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위대하게’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장철수 감독이 연출을 맡고, <해를 품은 달>의 김수현이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도둑들>로 스크린 신고식을 마친 충무로 최고의 기대주 김수현 이외에도 박기웅, 이현우, 손현주, 홍경인 등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한 이 영화는 상반기 최고의 기대작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웹툰에 대한 정보가 없는 관객이라면, 북한의 정예요원이 남파되어 달동네 ‘바보’로 잠복한다는 설정과, 해맑은 코미디 느낌의 포스터를 보고, 꽤나 반어적인 코미디를 기대했을 수 있다. 가령 일본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평범한 사람의 따분한 일과를 스파이의 임무와 뒤섞으며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우지 않았던가. 또는 <개그콘서트>의 ‘체포왕’이라는 지난 코너를 떠올릴 수도 있다. 범인을 잡기 위해 동네 ‘바보’로 잠복해 왔다는 김장군은 “똥인 줄 알~면서도 받아먹는 심정을 아느냐?”며 항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가벼운 코미디가 아니다. 원작 웹툰 자체가 영화 <실미도>나 <의형제>를 연상시키는 비장한 첩보드라마를 근간으로 상당한 수준의 액션을 지니고 있고, ‘오마니’와 ‘조장님’을 그리워하는 어두운 남성 신파의 정서를 품는다. 영화는 줄거리로 보나 인물의 캐스팅으로 보나, 웹툰과 90% 이상의 ‘싱크로율’을 보이는데, 여기에서 난맥상이 발생한다.

첫째, 마치 웹툰을 콘티로 사용한 듯이 웹툰을 그대로 영화로 옮겼지만, 영화의 형식미를 살리지 못했다. 편집은 웹툰보다도 역동성이 떨어지고, 화면의 입체감도 떨어져서, 화면은 속도감과 깊이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 계속되는 주인공의 내레이션은 화면에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가 주인공의 심리나 주제를 인물의 표정이나 화면의 구성을 통해 보여주지 못하고, 내레이션으로 직접 설명하려 드는 것은 되도록 피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지면 매체인 웹툰의 지문을 영화의 내레이션으로 그대로 옮기는 우를 범하였다. 이는 각색의 과정에서 매체의 변화를 깊이 있게 고려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즉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웹툰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평면적인 싱크로율을 높이는 데 급급한 나머지, 영화로서의 형식미를 높이는데 실패한 영화이다.



둘째,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초반에 코미디의 요소를 지니고, 중반으로 갈수록 액션과 남성 신파의 비중이 커진다. 웹툰은 한회 한회가 짧게 끊어져 있고, 스크롤을 내리는 속도에 따라 독자의 머릿속에서 영상이 재구성되는 매체이다. 그 결과 초반의 코미디적인 요소가 중후반까지 길게 남아 작품 전체를 지배하진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한자리에 앉아 2시간 동안 집중하면서 자기 완결적인 영상을 화면을 통해 주입받는 매체이다. 웹툰에서는 초반에 코미디를 조금 보여주다가, 중반이후 분위기를 바꾼다고 해도 독자는 스스로 머릿속에서 그 변화를 재구성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포스터나 예고편을 통해 관객이 미리 예상했던 분위기나, 초반의 화면이 지닌 질감이 중반이후에도 상당한 잔여물을 남긴다. 그 결과 영화에서는 코미디처럼 시작하여 심각한 비극이 되거나, 코미디의 요소도 여전히 지닌 채 상당한 신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율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는 분위기의 조율에 공을 들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초반의 코미디 장면은 중후반부와 따로 돌면서 잉여의 잔상으로 남아, 중반 이후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한다. 코미디로 시작되었고 여전히 코미디적인 요소도 지닌 채, 영화가 진지한 액션을 구사하고 남북관계의 비극성을 말할 때, 관객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알 수 없는 ‘벙찐’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셋째, 웹툰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배우의 존재이다. 간략하게 그려진 웹툰의 인물은 구체적인 물성을 지니지 않으며, 독자의 상상으로 이미지화된다. 그러나 영화는 구체적인 물성을 지닌 배우를 통해 인물을 직접 보여준다. 배우는 인물이 지닌 다양한 성격들을 자신의 몸 안에서 녹여서, 표정이나 제스처, 미묘한 분위기 등을 통해 통일적으로 표현해내야 한다. 배우가 극중 인물의 여러 측면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다양성을 관통하는 통일성을 자기 안에 지녀야만 그 인물을 관객에게 설득해낼 수 있다.

