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경, 장미희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장미희의 전성기를 체감하지 못한 나에게 그녀의 첫 인상은 희화화된 배우였다. 장미희에 대한 첫 기억이 바로 1998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육남매>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장미희가 공기 반 대사 반의 목소리로 속삭이던 “떡 사세요.”는 종종 개그소재로 쓰였다. <육남매>가 가난한 우리의 옛 시절이 배경인 시대극이었지만 이 드라마 속 홀어머니 장미희는 억척 대신 아름다움만 간직한 흘러간 옛날 배우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당시 드라마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한때 우리나라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장미희의 매력이 드러났던 작품은 아니었다.

이런 장미희를 부활시킨 것은 작가 김수현이었다. 김수현은 <엄마가 뿔났다>,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작품을 통해 낡은 배우의 이미지를 가진 장미희에게 무거운 배역이 아닌 너무 우아해서 코믹하고 우스꽝스럽지만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선물했다. 그리고 희화화된 자신을 능숙하게 연기하는 법을 배운 장미희는 다시금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의 우아함을 겸비한 코믹한 모습과 달리 70~80년대 장미희는 어둡고 알 수 없는 이미지를 간직한 배우였다. 그때의 장미희는 지금 같은 상위 1% 사모님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지금은 다소 낡은 어감이 드는 ‘처연하다’란 말이 있다. 젊은 시절의 장미희는 무표정하게 있어도 눈가에 처연한 기색이 흐르는 배우였다. 심지어 소리를 내며 웃어도 무언가 웃음에 사연이 있어 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분위기는 당시 라이벌이었던 세련되고 총명한 인상의 유지인이나 건강하고 생기발랄한 미인의 전형인 정윤희와 차별화되는 매력의 비법이었다. 이런 매력 덕분에 장미희는 반짝거리는 스타의 이미지인 두 라이벌과 달리 조금 더 배우 쪽에 가까워지는 위치에 서게 된다. 필자가 그런 장미희의 배우로서의 매력에 빠진 건 지금은 고인이 된 천재감독 김기영의 <느미>라는 작품을 뒤늦게 보고나서였다. 이 영화에서 벽돌공장 여공인 벙어리 느미를 연기한 장미희는 대사 없이 표정과 몸짓만으로 여주인공의 모든 심리를 그대로 전달한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서 벙어리 느미가 절규하는 장면에서는 당시의 장미희가 단순히 처연한 분위기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정말 연기도 잘하는 배우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준다.



2012년 장미희는 SBS 미니시리즈 <패션왕>에서 욕망의 화신인 디자이너 조마담을 연기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처연하면서도 서늘한 인간의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반면 조마담과 대립하는 여주인공 이가영을 연기한 배우는 신세경이었다. 그리고 신세경은 젊은 여배우 중 가장 처연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장미희처럼 신세경 역시 말없이 가만히 있어도 눈빛과 분위기만으로 많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처연한 소녀의 모습이 엿보인다.

비록 사극 <선덕여왕>에서 공주를 연기하긴 했지만 그 후로 신세경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히트작인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을 비롯해 많은 드라마에서 가난하고 처연한 여주인공을 연기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처연한 여자 옆에는 그녀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진 두 명의 남자가 있기 마련이다. <패션왕>은 물론이고 최근 막을 내린 <남자가 사랑할 때>까지.

<패션왕>의 이가영은 언뜻 같은 작가 팀의 작품인 <발리에서 생긴 일>의 이수정이란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두 캐릭터를 연기하는 신세경과 하지원의 방식은 다르다. 하지원은 전혀 처연한 분위기의 여배우는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캐릭터를 최대한 동적으로 그려나가 살아 있는 현실 속 인물처럼 만들어낸다. 그에 비해 신세경의 방식은 언제나 움직임이 작고 소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캐릭터의 잔상이 강한 건 역시나 신세경이 가지고 있는 배우로서의 처연한 장점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가 사랑할 때>의 서미도에 이르면 신세경의 매력은 여전히 살아 있건만 신세경의 단점 역시 고스란히 드러나 버린다.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신세경은 화면에 따라 놀라우리만큼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신세경이 대사와 표정으로 표현하는 서미도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서미도나 신세경이나 언제나 움찔거리고 머뭇거리며 목소리는 매력 있지만 말투는 여전히 툭툭거린다.

여기서 장미희와 신세경의 비슷한 단점은 또 한 번 겹쳐진다. 배우 자체가 품고 있는 분위기가 강렬한 탓에 모든 배역이 배우가 지닌 잔상과 겹쳐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장미희가 아직까지 인정받는 이유는 그녀가 소화해 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그 역할에 대한 모든 열정을 다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반면에 신세경은 아직 자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의 울타리 안에 갇혀 만족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녀는 그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아니면 울타리 안에 앉아 처연한 표정을 지은 채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서서히 잊히게 될까?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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