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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사회>, ‘법 앞에 선 한국 아줌마’의 포스
기사입력 :[ 2013-04-10 15:02 ]


- <공정사회>, 어떻게 5천만원에 이걸 만들었을까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공정사회>는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영화이다. 장점은 분명한 메시지를 우직하게 끌고 가는 힘이다. 단점은 급마무리를 통한 복수의 무리수이다. 하지만 단점에 비해 장점이 훨씬 크다. 영화의 메시지는 위중하고, 입장도 선명하다. 영화는 복수극을 표방하지만, 복수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심정에 대한 공감’이다. 복수는 내내 피해자의 심정을 따라가던 영화가 최소한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선사하는 서비스이다. 영화는 5천만 원 제작비에 9회 차 촬영, 그리고 75분의 상영시간이라는 규모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임팩트가 크다. 복수극을 통해 얻는 카타르시스도 무시할 수 없다.

<공정사회>는 아동성폭행 사건을 다루지만, 범죄 수사극이 아니다. 수사 과정은 나오지도 않는다. 주인공(장영남)이 범인임을 알아보는 과정도 영화에서는 직감으로 표현된다. 첫 시퀀스에서 주인공이 남자와 실랑이를 벌일 때 관객은 반신반의하지만, 이후 여러 번 편집을 겹쳐가며 범인의 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에, 중반이후부터 관객은 그가 범인임을 안다. 때문에 그가 귓속말로 주인공을 협박하거나 경찰의 안이한 대처로 그를 놓쳤을 때, 주인공의 분노와 허탈감에 100% 공감하게 된다. 즉 영화는 누가 범인이며, 왜 그가 범인인지를 밝히는 수사극이 아니라, 사법당국이 성폭행피해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고발극이다.

영화가 고발하는 내용은 황당하지만, 결코 허구가 아니다. <공정사회>는 성폭행을 당한 12살 소녀의 어머니가 경찰의 부실수사를 참다못해 딸이 진술한 단서를 근거로 40일간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아파트단지를 샅샅이 뒤져, 피의자가 사는 곳을 확인하여 검거를 주도했던 2003년도 실제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피해자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담당형사가 “토요일이니까 월요일에 가자”고 답한 것까지 실제 일화이다.

일 때문에 딸의 하교시간을 놓친 엄마가 딸이 없어진 것을 알고 실종신고를 하자, 파출소 순경은 “자정이 지나기 전까지는 실종이 아니니 기다리라”며 서류만 내민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딸을 발견한 엄마가 딸을 입원시키고 경찰서에 신고하자, 마형사는 “성폭행이라는 아줌마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묻는다. 주인공이 범인을 찾아내 몸싸움을 벌이는 현장에 나타난 순찰대는 싸움을 말리는데 주력하다 결국 범인을 놓친다.



이들은 왜 이다지도 무능한가? 여기서 ‘무능’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피해자의 입장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과 ‘여성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마형사는 주인공에게 “아줌마 마음은 알겠는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피해자의 입장과 고통이 아닌 관료적 절차를 중심에 둔다. 또한 자신이 문제해결의 주체이고 피해자는 닥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본다.

경찰은 ‘여성의 말’을 ‘말’로 듣지 않는다. 그들은 당황한 엄마의 울먹이는 목소리나 얼어붙어 입을 떼지 못하는 소녀의 침묵과는 소통하지 못한다. 남성중심의 사법권력 앞에서 여성의 격앙된 목소리는 조용히 시켜야 할 히스테리적 소음일 뿐이고, 소녀의 침묵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로 인식될 뿐이다. 이들은 모두 ‘이성이 결여된 존재’로 치부된다. 남성들은 왜 여성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가? 이는 능력의 문제가 아닌 태도의 문제이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내국인이 이주노동자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되는 것과 같다.

반면 남자들끼리는 말이 아주 잘 통한다. 기자는 잘나가는 치과의사이자 유명방송인인 남편에게 넌지시 협박하며 마형사에게 뇌물을 줄 것을 언질하자, 남편은 마형사에게 돈을 건네며 조용한 수습을 부탁한다. 남편 역시 피해자의 입장과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는 딸의 고통보다 자신의 위신을 중심에 둔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딸에게도 도움이 된다”며 “둘이 여행이나 가서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마가 가해자를 찾는데 혈안인 이유도 바로 딸의 치유 때문이다. 자신이 이유 없이 당한 고통과 몸에 남겨진 끔찍한 상흔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 채, 피해를 말하는 것조차 침묵 당하게 되면, 피해자는 그 모든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되어, 치유할 수 없는 만성적인 우울감과 수치심, 죄의식과 자기부정 등의 고통을 떠안게 된다. 딸은 마형사의 다그침으로 인해 “엄마 말을 안 듣고,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탄 내 잘못”으로 생각하며, 엄마에게 “미안해요”라고 말한다.

영화의 영문제목은 ‘Azumma’(아줌마)이다. 한국사회에서 ‘아줌마’는 온갖 주책없는 행동을 하는 나이 든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이다. 가령 관공서에서 경비가 “아줌마! 어디가요?”하고 물을 때, 이는 단순히 행선지를 묻는 말이 아니라,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배제의 뉘앙스가 담긴다. 반면 ‘어머니’는 거룩한 모성의 이름으로 칭송된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가 곧 남에게는 ‘아줌마’이다.

<공정사회>는 범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첫 시퀀스부터 주인공이 경찰을 만나는 모든 지점을 통해, 법이라는 남성중심의 권력 앞에 선 ‘아줌마’는 ‘미친년’일 수밖에 없음을 웅변한다. 영화는 복수극이라는 외형 때문에 <오로라 공주>나 <돈 크라이 마미>와 비교되곤 하지만, ‘법 앞에 선 여성’이라는 주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체인즐링>과 가장 비교할 만하다. 영화의 오롯한 주제의식과 주연배우의 호연에 힘입어, <공정사회>는 벨로이트 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과 어바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이제 당신의 눈으로 확인하시라. ‘법 앞에 선 미친년’의 포스와 완벽한 복수의 쾌감을!



P.S. 1) 역설적이지만, 영화에서 ‘아줌마’가 천시당하지 않는 유일한 장은 자본주의 시장이다. 주인공이 사설업체를 찾았을 때, 그는 ‘미친년’이 아닌 우아한 ‘고객님’으로 탈바꿈한다. 경찰에 울고불고 사정해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사설업체에 돈다발을 지불하니 삽시간에 해결된다. 국가권력을 대신하는 신자유주의 서비스시장의 위력과, <써니>에 이어 사설업체의 탁월한 업무능력에 특별한 감명을 받는다.

2) 영화는 아역배우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폭행장면의 직접적인 연출을 삼가고, 범인이나 형사와 대면하는 장면에서도 아역배우 분량을 따로 찍어서 편집했다고 한다. 본받을 만한 일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공정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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