즉 ‘바보’인척 하는 ‘엘리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바보’의 모습과 ‘엘리트’의 모습을 각각 표현해낼 뿐만 아니라, ‘바보와 엘리트를 관통하는 통일성’을 어떤 아우라의 형태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가령 맹인검객 자토이치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무력한 늙은이의 모습도 보여주고, 고수검객의 모습도 보여주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모습이 한 사람에게 있음을 믿게끔 하는 초월적인 통일성을 풍기는 것이다.

그러나 김수현은 나름 성실한 연기자이지만, 아직 이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김수현은 ‘바보’의 역할이 필요할 때는 ‘바보’의 모습에 충실하고, 엘리트의 모습이 필요할 때는 그에 충실하였지만, 그 양자가 한 몸에 있다는 것을 설득할 정도의 연기력을 품지 못했다. 그 결과 후반에 그의 엘리트적 면모가 화면에 펼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보’ 이미지의 잔상이 화면으로 흡수되지 못한 채 남아 떠돌면서 내레이션의 과도한 진지함과 합쳐져 블랙코미디적인 느낌마저 풍긴다.

게다가 꽃미남인 김수현과 이현우의 외모는 남성 신파의 서사가 지닌 유사형제애의 느낌을 야오이물의 동성애적인 느낌으로 옮겨놓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의 분위기를 종잡을 수 없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을 느끼는 동시에, 이토록 무거운 이야기를 블랙코미디나 야오이물로 즐겨도 되는지 알 수 없는 분열을 느끼게 된다.



넷째, 조국으로부터 버려진 공작원의 비애는 한국 영화에서 꽤 많이 다루어진 주제이다. <간첩 리철진>부터 시작하여 <실미도><의형제><스파이 파파><간첩><베를린>에 이르기까지, 연상되는 작품이 한둘이 아니다. 문제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보여주는 공작원의 비애가 이전 작품들에 비해 더 심도 있거나 새롭지 않다는 점이다. 원작 웹툰은 남한의 국정원 직원이 이중스파이로 북파되어 주인공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고 나오지만, 영화는 그런 얼룩마저 제거하고 남북을 순수한 흑백의 구도로 단순화시킨다.

즉 북한은 극도로 가난하고 비인간적인 폭력의 소굴이고, 남한은 달동네일망정 인정이 넘치고 평화로운 곳이다. 북한의 엘리트가 남파되어 남한의 최하층민의 일상을 영위하면서 계란이나 고깃국에 진심으로 ‘환장’하는 모습은, 과거 반공드라마를 보는 듯한 뜨악함과 “공화국에서는 고깃국에 이밥 먹는다”는 북한 선무방송을 듣는 듯한 서글픔이 동시에 겹쳐져 심히 민망하다. 더욱이 지적 장애인에 대해 동네 아이들이 돌을 던지는 장면이 일상적인 코미디로 배치되고, 영화 속에서 이를 말리거나 이에 대한 반성이 들어있지 않은 것도 매우 유감스럽다.

웹툰은 작가 개인이 그리고 독자가 PC나 모바일을 통해 읽는 매체이지만, 영화는 집단적으로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동시에 보는 매체이다. 비교적 개인적인 매체인 웹툰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희화화된 장애인에 대한 폭력을, 대중적인 매체인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숙고가 이루어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북한이 가난하고 폭력적인 사회라는 것은 일종의 클리셰이다. 그러나 남한이 장애인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질 만큼 야만적인 사회로 묘사된 것은 충격이다. 더구나 영화에서 장애는 단지 변장술이자 웃음의 코드로 차용된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더욱 위악적이다. ‘바보’는 놀림 받고 돌팔매를 당하기 위해 저곳에 있다. 이것이 당연한가. 아직 이것이 당연한가?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웹툰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거쳤어야 할 형식미에 대한 고려나 분위기조율에 실패한 영화이다. 그 결과 코미디와 액션과 남성 신파가 뒤섞이고, 블랙코미디적인 요소와 야오이물의 분위기까지 가세하면서 관객에게 분위기를 종잡을 수 없는 혼란을 안긴다. 게다가 남북한을 흑백구도로 단순화시키고 북한을 가난과 폭력의 소굴로 악마화 시키면서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열악한 의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낸다.

최근 ‘일베’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지만, ‘일베’가 동떨어진 게토이거나 몇몇 인사들의 사주에 의해 만들어진 토론장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남북관계에 대한 흑백논리나 소수자에 대한 비하는 굳이 ‘일베’가 아니어도, 청소년들의 하위문화 속에 널리 퍼져있다. 이를 예민하게 감식하고 지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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