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기 인생 사반세기' 김혜수, 미스 김을 만나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1986년 가을 여고생 김혜수는 MBC베스트셀러극장 <인형의 교실>을 통해 처음 브라운관에 진출한다. 태권도 사범의 권유로 중학교 시절 CF모델을 시작했던 이 신인여배우는 건강하고 싱그러워 보이는 이미지로 단숨에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다. 영화 <깜보>와 <수렁에서 건진 내 딸2>로 충무로에 얼굴을 알린 김혜수는 만 열여섯 살에 <인형의 교실>에서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서 벽촌의 초등학교에 갓 부임한 여교사를 연기한다. 그리고 <인형의 교실>이후로도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신인답지 않게 너무나 어른스러운 연기를 보여줬다.

그렇게 80년대 후반 김혜수는 스크린과 브라운관의 대표적인 여주인공으로 자리 잡는다. 또래 스타들이 하이틴 영화에 여고생으로 출연할 때 그녀는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다시 한 번 선생님으로 등장한다. 드라마 <사모곡>에서는 천민의 남자를 사랑하는 양반집 여인의 모습을 큰 눈에 눈물 뚝뚝 흘리며 능숙하게 보여주었다. 당시 남자주인공이었던 배우 길용우와 그녀의 나이 차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상대배우와의 나이 차이는 그녀가 스무 살에 출연했던 드라마 <꽃 피고 새 울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당시 그녀는 마흔을 넘긴 노주현과 함께 부부 연기의 호흡을 맞추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혜수의 이미지는 나이에 비해 너무 노숙해진 감이 있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어른스러워서 매력 있던 그녀는 어느새 반짝반짝 빛나는 현재형의 스타라기보다 주말극이나 일요아침드라마의 발랄한 여주인공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녀가 오랜 기간 출연했던 일요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의 코믹 발랄 씩씩 새댁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90년대 김혜수는 그런 이미지를 바탕으로 많은 작품들에 출연했다. 아침드라마 <짝>에서의 스튜어디스나 <닥터 봉>이나 <찜> 같은 로맨틱코미디 영화의 여주인공 역할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 무렵 현재형 스타의 자리는 다른 여배우들에게 빼앗겼다. 최진실에게 빼앗긴 발랄함과 신선함은 그 후로 심은하나 김희선 같은 90년대 스타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채시라나 김희애는 <여명의 눈동자>나 <아들과 딸> 같은 드라마에서 보여준 묵직하고 깊이 있는 연기로 큰 배우로 성장했다. 하지만 김혜수는 고교시절부터 어른들을 연기했지만 안타깝게도 소녀가 어른을 연기할 때의 버릇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즉 어린 소녀가 노련하게 흉내 내는 ‘어른’의 모습일 뿐 진짜 ‘어른’의 내면에 자리할 무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90년대 후반 김혜수는 다른 여배우들과 차별화된 방법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바꿔나가기 시작한다. 하나는 토크쇼 <김혜수 플러스유>를 통한 노출이었다. 여기서의 노출은 파격적인 의상이나 메이크업 같은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80년대부터 이어져온 자신의 건강하고 발랄한 그러나 오래된 정극 배우 이미지를 그녀는 토크쇼를 통해 쉽게 지워버렸다. <김혜수 플러스 유>를 통해 김혜수는 옷 잘 입고 글래머러스하고 쿨한 스타의 이미지를 다시 쌓아나갔다. 이 이미지는 <청룡영화상> MC를 통해 2천년대에도 고스란히 김혜수란 여배우의 이미지로 다져졌다.

또 하나는 연기 변신이 아닌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기를 통해 대표작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99년에 방영되어 시청률 50%를 넘긴 MBC 미니시리즈 <국희>의 여주인공 국희는 김혜수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행운의 캐릭터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기업인을 소재로 한 시대극인 이 드라마에서 땅콩크림 과자 만드는 억척스럽지만 건강한 인물이었던 국희는 김혜수에게 딱 맞는 캐릭터였다.



2천년대 들어 김혜수는 드라마보다 스크린 쪽으로 몇 걸음 더 옮겨갔다. 하지만 주연 및 주연급 조연을 맡은 영화들은 많았지만 흥행 면에서나 비평 면에서나 내내 굴곡이 많았다. 사실 80년대부터 연기를 시작한 김혜수는 극적인 룰이 몸에 배어 있다. 반대로 한국 영화계는 생생하게 날 것 혹은 지극히 어두운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연기를 원했다. 물론 그 흐름에 맞게 도전은 했지만 완벽하게 성공적인 변신은 아니었다.

<얼굴 없는 미녀>를 통해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폭탄머리로 등장한 김혜수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의 감성을 날카롭게 보여주기에는 영화 속의 그녀 모습이 헤어스타일만 파격일 뿐 연기는 오히려 단조로운 인상이었다. <좋지 아니한가>에서 백수 이모를 연기한 김혜수는 추리닝을 걷어 올리거나 몸을 긁는 동작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움을 보여주기 위해 연구한 나머지 너무 틀에 박혀 보였다.

오히려 그녀가 영화에서 가장 빛났을 때는 현실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인물이나 밑바닥의 어두운 내면을 지닌 인물을 보여줄 때가 아니었다. <타짜>의 정마담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이미지를 끝까지 끌고 가는 역이거나 <이층의 악당>의 연주처럼 드라마적 감정선을 영화적으로 재조정한 인물을 연기할 때였다.



2013년 김혜수는 오랜만에 텔레비전 드라마로 돌아온다. 그녀가 택한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 김혜수는 무거운 이미지를 오랜만에 내려놓은 것 같다. 만능 계약직 미스 김을 연기하는 김혜수는 정말 능글맞을 정도로 코믹연기를 잘한다. 단순히 노래방 회식에서의 탬버린 묘기와 홈쇼핑에서의 다리 찢기와 사무실에서의 맨손체조 때문만이 아니다.

“제 업무입니다.”라는 대사처럼 <직장의 신>의 미스 김은 딱 김혜수의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드라마에서의 김혜수는 지금껏 드라마에서 보여준 모든 정극 연기를 패러디하면서 스스로의 틀을 우스꽝스럽게 비트는 걸 즐기는 느낌이다. 그렇게 미스 김의 모습으로 계약된 김혜수는 사반세기 연기 인생 동안 자신이 해왔던 것, 하지만 그녀의 발목을 잡았던 것, 그것들을 재료 삼아 지금 마음껏 자신의 캐릭터를 요리 중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MBC, 영화 <타짜>, <이층의 악당>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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