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스트 스탠드>, <하이눈>의 코믹액션 버전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이 영화는] 김지운의 신작 <라스트 스탠드>는 기묘하게도 프레드 진네만의 1952년작 <하이눈>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실제로 <하이눈>을 염두에 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설정만큼은 과거 영화에 대한 김지운 특유의 오마쥬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작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서부의 한 마을이 있고 그리고 거기서 작고,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려는, 지금 세상에서는 극히 보기 드문 착한 권력자(보안관)가 있는데 어느 날 극악무도한 악당이 이 마을을 급습한다는 것이다.

김지운이 영리한 감독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같은 설정은 언제부턴가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관습, 공식이 돼있다는 걸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설정만 유지하고 나머지는 싹 바꾸는 전략을 택했다.

<하이눈>이 웨스턴 무비였다면 <라스트 스탠드>는 이른바 서던 웨스턴 무비다. <라스트 스탠드>의 악당은 라스베가스에서 애리조나주의 섬머튼이라는 작은 마을을 거쳐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달아나려 한다. 악당은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타고 달려오는 대신 300Km를 넘게 달리는 슈퍼 카를 타고 질주한다. <하이눈>에서는 악당의 출현이 시시각각 마을 사람들을 압박해 오며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 올리지만 김지운 감독은 긴장의 수위를 오히려 낮추며 마치 게임을 즐기라는 듯 분위기를 유도한다. 이런 식이다.

주인공인 레이 보안관(아놀드 슈왈츠네거)이 슬랩스틱 연기를 하듯 과장된 모습으로 마을 레스토랑에 뛰어 들어와 사람들에게 빨리 피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악당이 쳐들어 오고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심드렁하다. 그중 한명이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이 나이에 지금 내가 칼로리와 콜레스테롤이 잔뜩 들어간 정크 푸드를 시켰는데 그 악당이란 존재가 그것보다도 위험하단 말야?!” 그러자 레이 보안관은 숨을 헉헉대며 이렇게 답한다. “그럼말야. 창가에서 보지 말고 좀 떨어져 있으라구.”



<하이눈>의 주인공 게리 쿠퍼는 고독한 영웅이지만 <라스트 스탠드>에서는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혼자 싸우기에는 너무 늙었기 때문에 ‘도우미’ 캐릭터를 전면 배치한다. <하이눈>은 시종일관 엄숙한 표정이지만 <라스트 스탠드>는 코믹한 웃음을 짓고 있는 영화라는 얘기다. 결국 <하이눈>을 버라이어티 코믹 파티 버전으로 바꾸자는 것이 김지운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의 판단은 비교적 옳았다고 본다. 온갖 서부극과 액션활극이 만들어진 할리우드에서 첫 데뷔작이었다. 할리우드의 흥행공식을 유지하되 그것이 클리셰(cliche)로 비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비틀기’가 최선이었을 것이다.

<라스트 스탠드>는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고 활력이 넘친다. 총격신이 난무하고 악당들을 처단하는 보안관과 그의 동료들은 차라리 무식해서 용감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저기 폭발 신이 난무하고 2차 대전 때 쓰였던 기관단총이 등장해 사람들을 후련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안다. 오랜만에 착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시원하게 무찌르게 된다는 것을.



서부극의 피날레인 일대일 결투를 김지운은 섬머튼에서 멕시코로 이어지는 협곡의 가교에서 벌어지게 한다. 멋있는 권총 대결이 벌어질 것 같지만 아놀드 슈왈츠네거는 오히려 허리춤의 총집을 벗어 던진다. 그리고 막싸움을 시작한다. 어쩌면 슈왈츠네거의 육질 액션을 보는 건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그러니 잘 봐두라고, 은막 뒤에서 김지운 감독이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각에서는 <라스트 스탠드>를 두고 할리우드에 진출해 전혀 자기 색깔을 유지하지 못한 채 진부한 장면으로만 일관하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 영화는 진부함을 넘어서기 위해 진부함 그 자체를 끌어 안으려 했던 역설의 선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할리우드는 영화감독의 무덤이라고들 한다. 그만큼 감독에게 재량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라스트 스탠드>에서 김지운은 설렁설렁 웃어 가며 작품을 만들었다는 인상을 준다.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그 역시 실컷 즐겼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어디인가. 그것도 출중한 연출 기량에 속한다. 김지운이 할리우드에서 빠른 시기에 연착륙하는 감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주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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