐 아니라 공연 중 막 전환 시간 역시 절감할 수 있게 된다.

‘레포렐로는 <돈 조반니>의 스토리 텔러이자 주인의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시종이다’고 말한 전준한은 ‘초반엔 캐릭터 찾는 게 어려웠다고’ 전했다. “레포렐로는 땅에 바짝 엎드린 우리나라 식 마당쇠 개념이 아니에요. 주인 앞이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할 수 있는 유럽식의 시종개념이죠. 저 역시 그게 맞다고 생각했구요. 처음엔 슬랩스틱류의 코믹함에 중심을 두고 가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어요. 고어들도 많아 현재 관객과의 소통, 그 경계선에 대한 고민도 있었죠. 좀 더 캐릭터의 색깔을 찾아내는 과정을 거쳐 성격과 소리의 일치점에 다다랐어요. 실제 무대에선 전준한만이 만들어낼 소리와 연기 색깔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듯 합니다.”

<돈 조반니>의 유명 아리아는 레포렐로가 부르는 ‘카탈로그의 노래’이다. 하인 레포렐로가 여자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주인 조반니가 농락한 수천 명의 여자들의 이름이 적힌 수첩을 병풍처럼 펼쳐 보이며 부르는 아리아이다. 이 장면 하나로 ‘레포렐로’역을 맡은 성악가의 기량을 평가하는 것도 사실. 전준한의 비밀병기는 뭘까.

“500석 규모 객석에 앉은 청중 모두를 조반니와 레포렐로의 세계에 초대하고 싶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희극오페라의 재미로 봐주시면 좋겠어요. 전 객석과 무대가 단절 되는 게 싫거든요. 기억나는 일화는 이태리에서 콘서트 오페라로 ‘카탈로그의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데, 당시에도 (조반니가 농락한 여자라는 의미로)관객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어요. 여자관객들의 반응이 참 좋았어요. 연출님은 큰 선만 정해준 뒤 나머지 디테일은 성악가들의 역량이라 제 액팅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재미있게 보려면?

오페라 <돈 조반니>에는 8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기사장(베이스 손철호▪ 송필화), 돈 오타비오(테너 강신모▪박준석)외 6명의 남녀 캐릭터가 흥미롭다. 세 가지 타입의 남자와 세 가지 타입의 여자가 혼재 돼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남자를 살펴보면, 약 2천명의 여성을 만났지만 진정 자신을 만족시킬 여자를 찾지 못해 구도자의 길을 가는 돈 조반니, 돈 조반니가 되고는 싶지만 그럴 능력은 부족해 조반니를 악당으로 비난하는 레포렐로, 귀여운 약혼녀 체를리나의 애교에 넘어가는 순박한 농부 마제토(바리톤 이재현)를 들 수 있다.

돈 조반니가 오페라 속에서 쫓고 쫓기는 여자는 단 세 명. ‘카탈로그의 노래’ 여자 속 대표적인 여인들이다. 우선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귀족여인 돈나 안나(소프라노 유미숙▪ 정꽃님), 연애지상주의자 돈나 엘비라(소프라노 곽현주▪ 김샤론), 당장의 욕망에 충실한 체를리나(소프라노 고정호▪ 김온유)이 그들이다.

전준한은 각기 세 명의 남자와 여자를 놓고 자신이라면 어느 쪽과 가까운지 상상하면서 오페라를 감상한다면 보다 재미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페라는 작품에 대한 정보를 알면 알수록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어요. <돈 조반니>에 대한 단편적 지식은 주인공이 호색한이라는 거죠. 반면 캐릭터별 약간의 특성만 알면 오페라가 몇 배는 재미있어져요.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엘비라’는 조반니가 미워죽겠는데 한번 사랑한 남자에게 계속 끌리는 여자인거죠. 어찌보면 제일 불쌍해요. ‘체를리나’는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마제토)가 있음에도 벤츠타고 온 장동건 같은 미남(조반니)의 유혹에 흔들리는거죠. 과연 나는 어떤 여자와 비슷할까 생각해보면 연극 감상하듯 재미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전준한 스스로 판단하기에 본인은 어떤 남자 캐릭터와 닮았을까. “제 안에 있는 남자요? 글쎄요. 돈 조반니, 레포렐로, 마제토 성격 모두가 조금씩 들어있겠죠. 하지만 전 ‘레포렐로’ 인생을 살기로 결정했으니 죽어도 ‘레포렐로’로 살아야 합니다.(웃음)”

캐릭터의 색깔에 따라 배우 및 가수의 일상도 영향을 받는 법. 전씨는 3개월 내내 ‘레포렐로’의 텐션으로 살아 우울할 틈이 없다고 했다. “넘어지고 구르느라 온 몸이 멍투성이지만 재미있는 캐릭터일 뿐 아니라 너무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라 행복해요. ‘레포렐로’에게 무릎보호대는 필수죠. 노동분량이 상당해요. ‘레포렐로’는 생명수당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강도가 세죠.”



