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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 걸으면 보이는 것들
기사입력 :[ 2013-02-16 16:34 ]


- 걷기만 하는 고행 프로젝트, 예능이 될 수 있나

[서병기의 대중문화 프리즘] 걷기만 하는 고행 프로젝트가 예능이 될 수 있을까? 스타들의 6박 7일 국토대장정 이야기를 담은 SBS <행진-친구들의 이야기>는 그런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연예인들이 실내에서 찧고 까부는 작위적인 버라이어티 예능보다 <행진>처럼 자연스럽고 소소한 재미와 공감, 힐링을 포인트로 하는 다큐예능이 시청자에게 다가가는 힘이 더 커졌다.
 
<행진>은 제작진의 과욕으로 조작 논란에 휩싸인 <정글의 법칙>과 <인간의 조건> <땡큐-스님, 배우 그리고 야구선수> <남자가 혼자 살 때>와 같은 다큐예능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큐예능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상황과 기법을 설정하는 버라이어티 예능에 비해 결과를 예측키 어렵다. 진행자도 없고 콩트와 설정이 없어 위험부담이 많았다. 하지만 현실속에서 자연스럽게 부딪히며 나오는 소소한 반응들에 시청자들이 주목했다.

1900년대말 IMF로 나라가 힘들때,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마라톤이나 걷기, 해병대 극기체험이 유행했다. 힘든 현실을 극복하고 마음을 다잡기 위한 실천의 장이었다. 하지만 15일 방송된 <행진>은 그때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띤 국토대장정이다. 이는 남한에서 가장 춥다는 강원도 철원부터 양양까지 171km를 도보로 완주하는 프로젝트에 참가한 이선균의 고민과 정확히 일치한다.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가장 이선균은 지난 5~6년간 연기만 하고 달려왔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히트작들을 남겼다. 그런데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하는 느낌과 함께 짜증이 몰려오고 힘들어지고 움츠러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17년전 떠났던 국토대장정에 나서기로 했다. 이선균은 친구들을 불러모았고, 요즘 자주 만나는 유해진 선배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최근 역도선수에서 은퇴한 장미란, 이선균과 영화 작업을 함께 한 배우 정은채 등이 동행했다.
 
이선균은 추운 날씨에 눈에 덮인 길을 걷느라 힘들 때는 “내가 왜 이 프로그램을 한다고 했지”라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친구와 동료들과 함께 걸으며 힘들 때는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조금씩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행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IMF때보다 물질적으로는 훨씬 더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 SNS와 모바일 등 디지탈 기기의 발달은 눈부시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외롭고 쉽게 좌절감에 빠진다. 뭔가 바쁘고 화려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책상에 앉아 생각해보면 아무런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들간의 소통은 더욱 힘들어졌다. 층간소음문제로 살인을 저지른다. 자살율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다. 어디에다 화를 내야 될지 모르겠다. 혜민 스님이 인기 연예인보다 더 자주 방송에 나오고, 그가 쓴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200만부나 팔리는 기현상도 대중의 이런 심리상태에 기인한다.

이럴 때는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에게 ‘옆’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수밖에 없다. 계속 걷다보면 뛰어가면서 볼 수 없었던 게 보인다. 자연속에서 눈을 밟으며 친구들, 선후배들과 함께 걷다보면 삶의 더께 같은 것들이 하나씩 떨어져나감을 느낄 것이다.
 
장미란과 오정세는 열심히 걸었지만 허리가 아파 동료들과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차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친구들은 이들을 위해 자기 일처럼 도와준다. 하지만 우리는 직장에서, 도시의 삶속에서 동료와 이웃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지 못하지 않나.

 

윤희석은 한국예술종합학교 1학년때부터 이선균과 같은 과 친구다. 이선균이 유명해지니까 연락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했다.(대학 재학중에는 윤희석이 훨씬 더 잘나갔다) 또 이선균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신혼여행길에 올라, 그때 가지 못한 게 부담으로 남아있었다. 윤희석은 친구들이 도보여행으로 지쳐가는 지점에 미리 와 원숭이 탈을 쓰고 이들을 위로해주고 닭백숙을 직접 만들어 친구들을 대접하면서 이선균에게 가졌던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요즘 여행 트렌드는 ‘길, 야생, 리얼’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친구, 동료들과 길을 걸으면서 비닐하우스내에서 텐트를 치며 잠을 자기도 했던 ‘행진’은 이 추세를 잘 반영했다. 걷기 열풍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제주 올레를 비롯한 걷기 열풍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행은 결핍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걷기는 기존 여가문화가 제공해주지 못했던 것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오너 드라이버와 도로의 발달로 차를 급하게 몰고,(그것도 획일적인 모습을 한 고속도로를 통해) 여행지의 콘도와 펜션, 식당을 둘러보고 오는 것이 여행의 주요 패턴이 돼버렸다. 우리의 여행문화는 일하는 문화처럼 획일성을 가지고 집단적으로 빠르게 움직였던 것이다. 어차피 여행지는 방문객을 실망시키기 마련이다. 여행의 성공 여부는 장소가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 가느냐로 판가름 난다. 아무리 명소를 구경한들, 함께 간 가족끼리 별 대화 없이 고속도로로 차를 몰고 나갔다면 가족과 ‘함께 한’ 내용은 별로 없는 셈이다.
 
한적한 비포장 도로를 걸어보면, 차를 타고 빨리빨리 여행지로 향하던 방식에서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일상사에 대한 성찰일 수도 있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자신감일 수도 있다. 새로운 에너지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걷기’가 주는 소중한 선물이다. ‘길’ 열풍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행진>도 오랜 만에 그런 체험에 나선 친구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시청자에게도 그 느낌이 전해졌을 거라고 믿는다.
 
설 연휴에 철원 직탕폭포(일명 나이아가라 폭포)를 다녀온 나는 ‘행진’을 보면서 두 가지가 생각났다. 하나는 100㎞ 행군했던 군 시절 나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내가 사적인 ‘행진’을 시도한다면 누구와 함께 가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오랜 기간 연락이 끊겼지만 대화해보고 싶은 몇몇 친구로 멤버를 구성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행진’에서는 썰매끌기, 줄다리기, 동전던지기 등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게임을 통해 음식만들기와 설겆이 당번을 정했는데,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철원에서 춘천이나 화천 넘어가는 길은 오르막도 많고, 민가가 드문 길이다. 차를 타고 가면 20~30분이면 지나갈 길을 천천히 생각하고 사색하며 아날로그식으로 걷다보면 사고력이 살아나고 재충전의 기회가 될 것이다. 자신과 대화도 나누고, 동료들끼리 서로 챙겨주고 배려하는 <행진>의 모습은 교류와 소통의 욕구는 지니고 있지만 실행하기 쉽지 않은 도시민들에게 적지 않은 공감을 심어줬다.
 
칼럼니스트 서병기 < 헤럴드경제 선임기자 > wp@heraldcorp.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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