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야, 연애하자’ 상대적 박탈감에 빠진 까닭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앵두야, 연애하자>는 20대 여성들의 성장영화이다. 연애도 하나의 스펙이자 강박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각자 다른 이유로 연애에 성공하지 못하는 네 여자들의 실패담을 시트콤처럼 엮으면서, 관객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영화이다. 류현경, 하시은, 강기화, 한송희 등 적절하게 캐스팅된 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럽고, 에피소드가 구체적이며, 서사의 구성이나 편집도 유기적이어서 영화 보는 동안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영화의 만듦새나 갈등의 규모가 스크린보다는 TV화면에 더 어울리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영화를 보고난 뒤, 영화가 전하려는 공감과 위로를 느낄 수 없다는 데 있다. 영화는 분명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 있지만, 관객은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든다. 어찌 된 일일까.

◆ 얄팍한 네 여자의 연애 실패담

바람을 피운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던 날, 앵두(류현경)는 부모님이 로또 1등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부모님은 세계 일주를 떠나고, 앵두는 빈집에 세 명의 친구들을 불러들여 ‘집주인’행세를 한다. 앵두와 5년 째 한집에 사는 윤진(강기화), 나은(한송희), 소영(하시은)은 모두 애인이 없다. 매년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앵두는 5년 전 헤어진 남친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미술관 큐레이터인 윤진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편한 이성친구의 결혼통보에 안절부절못한다. 아직도 아이돌을 좋아하는 미술교사 나은은 새로 온 외국인 교사에게 호감을 느낀다. 월등한 미모를 자랑하는 소영은 친구들의 지리멸렬한 연애가 답답하지만 솔로이긴 마찬가지이다.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여러 남자와 즐기듯 만나지만 진지하게 사귀는 사람은 없다.

헤어졌던 앵두의 남친이 유능한 사업가가 되어 돌아오고, 윤진은 이성 친구가 결혼하기 전에 붙잡으려 하고, 나은과 외국인 교사와의 만남이 거듭되고, 소영에게 잘생긴 성형외과의사가 접근해 오면서, 네 친구의 감정은 희비쌍곡선을 그린다. 그러나 모처럼 이들에게 찾아온 연애감정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좌절되고, 영화는 다른 희망을 예비한다.



영화는 각자의 연애감정이 진척되면서 삐걱대는 친구들 간의 관계나, 이들의 실패를 생생하게 그린다. 특히 연애자원이 많은 소영과 그렇지 못한 세 친구가 대립하는 상황이나, 친구 부모님의 덕담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고, 정 많은 이웃언니처럼 굴던 사람이 배신을 때리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이들의 연애가 실패하는 이유들도 나쁘지 않다. 특히 소영과 성형외과의사와의 관계는 통속적이지만 현실감이 있다. 하지만 영화가 그리는 이 모든 상황과 갈등들이 존재의 밑바닥을 훑지는 못한다. 이는 영화의 장르상 극단적인 상황이나 감정을 그리지 않으려고 수위를 조절한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양호하고, 연애의 실패담이 얄팍하기 때문이다.

◆ “우리, 불쌍하지?” “아니. 부러운 걸”

작가지망생인 앵두에게 칼럼을 써보라는 제안이 들어오거나, 알바만 하던 소영이 마음만 먹으면 카페 정직원이 될 수 있다는 등의 설정은 이 영화가 기반 한 세계관이 얼마나 낙천적인지를 보여준다. 부모가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세계 일주를 가 있는 동안 자신의 집에서 친구들과 동거를 한다는 설정은 또 얼마나 한갓진가. 현실의 20대 태반이 백수이고, 취직을 해도 거의 비정규직이며, 원룸과 고시원을 전전하거나 높은 월세에 쪼들리고, 가족과 본인의 빚을 고민하며 산다.

하지만 영화 속 네 명의 여자들 중 누구도 경제문제를 겪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연애도 못하는 궁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다들 형편이 좋다. 두 명은 교사와 큐레이터라는 전문직이고, 한명은 외모가 뛰어나며, 한명은 ‘로또 당첨자의 딸’이다. 이들은 모두 현재가 불만스럽고 미래가 불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진짜로 현실이 불만스럽고 미래가 불안한 현실세계의 관객들이 보았을 때 ‘무엇이 걱정인가?’ ‘저렇게만 되도 소원이 없겠네’ 등의 푸념이 절로 나온다.



사실 이들의 사회경제적 처지가 양호하다는 지적은 근본적인 비판이 될 수 없다. 영화의 핵심메시지가 ‘겉보기엔 멀쩡하고 부러워 보이는 여자들도 연애결핍에 시달리고 있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 명제는 참이다. 문제는 영화가 다루는 연애결핍이 너무 피상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소영은 성형외과의사와의 일로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외모자원은 없어지지 않으며, 눈높이를 조금 조정하고 여전히 그의 외모에 끌려 접근하는 남자들 중에서 더 신중하게 상대를 고르면 된다. 영화의 결말도 이러한 해법을 잘 묘사한다. 아무것도 잃거나 달라진 것이 없으며, 소영과 남자들 사이에 작동되는 욕망의 메커니즘도 동일하게 유지된다.

외국인 교사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어 안타까운 나은도 잃거나 변할 게 없다. 짝사랑의 목록에 ‘이런 일도 있었네’가 하나 더 추가될 뿐이며, 환상적인 친구를 얻은 것일 수도 있다. 애인처럼 생각했던 이성 친구를 떠나보내야 하는 윤진은 쓸쓸하겠지만, 그 정도 결핍이 있어야 비로소 진짜 연애가 가능하다. 헤어진 지 5년이나 된 앵두의 남친이야 어차피 과거의 관계일 뿐이고, ‘편의점 알바생’이라고 내심 무시하던 남자가 예술가였고 앵두를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행운이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문제는 이들의 ‘실연’이 아니라, 이들이 ‘실연을 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것도 잃거나 달라진 게 없는 관계를 과연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실패를 과연 실연이라 할 수 있을까. 이들은 아직 본격적인 연애를 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영화의 전후를 통해 아주 조금의 성장이 있을 뿐이다.

영화가 속내랍시고 털어놓는 이들의 사연은 생활의 측면에서나 연애의 측면에서나 처절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피상적인 공감과 약간의 질투심을 느낄지언정, 같이 속내를 털어놓고 울고 싶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한다. 가령 소영이 앵두에게 “넌 꿈도 있고, 돈도 있어 좋겠다”고 말하거나, 소영이 “직업도 없고 나이도 28살인 나는 외모만으론 결혼정보회사의 1등급이 될 수 없다”고 말할 때, 돈도 없고 꿈도 없고, 직업도 없고 외모도 별로인 관객에게 이 모든 이야기는 ‘한 가지라도 잘난 언니들의 푸념’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실연의 감정이 바닥을 치지 않은 상태에서, 금방 회복된 그녀들은 다음 만남을 예비한다. 누가 아니라나, 그들은 아직 28살 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 불쌍하지?”하고 묻는 영화에게 “아니. 부러운 걸”이라 답해야하는 아이러니라니. 영화는 위로를 건네지만, 관객은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든다. 대략 낭패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앵두야, 연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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