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세계>, 이정재의 재발견된 이유 [박훈정 감독 인터뷰]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생생인터뷰] 박훈정 감독의 신작 <신세계>가 무서운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국내 최대의 기업형 범죄조직 골드문과 그 조직 내에 침투한 언더커버 형사의 갈등을 그린 <신세계>는 영화가 공개되기 직전 낡고 식상한 홍콩 누아르일 뿐이어서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는 둥 우려섞인 예측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충무로에서는 현재 또 다른 웰메이드 수작이 나왔다며 시끌법석한 분위기다.

무엇보다 누아르 영화는 거의 성공한 적이 없어서 <신세계>의 흥행을 계기로 이쪽 장르의 작품이 계속 만들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분석이다. 남들이 뭐라 해도 혼자만큼은 <신세계>의 흥행과 성공을 굳게 확신해 온 인물이 있다. 바로 영화를 만든 주인공 박훈정 감독이다. 한남동에 있는 영화사 사나이픽쳐스에서 박훈정 감독을 단독으로 만났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에는 한국판 <무간도>라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 보니까 언더커버 설정만 가져왔고 완전히 다른 영화더라. 실제로 그 영화에 영향을 받았나?

“닮았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무간도> 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대부>의 느낌도 담고 있고 <도니 브래스코>와 <헬스 키친> <히트> 등의 색감도 묻어 있다. 심지어 이완 맥그리거가 주연을 맡았던 <보일러 룸>의 장면이 떠올려지기도 할 것이다. <신세계>는 이들 영화를 피해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 그런 영화들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 영화를 적극적으로 담아내자는 게 내 주의였다. 이야기는 다르게 가면서 그 영화들의 정수를 하나하나 가져오게 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조직 내 경찰 프락치로 알려진 한 남자를 부하들이 잔인하게 살해한 후 주인공 이자성, 곧 이정재가 노을 직후의 새파란 느낌이 나는 바다를 바라보는 풀 샷은 영화 <히트>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자신의 집에서 창밖을 내다 보는 색감과 화면 구성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 장면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단순하게 베낀 것 이상의 느낌으로 영화의 오프닝을 압도한다.)



캐릭터들 얘기를 해 보자. 캐릭터 구성과 비중의 배합이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강과장(최민식) 캐릭터의 톤 조절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영화는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세력에 방점이 찍혀 있다. 골드문이라는 조직이 있고 조직 내부는 정청파(황정민)와 재범파(박성웅)가 의문사한 조직 보스(이경영)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대결을 벌인다. 거기에 이 골드문 조직을 후계자 싸움을 이용해 무력화시키려는 경찰 특수수사대의 강 과장 팀이 움직인다. 이들 세력 안에서 사람들 특히 이자성은 궁극적으로 과연 어떤 실존적 선택을 하는 가에 이야기를 맞췄다. 최민식 배우는 전체 캐릭터의 베이스(base)를 깔아 주는 역할이다. 실제로 그가 배역의 전체 판을 짰다. 당초 캐스팅은 최민식 황정민 두 배우가 먼저 됐다. 나중에 이정재씨가 들어 왔을 때 두 배우 모두 그런 말을 했다. 자신들이 판을 깔아 줄 테니 정재 네가 마음껏 놀라고. 두 배우가 캐릭터의 톤 조정, 높낮이의 키 맞추기를 잘 해줬다. 특히 강 과장 역의 최민식 씨가 영화 속에서 들고 나기, 치고 빠지기를 잘해 줬다. 강 과장 캐릭터는 너무 앞서서도 안되고 너무 숨어 있어서도 안됐다. 그가 참 잘해줬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한마디로 이정재의 재발견이다. 재범파의 중간 보스 박성웅은 <백야행> 때부터 눈여겨 봐 온 배우다.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정민의 병상 신에서(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깊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정재에게 클로즈 업이 들어 간다. 그때 그의 표정 연기가 정말 중요했다. 이자성으로서 그 상황은 슬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굉장히 복잡한 심경이다. 그런데 이정재 씨가 그걸 해내더라. 아마도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무슨 얘기인지 알 것이다. 이 영화는 상황 상황의 감정 하나하나를 켠켠히 쌓아 나가다가 임계점에서 폭발시키는 구조로 돼있다. 그 가운데 있는 인물이 바로 이자성, 곧 이정재이다. 이정재가 잘못 했다면 극이 살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번에 매우 만족할 만한 연기를 선보였다. 박성웅 씨는 한마디로 디렉션이 가장 잘 먹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해줬다.”



강과장과 정청이 만나는 공항 수사대 취조실 장면은 <히트>에서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가 만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맞다. 그걸 염두에 뒀지만 그대로 똑같이 찍은 건 아니다. 그 감정의 세기를 가져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려면 배우의 파워가 중요했다. 아마도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장면에서 두 배우의 연기력이 얼마나 출중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엘리베이터 혈투 장면이 인상적이다. 매우 폭력적인 장면이기도 하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액션 몹 씬이기도 하다.

“아주 중요한 얘기다. 이 영화에는 예상과 달리 액션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세계>는 액션 영화가 아니다. 이건 남자,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며 특히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음습한 무엇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그래서 가능한 한 액션을 많이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다만 액션을 찍는다면 진짜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액션에 드라마를 입혀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선도 되도록이면 끊지 않고 길게 가는 방식을 택했다. 엘리베이터 같은 좁은 공간에서의 칼부림 액션이 사실 고민이었다. 일단 카메라 워킹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 장면만큼은 결국 세트 촬영으로 해냈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잘 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감 샷 등 다양한 촬영이 가능했던 건 그 때문이다.”



중간중간 디테일이 좋다. 예를 들면 정청이 재범파 중간보스의 차에 치일 뻔 할 때 이자성은 그를 몸으로 막는다. 이자성의 결국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맞다. 그런 행동들 하나하나를 염두에 뒀다. 자세히는 말하지 말자. 영화 얘기가 자꾸 드러난다.(웃음)”

정청과 이자성은 여수가 고향인 화교 출신인 인물들이다. 왜 여수와 화교를 선택했나.

“우리사회에서 주변부로 한참 밀려나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다. 실제로 조직범죄도 광주 등등이 중심이었다. 여수는 변방이다. 화교는 우리의 차별이 너무 심해서 한국사회를 일찌감치 떠난 민족들이다. 두 요소를 합하면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묻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암튼 그래서 결국 정청은 중국말을 해야 하는 설정까지 가게 됐는데 기대 이상으로 황정민 씨의 중국어 연기가 일품이었다. 중국 감수자가 그대로 써도 된다고 했을 정도다. 현장 녹음 그대로 갔다.”

당신은 <부당거래>부터 꾸준히 누아르에 천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왜 누아르인가. 이 영화는 어떻게 찍고 싶었나.

“내가 생각하기에 누아르는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인간 존재의 실체를 드러내는 장르이기도 하고. 그래서 좋아한다. 영화를 알게 될 때부터 좋아했다. 내가 멜로영화를 하는 건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다.(웃음) 이번 영화는 그래서, 조금 더 클래시컬하게 찍고 싶었다. 호흡 빠른 요즘 영화와는 달리 느리진 않지만 호흡을 고르면서 가는 방식으로 찍고 싶었다. 어른들이 볼 수 있는 영화. 지루할 수는 있어도 진지하고 진중한 느낌이 나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어떤가? 당신이 보기에 그렇게 찍힌 것처럼 보이는가?(웃음)”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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