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흉터는 네가 다섯 살쯤 개한테 물려 생긴 것이다. 기억하느냐? 그때 그 개보다도 덩치도 작은 네가 이 어미를 구하겠다고 겁도 없이 개한테 달려들었다. 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넌 결코 나약한 적이 없었단다.”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고려 말이 배경인 팩션 사극 SBS <대풍수>. 왕실의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신묘한 풍수지리 ‘자미원국’이 갈등의 단초이긴 하나 비극의 시작은 국무 수련개(오현경)와 이인임(조민기)의 불륜에서 비롯됐다. 감히 국무의 몸으로 사통을 하여 자식을 낳은 수련개는 아들 정근(송창의)을 이인임의 아내인 왕영지(이진, 이승연)에게 맡겨 기르게 하는데 자신이 낳은 한 점 혈육 지상(지성)을 잃은 영지는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를 정성을 다해 잘 키우면 그녀의 아들 또한 어디에선가 잘 자라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그들이 약조를 지키기는커녕 목숨처럼 사랑했던 동륜(최재웅)과 아들을 죽였다는 걸 알게 된 그녀. 복수를 꿈꾸어보지만 교활하기 짝이 없는 권력의 화신 수련개에게 당할 재간이 있나. 기른 정이 어찌나 무서운지 불륜의 흔적인 정근이에게 화가 미칠 게 두려워 머뭇거리는 사이 수련개의 계략에 의해 오히려 왕을 기망했다는 죄로 옥에 갇히고 만다.

세월이 한참 흘러 영지는 노국공주의 도움을 얻어 다시금 빛을 보게 되는데 이번엔 장성한 정근이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자 영지는 지난날 옥에 갇힌 자신을 어린 정근이가 찾아와 위로했던 것처럼 옥으로 정근을 만나러 온다. 치 떨리는 원수의 핏줄이지만 마치 제 자식인 양 따뜻하게 감싸주는 영지.

그녀를 친어미로 알고 있는 정근은 “대국에 있는 동안 국무도 미웠고 아버지도 원망했죠. 허나 그 누구보다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은 국무도 아버지도 아닌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고초를 겪고 계시는데 소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 저를, 너무 나약한 저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울먹인다. 그 말에 영지는 정근의 손목에 남아있는 선명한 상처를 어루만지며 다섯 살짜리 어린 정근이 자신이 개에게 물리는 줄 알고 개에게 덤벼들었던 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훈훈했던 모자상봉도 잠깐, 그들의 만남을 목격한 수련개는 정근을 찾아와 자신이 생모라는 사실을 알리고 만다. 만약 아침이나 저녁 일일드라마였다면 핏줄의 비밀이 밝혀지기까지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며 족히 수십 회는 허비하지 않았을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생아로 만들지 않고자 왕족인 영지에게 보냈던 것이라고, 자신은 그저 그림자가 되어 도련님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털어놓는 수련개.

하지만 실은 이인임과 자신이 원나라가 고려왕으로 봉한 덕흥군에게 첩지를 받았음을 정근이가 알고 있기에, 그가 왕에게 고변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은 것이다. 자식이 차마 어미를 어찌 사지로 몰아넣겠느냐는 배짱인 것. 게다가 정근을 노리는 자객에게 칼을 대신 맞는 눈속임까지 연출하다니, 참 대단한 여자랄 밖에.

앞으로 영지의 아들이자 ‘자미원국’의 비밀을 밝혀낼 지상과 사사건건 대립할 정근이 너무나 안쓰러운 건 바로 생모 때문이다. 다섯 살짜리 꼬마 적에도 어머니라고 믿었던 영지의 안녕을 위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개에게 덤벼들었던 그가 아닌가. 아무리 날을 세운다 한들 어미는 어미. 아마 생모로 인해 점점 더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들리라. 그에 비하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도 올바르고 따뜻한 영지를 어머니로 둔 지상은 얼마나 다행인지.

정근의 생모가 속전속결 밝혀진 걸 보면 영지가 지상의 어머니라는 사실도 수일 내로 밝혀지지 싶다. 이미 언급한 인물들 외에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게 될 이성계, 공민왕의 아이를 낳아 왕후의 자리에 오르길 바라는 또 다른 악녀 반야, 그리고 공민왕을 현혹시켰다는 중 신돈, 이처럼 고려 말 이야기라면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 악역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허구의 인물 정근이 있다. 측은지심일까? 이 청년에게 자꾸만 눈길이 간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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