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생>, 점점 비밀스러운 매력 발산하는 까닭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최근 막을 내린 드라마 <직장의 신>은 우리나라 드라마의 흥미유발 3요소가 모두 빠져 있던 흔치 않은 작품이었다. 바로 불륜, 교통사고, 그리고 어김없이 드라마가 심심할 때면 초여름 장맛비처럼 주구장창 쏟아지는 출생의 비밀, 즉 ‘출비’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에게 출비는 단비가 아닌 너무 지루하고 따분한 비가 된 지 오래다. 그런 까닭에 젊은 시청자 층을 노리는 평일 심야 시간대의 드라마들에서 출비의 먹구름은 아예 사라지거나 나타나도 소나기처럼 짧은 시간에 요란하게 퍼붓다 끝나기 일쑤다. 아니면 <구가의 서>처럼 인간형 출비가 아니라 반인반수 출비 같은 판타지로 나아가던가.

하지만 주말드라마나 일일드라마에서 여전히 출비는 드라마의 중심 갈등요소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출비의 먹구름이 꾸물꾸물 모여들던 MBC의 <백년의 유산>에서는 이제 막 요란하게 출비를 퍼부을 기세다. KBS의 <최고다, 이순신> 역시 출비 때문에 주인공 이순신은 종종 비에 젖은 생쥐 같은 불쌍한 꼴로 시청자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최근 막을 내린 MBC 일일극 <오자룡이 간다>에서 오자룡을 연기한 배우 이장우는 짧은 기간 동안 출비의 쓴맛 단맛을 모두 맛본 인물들을 보여주었다. 이장우는 다른 방송사의 일일극인 <웃어라, 동해야>에서는 배다른 형 동해의 출비 탓에 상처를 입은 동생으로 <오자룡이 간다>에서는 결국 출비 덕에 복을 받는 인물을 연기했다. 어쩌면 이장우가 연기한 이 인물들을 살피노라면, 그리고 <웃어라 동해야>와 <오자룡이 간다>를 보노라면 왜 한국 드라마에 출비가 자주 내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출비는 드라마를 요리하는 데 있어 화학조미료와 같은 역할을 한다. 플롯을 복잡하게 짜거나 인물들에게 복잡한 성격을 집어넣지 않고도 갈등의 맛을 재빠르게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또 출비냐고 투덜거리다가도 언제 주인공의 비밀이 밝혀지는지 궁금해 드라마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깊은 맛은 없지만 자극적인 맛은 있는 드라마의 MSG가 출비인 셈이다.

또한 인물의 운명을 단숨에 바꾸는 작업도 수월해 마법의 출비만 후드득 내려주면 금세 왕자는 거지로 거지는 왕자로 변신한다. 대부분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이들은 알고 보면 재벌집의 자녀거나 반대로 아주 가난한 집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이게 무슨 출생의 비밀이냐, 팔자의 비밀이지.

문제는 출비에 혹해 드라마에 집중하다가도 드라마가 끝나면 어딘지 공허해진다는 점이다. 출생의 비밀에 휘둘리는 인물들은 지극히 운명론적인 삶을 살게 되고 그렇다보니 그들은 전혀 주체적인 인물로 보이지가 않는다. 무엇보다 출비를 가진 인물들, 혹은 출비를 갖고 있지 않은 인물들도 정작 본질적인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보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출생의 비밀이란 말을 아예 제목으로 정한 SBS의 <출생의 비밀>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예상할 순 없지만 한번쯤 곱씹어보며 감상할만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흔히 출비로 줄여 부르던 그 변질된 의미가 아닌 본질적인 출생의 비밀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이 여주인공이다.

<출생의 비밀>은 여주인공 정이현(성유리)이 해리성 기억장애로 잃어버린 10여년의 삶을 다시 되짚어 보는 이야기다. 더구나 그 잃어버린 10여년의 세월 동안 정이현은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를 출산한 엄마로 존재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삶과 알고 있지 못한 삶 속에서 여주인공 정이현은 괴로워한다. 한때 남편이었다지만 지금은 생판 알지 못하는 사내인 홍경두의 도움을 받아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거치며 정이현은 동시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왔는지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처럼 <출생의 비밀>의 정이현은 다른 드라마의 출비형 주인공들처럼 과거 나를 버리거나 외면했던 부모를 통해 출생의 비밀의 답을 구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잃어버린 삶, ‘나’라는 자아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끔찍한 사건들을 다시 당당하게 마주하면서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라는 본질적인 출생의 비밀과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 지점이 바로 <출생의 비밀>이 다른 드라마들과는 차별화된 비밀스러운 매력을 점점 발산하는 이유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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