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은혜·정려원·박정아가 배우로 살아남은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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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우리가 배우에게 기대하는 것은 삶에 대한 그럴듯한 진실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전문배우들이 방점을 찍는 자리는 바로 ‘그럴듯한’일 것이다. 그들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서 그 영화나 드라마 속의 인물로 시청자들을 설득시킨다.

예를 들어 채시라는 <다섯손가락>의 채영랑으로 변신해서 말도 안 되는 여주인공의 성격을 말이 되게끔 만들어 심지어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김희애는 늘 본인의 포즈와 연기방식이 있지만 <아내의 자격>과 <내 남자의 여자>의 두 인물이 전혀 다른 캐릭터라는 사실만은 시청자들에게 분명히 알려준다.

하지만 이 톱클래스의 여배우들이 숨기고 있는 단단한 비밀이 바로 ‘그럴듯함’이다. 그들은 드라마 속 인물들의 성격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젊은 날부터 훈련받은 배우들이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동선은 언제나 정확하며, 눈물샘을 자극하는 방식 역시 노련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노련함은 그럴 듯한 연기에 자연스러움이란 덧칠을 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부로만 되는 것은 아니어서 아무리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나온 배우 김태희가 몇 년 째 노력으로도 이룰 없는 길이다. 김태희는 연기를 한다. 시청자들은 그걸 다 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건, 화를 내건, 토라지건 간에. 하지만 그녀의 연기는 요점정리 된 노트처럼 보이지만 별로 훔쳐보고 싶은 노트는 아니다.

반면 어딘지 배우라고 부르기에는 엉성하지만 윤은혜, 정려원, 박정아의 연기는 일기장에 가깝다. 아이돌 가수 출신의 그녀들의 연기는 그럴듯한 진실에서 ‘진실’에 방점을 찍는 듯하다.

세 사람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연기 폭이 좁은 건 확실하다. 심지어 같은 드라마나 영화 안에서도 캐릭터의 성격이 조금만 달라지면 이 세 명은 종종 감을 잡지 못해 허둥댄다. 윤은혜는 <아가씨를 부탁해>에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깍쟁이 같은 여주인공의 성격에 끝까지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것만 같았다. 정려원은 사극인 <자명고>에서 자연스러운 연기와 사극 연기의 충돌로 본인의 캐릭터가 망가져버렸다. <웃어라 동해야>에서 박정아는 악역을 악역답게 소화 못해서 시청자들의 원성을 사는 희한한 악역이었다. 하지만 캐릭터와 배우가 한 몸의 맞춤옷이 될 경우에 세 사람의 연기는 프로 여배우들의 연기와는 다른 희한한 매력을 발휘한다.



<궁>에서 윤은혜가 평범한 여고생 신채경의 배역을 맡았을 때만 시청자들의 의아해했다. 게다가 드라마가 시작된 뒤로 사람들은 경악하기 시작했다. 윤은혜는 도무지 연기라고는 할 줄 모르는 백지 같은 상태로 이 역할에 뛰어든 것 같았다. 발음은 엉망이었고, 감정선은 제멋대로였고, 대사는 가끔 엉뚱한 방식으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은 윤은혜가 연기하는 신채경에 몰입했다. 그건 우선 신채경이란 인물이 살아있는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흔히 웹상에서 말하는 발연기였지만 매력적인 맨발이었던 셈이다.

이후 윤은혜의 서툴면서도 자연스러운 연기는 <포도밭 사나이>의 도시처녀지만 정말 시골처녀에 어울리는 맹하면서 순박한 이지현에서 빛난다. 그리고 이어 <커피프린스 1호점>에 이르면서 그녀는 남장여자 고은찬이라는 희대의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고은찬 역시 대단한 연기스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윤은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남장을 하게 된 귀여운 여자아이를 자연스럽게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후 그녀는 자신과 성격이 안 맞는 똑 부러지고 날렵한 역할을 맡을 때마다 늘 연기의 허점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연기를 위한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최근 <보고 싶다>에서 윤은혜는 자신의 페이스를, 그것도 더 성숙한 느낌으로 되찾은 것만 같다. <보고 싶다>의 여주인공 이수연은 눈물을 흘린다, 정말 슬퍼서.



정려원 역시 윤은혜처럼 연기의 자연스러움을 장점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윤은혜의 방식이 로맨스에 특화된 여주인공 감정의 자연스러움이라면 정려원의 연기는 모든 생활인에 적합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그녀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연기학원의 배우들이 아니라 그 생활을 하는 인물을 데려와 쓴 것처럼 보인다.

태백의 시골처녀 김복실, 운둔형외톨이 김씨, 재벌회장의 막가파 손녀딸 백여치, 되는 일 없는 드라마작가 이고은, 심지어 <안녕, 프란체스카>의 흡혈귀 엘리자베스까지 그러하다. 특히 대사처리에서 종종 실망스러운 윤은혜와 달리 정려원은 대사처리까지 말끔하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종종 그 자연스러움 때문에 연기의 강약조절이 아쉬울 때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형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에는 정려원의 연기가 안 어울리는 단점이 있다. 정려원에게 특히 어울리지 않는 작품은 선 굵은 연기가 필요한 작품성 있는 대작이나 정형화된 연기의 옷을 입어야하는 사극 종류의 드라마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영역 안에서 정려원은 아마 계속 자연스러운 생활인 연기의 길을 걸을 것 같다.



반면 박정아의 경우는 이제 시작인 것 같다. <웃어라 동해야>와 <당신뿐이야>에서 그녀의 연기에 대한 느낌은 열심히는 하지만 그 인물을 연기하기에 바쁘다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내 딸 서영이>에서 강미경 역할을 맡으면서 조금씩 자연스러움을 배워가는 것만 같다. <내 딸 서영이>의 레지던트 강미경은 여우같은 여자가 아니라 공부는 잘하지만 눈치 없고 털털한 소년 같은 성격이다.

아마 박정아 본인의 성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여서인지 강미경의 모습 곳곳에서 쥬얼리의 리더가 아닌 연기자의 모습이 보인다. 게다가 쥬얼리의 스타였던 박정아는 욕심 부리지 않고 주연이 아닌 조연의 위치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것 같다. 본인이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가 주연보다는 조연에게 더 맞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상당수의 아이돌들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 조연을 맡는다. 이들에게 오래도록 훈련받은 프로 배우의 연기력을 기대하는 일은 사실 무리일지 모른다. 윤은혜, 정려원, 박정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이 배우로 변신하지 못한 다른 아이돌 출신과 차별화된 점은 기존의 배우와는 다른 자신만의 신선한 ‘무엇’을 시청자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배우로의 변신을 꿈꾸는 다른 아이돌들이 찾아야만 하는 지점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바로 그 ‘무엇’ 아닐까?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SBS,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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