■ 스마일 성악가 전준한

‘목소리가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남학생은 대일 외고 스페인어과를 나와 97학번으로 연세대학교 성악과를 들어간다. 실제 나이대로 하면 91학번이어야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6년간의 방황의 시기를 거쳐 거부할 수 없는 성악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성악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기로 결심한 청년은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수료, 비보 발렌티아 국립음악원에서 Diplom, 로마 Accademia Internazionale di Musica와 Accademia Arena에서 성악과 고급 오페라 음악분석, 합창지휘등 3개의 Diplom을 취득했다. 이후 일 세미나리오시립음악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준한은 성악과에 들어간 것도 늦었고 오페라 무대 데뷔도 늦은 만학도라고 했다. “조금 돌고 돌아 성악가의 길을 가게 됐어요. 늦었다고 볼 수 없는 게 늘 성악이 신선하게 느껴져 오히려 늦게 시작한 게 이점으로 작용한 듯 해요.

고교 시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본 오페라 <카르멘>이 절 성악가의 길로 안내했어요. 당시 돈 호세 역 으로 전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인 박세원 선생님이 나오셨어요. 이어령 장관님이 못 가게 된 오페라 티켓이 지인인 어머니를 거쳐 저에게 넘어오게 된 것. 20년이 흘러 박세원 단장님이 계신 서울시오페라단이 제 직장이 된 것 모두가 우연을 넘어 운명인 것처럼 느껴지네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따뜻한 저음으로 시종일관 인터뷰 분위기를 재미있게 만든 성악가 전준한은 웃음치료사이기도 하다. “유학생활 중에 공황장애, 우울증이 와 웃음치료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어요. 제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꾸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성악에 적용해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스마일 아이콘’입니다.(웃음)”

2010년 귀국 후 예술의 전당 <라 보엠>으로 국내 데뷔한 전준한. 2011년 서울시오페라단 <토스카>와 <라 트라비아타>를 거쳐 2012년 창작 오페라 <연서>에 “재필”역으로 캐스팅 됐다. 당시 양정웅 연출가는 “코믹하면서 동시에 광적인 캐릭터 ‘재필’역을 극장을 울리는 발성과 내면연기로 완벽하게 창조해 냈다”는 평을 했다. 현재 피앤피클래식 소속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엔 충무아트홀에서 올려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듀폴 남작 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사실 듀폴 남작 역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조역이다. 하지만 전준한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인물로 재창조했다. “처음에 저 역시도 어떻게 듀폴을 그려낼까 고민이 많았어요. 박세원 단장님이 던지신 ‘넌 듀폴이 어떤 사람인 것 같으냐’란 질문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전 구속된 모 대기업 간부처럼 느껴졌거든요. 포장된 깡패 느낌 있잖아요. 단장님도 제 의견에 동의해주셨어요. 그 결과 눈에 띄는 역할도 아니고 비중도 크진 않지만 빛나는 한 씬을 만들어냈어요. 언론에서도 듀폴에 대한 좋은 평을 해셨더군요. ”

오페라는 철저한 팀웍으로 움직인다. <라 트라비아타>에서 전준한이 빛날 수 있었던 이유 역시도 본인을 돋보이려는 노력보다는 융화시키려는 노력이 앞섰기 때문이다. “오페라는 절대 단독으로 움직일 수 없어요. 공동작업이잖아요. 전체 선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캐릭터의 색을 합당하게 잡아가야 돼요. 그 뒤에 빛나는 주역, 색깔 있는 조역이 될 수 있는 거죠.”

■ “베이스는 저음도 잘 내는 가수이다.”

오페라는 잠들어있던 관객의 시각과 청각의 세포들을 일으켜 세우는 살아있는 예술이다. 테너의 시원한 고음, 소프라노의 화려한 고음, 바리톤의 여유로운 고음을 눈 앞에서 직접 들은 관객들은 절로 감탄하게 된다. 그렇다면 고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베이스는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을까.

“베이스는 ‘노래하듯이’ 유연하고 아름답게 부르는 ‘바소 칸탄데’(basso cantante), 가장 묵직하고 낮은 소리를 내는 ‘바소 프로폰도’((basso profondo)등으로 나뉘기도 하죠. 바리톤이 베이스 아리아를 부르면 이상하게 느껴져요. 반면 일반 바리톤보다 음역은 약간 낮지만 음색 면에서 바리톤의 특성을 보이는 베이스는 노래를 불렀을 때 소리의 맛이 달라요. 바리톤이나 테너와는 다른 다양한 맛을 맛 볼 수 있는 게 베이스의 매력 아닐까요.

흔히 음역 가지고 성악가를 구분하는데, 그건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소리의 중심 색이자 핵을 가지고 판단하는 게 맞아요. 제 소리의 중심은 베이스입니다. 제가 가진 에너지를 잘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은 ‘바소 칸탄데’이구요.”

‘베이스는 저음도 잘 내는 가수’라고 정의한 전준한은 “목을 눌러서 억지스럽게 내는 게 아닌 편하게 저음을 낼 수 있는 가수가 진짜 베이스라고 생각해요. 성악적인 훈련을 통해 고음은 어느 정도 도달할 수 있어도 타고난 저음이 아닌 이상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음을 온전히 내지 못하는 베이스는 듣는 청중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겠죠.”

‘레포렐로’라는 맞춤 옷을 편하게 입은 베이스 전준한은 오는 17일과 23일 단 2회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너무도 사랑하는 애인(오페라)을 만나러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떨리기도 하지만 전 ‘설레임’이라는 긍정의 에너지를 믿어요. 무대 위에선 최고의 가수,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엔 가장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정다훈 기자, 전준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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