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희경·배종옥·송혜교, 세 여자의 재회가 남긴 것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90년대 중반 인기배우 배종옥에게는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 전까지 그녀에게는 뭐랄까, 다른 여배우들에게는 없는 얄밉지 않은 깐깐함 같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가시 돋은 밤송이에 숨어 살짝 동그란 이마를 내미는 알밤 같은 분위기. 혹은 매끄럽지만 단단한 차돌 같은 분위기. 그건 그녀의 데뷔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 후반 배종옥은 밤 9시부터 KBS2 라디오에서 <가위바위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잡음 섞인 AM 방송에서 들리는 배종옥의 목소리는 발랄하지만은 않았다. 목소리는 사랑스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깐깐한 어투였다.

하지만 드라마작가들은 배종옥 특유의 이 깐깐한 분위기를 그렇게 특별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저 이십대 여배우들이 흔히 맡는 여동생이나 <도시인>이나 <행복어사전>에서 등장하는 커리어우먼 역할이 자주 주어졌다. 90년대 초반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작가 김수현은 그녀에게 신경질적인 독신주의자 맏딸의 역할을 맡겼다. 그 드라마에서 배종옥의 말투는 김수현 특유의 빠른 대사와 맞물려 다소 시끄럽게 들렸다. 그리고 그 후 배종옥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조금씩 협소해졌다.

그 무렵 배종옥이 주연으로 출연한 한 드라마가 조기종영을 당한다. MBC의 <이혼하지 않는 이유>라는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에서 배종옥은 불륜녀로 등장하고 물벼락을 맞는 장면을 찍게 된다. 그 장면에서 배종옥은 많이 울적하고 처참하게 보였다. 더 이상 자신이 맡을 수 있는 새로운 역할을 찾지 못한 배우의 쓸쓸한 모습 같은 것이 엿보였다.

하지만 그 후 배종옥은 새로운 배우의 길을 찾게 된다. 그건 바로 자신에게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어준 작가 노희경과 <거짓말>에서 만나면서부터였다. 노희경은 여배우들이 지닌 기존의 이미지를 싹둑싹둑 가위질하고 다시 새로운 영혼을 입혀주는 작가였다. <내가 사는 이유>에서 산소 같은 여자를 잘라낸 이영애는 지고지순함마저 감도는 술집작부 역을 소화했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건강한 미소를 잘라낸 김혜수는 시한부 삶을 사는 연인의 생을 마지막까지 돌봐주는 여교수 역할을 맡아 섬세한 감수성을 큰 눈에 담아냈다.



드라마 <거짓말>은 거기에 더 나아가 드라마 자체가 새로운 감수성의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에서 모든 인물들은 독백을 하고,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괴로워하고,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한다. <거짓말>은 삶과 사랑에 휩쓸리거나 저항했던 과거의 모든 드라마 속 인물들과는 달랐다. 특히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성우는 노희경 작가가 드라마에서 보여주길 바라는 세계의 대변인 격인 역할이었다. 성우는 사랑을 멀리하기 위해 스스로를 분석하고, 사랑에 빠져 괴로워하고, 결국 사랑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처받는 인물이다. 성우는 또박또박 하지만 느린 독백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모던한 인물이었다.

<거짓말> 이후 배종옥은 과거의 배종옥과는 다른 배우의 길에 접어든다. 그 옆에는 항상 작가 노희경이 있었다. <꽃보다 아름다워>의 생활력 강한 맏딸, <굿바이 솔로>의 소설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독특한 중년여인, <그들이 사는 세상>의 마귀할멈 여배우 윤영까지.

한편 90년대 중반 시청자들은 <순풍 산부인과>에서 발랄한 막내딸에 어울리는 스타를 발견한다. 자그마한 키에 오목조목한 얼굴의 송혜교는 발랄하고 코믹한 배역에 딱 들어맞는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이 젊은 스타가 다른 역할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사람들이 송혜교를 코믹한 이미지로 기억할 때쯤 그녀는 멜로물 <가을동화>의 은서로 변신하고 <풀하우스>에서는 순정만화 속의 발랄한 여주인공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그 후 영화 <황진이>에서는 검은 한복의 옷자락 속에 휘감긴 옛 그림 속의 여인처럼 스크린에 등장한다. 다양한 보자기 속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는 영악한 배우처럼 그녀는 그랬다. 하지만 대중들은 송혜교를 스타로 여길 뿐 배우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송혜교는 멋진 그림을 연기할 줄 알지만 그 모습이 그저 예쁜 인형으로 보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바로 현빈과 함께한 노희경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이 드라마의 송혜교는 신입 피디 주준영을 연기한다. 주준영은 송혜교가 연기했던 인물 중 가장 살아 있는 인물에 가깝다. 이십대 중반, 사랑도 일도 모두 잡고 싶지만 뜻대로 안 돼서 푹푹 한숨 쉬는 여자아이. 노희경의 드라마를 통해 아마 송혜교는 인물에 살아 있는 숨결을 불어넣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을까 싶다.



2013년 세 여자는 노희경의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다시 재회한다. 그리고 이번 게임에서는 송혜교와 배종옥은 물론 작가 노희경까지 드라마 안에 들어와 있는 듯 보인다. 눈 먼 오영과 왕비서가 부딪치는 순간, 작가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안으로 무의식적으로 녹아든다. 아름답지만 눈 먼 오영은 노희경이 쓰던 그녀만의 드라마들, 그 오영을 가둬두고 오빠 오수의 상스러운 세계가 밀려들지 못하게 막는 괴팍한 왕비서는 어쩌면 작가 노희경의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통해 대중성 있게 변해야 한다는 압박의 바람에 흔들리는 노희경은 그 다툼이 하나의 장면으로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며 어쩌면 작가 자신에 대해 반추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가 가끔은 시리게 아름답지만 가끔은 생크림의 바람이 부는 것처럼 너무 과하고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은 작가의 이런 흔들림 때문인 것 같다. 그럼에도 그 바람이 지나간 뒤에 작가 노희경이 어느 자리에 가 있을지 기다리게 되는 것은 아직도 <거짓말>과 <내가 사는 이유>, 그리고 <꽃보다 아름다워>의 잔상들이 생생해서겠지만.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K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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