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영이>, 그 흔한 악역 한 명 없이 성공한 비결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KBS 주말드라마 <내 딸 서영이>는 주말극으로는 전에 없던 비막 드라마다. 물론 비빔 막국수 드라마라는 건 아니고 비극과 막장이 섞인 드라마라는 이야기이다. 수많은 자극적인 드라마에서 반복되어 왔던 맵고 달고 시큼한 막장소스를 걷어내면 이 드라마 안에 담긴 고전적인 비극의 면발이 보일 것이다.

<내 딸 서영이>의 주요 인물 중에 악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대개 선한 쪽이거나 최소한 우리가 흔히 악하다고 믿는 성질의 것들을 경멸하는 인간형에 가깝다. 서영이의 시아버지인 기업 회장이자 독선적인 가장 강기범마저도 알고 보면 모든 걸 이성적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합리적인 인물이다.

서영이의 비밀을 터트린 정선우 역시 악녀 드라마에서 흔히 등장하는 무대포의 못된 여자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정선우는 서영이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인물로 보일 때가 많다. 모든 일을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상처 받은 것을 들키기 싫어하며,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만 둘의 차이점이라면 정선우는 욕심 많고 자존심 강한 모범생 소녀였고 이서영은 욕심마저 없으면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자존심으로 버티며 살아온 모범생 소녀라는 점 아니었을까?

<내 딸 서영이>는 따라서 인물들의 악함 때문에 비극이 전개되는 건 아니다. <내 딸 서영이>의 주요 인물들은 스스로 자신의 가슴팍에 대못을 박는 인물들이다. 괴롭게 살기 위해서? 그런 인간이 존재할리 없다. 그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쓴다. 하지만 최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보잘 것 없는 차선 대신 그럴듯한 차악을 택하는 것이 그들의 비극이다.

드라마 초반부 술에 절고 도박에 절어 사는 최악의 아비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서영 이상우 남매의 아버지 이삼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한때 잘 나가는 사업가였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사업실패로 집안이 몰락하자 그는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쥐처럼 차곡차곡 한푼 두푼 모으기보다 차라리 일확천금의 요행을 바라고 어두운 동굴 속을 헤매는 박쥐처럼 날아다닌다. 단숨에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는 차악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 결과 아내의 죽음을 방치하고, 딸에게 버림 받는 아비의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삼재는 우연히 결혼식 하객 대행으로 딸의 결혼을 지켜보고 자신의 과거를 뉘우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안타까움과 비극이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이삼재는 과거를 씻고 다시 성실한 사내로 돌아간다. 하지만 시간은 너무 늦었다. 이미 망가져버린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더는 회복될 여지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없는 아버지고, 없는 장인어른이고, 없는 사돈어른이다.

하지만 이삼재의 운명보다 더 비참한 것은 장녀 이서영의 삶이다. 이삼재는 최소한 딸의 행복을 믿고 있고, 자신의 초라한 존재를 받아들였으며, 그 후 거짓된 삶을 살지는 않는다. 물론 금쪽같은 사위 앞에서 무언가 사연이 담긴 알 수 없는 어르신으로 위장해야 했지만 그 정도로 그의 삶을 거짓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짓된 삶을 살아가며 진짜 비극을 품고 가는 자는 이삼재의 딸 이서영이다. <내 딸 서영이>의 여주인공 이서영은 자신의 인생에서 아버지를 삭제시켰다. 물론 그건 최선이 아닌 차악의 선택이었다. 처음에는 강우재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의 부모에게 부끄러운 아비의 모습을 이야기하기 싫어서 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서영은 강우재의 끊임없는 사랑 덕에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한다. 그러기 위해 가족을 버리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벌였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위너스 기업의 며느리가 되었고 판사를 거쳐 변호가 되었으며 행복한 안정을 누린다. 하지만 이삼재에게도 적용된 ‘나는 너무 늦게 나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이서영에게 더 큰 비극으로 작용한다.



그건 이서영 자신의 심리적 고통이 생각보다 컸다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서영은 이미 결혼 전에 이미 그 고통을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서영은 자신이 결정한 차악의 선택이 최악의 상황으로 주변 사람들의 삶을 휘저을 수 있다는 건 미처 알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차악이 최악이란 이름의 날카로운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비극의 법칙 역시.

여기서 또 하나 이서영의 거울인 윤이사가 등장한다. 윤이사 역시 이서영처럼 최선을 위해 차악을 택한다. 강기범의 아이인 성재를 몰래 낳고 그 아이를 심지어 강기범의 집에 버려두기까지 한 것. 그리고 윤이사는 감기범의 가족 주변에서 성재를 지켜보며 살아간다. 하지만 비밀의 봉인은 열리고 그 파장은 어마어마한 폭풍으로 돌변한다.

윤이사 사건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이서영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비밀을 폭로하려 한다. 안타깝게도 그 자존심마저도 자신의 그림자인 정선우의 폭로에 의해 짓밟혔지만 말이다.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우아한 응접실 장면은 그래서 더 소름끼친다. 남편과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판사와 검사 변호사처럼 이서영을 바라본다. 반대로 테이블 건너편 소파에 앉아 있는 변호사 이서영은 순식간에 초라한 죄인으로 돌변한다. 한 인간이 스스로를 속여 가면서까지 지켜왔던 마지막 자존심에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비극의 순간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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