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과 드라마 종횡무진하는 이성재의 원동력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작가 노희경의 대표작 <거짓말>에서 남자주인공 서준희를 연기한 이성재는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매력을 드러낸다. 판화를 전공했지만 손을 다쳐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하게 된 서준희는 나쁜 남자도 웃긴 남자도 왕자님 같은 남자도 아니다. 서준희는 굳이 말하자면 책갈피 속에 꽂아놓고 잊고 있다 다시 발견한 마른 꽃잎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다.

서준희를 연기한 배우 이성재 역시 그와 비슷하다. 이성재의 목소리는 축축하기보다 메말라 있고 그의 움직임은 동적이기보다 정적이다. 서준희와의 차이점이라면 이성재는 마른 꽃잎보다는 그 꽃잎이 꽂혀 있는 책 속의 문장들 같은 인상을 남기는 배우라는 점이다. 이성재를 떠올리면 그의 잘생긴 외모가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움직임이나 태도가 적힌 몇 줄의 문장들을 읽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그 인물에 빠져들수록 이성재라는 배우의 이미지는 점점 희미해진다.

이성재는 존재감은 영화 <홀리데이>에서 함께 연기했던 최민수의 방식과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셈이다. 두 배우 모두 훌륭한 배우다. 하지만 그 표현 방식은 다르다. 최민수는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서든 그 역할을 자신의 불쏘시개로 삼는다.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최민수인지 혹은 그 작품 속의 인물인지 알 수 없는 경계로까지 밀고가 그 인물을 활활 불태운다.

반면 이성재는 불꽃보다 오히려 그 불꽃의 이글거리는 그림자에 더 어울리는 배우다. 그런 까닭에 이성재는 종종 여배우들의 매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그림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그림자는 때론 사물에 음영은 물론이고 아름다움과 생동감까지 불어넣기 마련이다. 이성재가 없었다면 <거짓말>의 배종옥이 그렇게 사랑에 절실하게 고민하는 여인으로 보일 수 있었을까? <미술관 옆 동물원>의 심은하가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사랑스러운 춘희로 보일 수 있었을까?

더 나아가 이성재는 여배우만이 아니라 남자배우들의 매력까지 돋보이게 해준다. <신라의 달밤>에서 껄렁껄렁한 선생을 연기한 차승원의 매력이 돋보인 데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엘리트 건달을 연기한 이성재와의 대비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공공의 적>도 마찬가지. 강철중을 연기한 설경구가 빛났던 건 악역을 옹골차게 연기하면서도 주연의 넉넉한 자리를 배려해준 이성재의 덕이다.



하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성재는 그림자가 아닌 본인의 얼굴을 원톱으로 드러낼수록 빛을 보지 못하는 배우이기도하다. 그런 계기가 된 영화가 바로 <신석기 블루스>였다. <공공의 적>의 냉철하고 정 떨어지는 남자의 모습을 벗고 싶었던 걸까? <공공의 적> 이후 몇 편의 지지부진한 영화로 흥행에 실패한 후 이성재가 선택한 영화는 본인의 모범생 같은 이미지와 정 반대되는 코믹하고 순박한 인물 신석기였다. 비록 그의 인기에는 약간의 흠집을 냈지만 <공공의 적>은 이성재가 생각보다 힘 있는 배우라는 인상을 준 영화이기는 했다.

하지만 <신석기 블루스> 이후 이성재는? 슬프게도 틀니 투혼에도 불구하고 이성재에게 가장 어울리는 않는 인물이 과장된 코믹한 인물이라는 점만 보여주었을 따름이었다. 그 후 그는 국내최초 3D 치정멜로극인 <나탈리>에 조각가로 출연하게 되는데…… 굳이 벗지 않아도 목소리와 분위기만으로 여성들의 은은한 사랑을 받았던 그가 왜 벗어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나탈리>에 대한 기존의 평가만을 접했을 뿐 직접 보지는 않았기에 이 영화에서의 이성재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다. 변명하자면 이 칼럼을 쓰기 위해, 더 나아가 이성재의 연기를 감상하기 위해 굳이 3D로까지 생생하게 야한 장면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마 <나탈리>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 역시 필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아쉽게 잊혀져가나 싶었던 그림자 미남 이성재는 다시 은은한 그림자 역할로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 궤도에 다시 진입한 것은 JTBC의 드라마 <아내의 자격>을 통해서였다. 이 드라마에서 이성재는 여주인공 윤서래가 의지할 수 있고 쉴 수 있는 편안한 쉼터 같은 치과의사 김태오를 연기한다.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사람들은 <신석기 블루스>와 <나탈리>를 통해 잠시 잊었던 그의 ‘서준희’스러운 매력을 깨닫게 된다.



그 후 이성재가 다시금 화제의 중심에 오른 것은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통해서였다. 혼자 사는 싱글남 여럿의 일상을 보여주는 이 프로그램은 현재 잔잔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눈에 띄는 출연자는 이미지와 달리 깔끔하고 섬세한 노홍철이나 쓰레기집의 서인국이 아니라 애완견 에패 아빠이자 기러기 아빠인 이성재다.

<나 혼자 산다>에서 틀니 투혼 없이도 이성재는 평범하고 때론 허술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을 웃긴다. 거기에 가족의 행복을 위해 그림자 같은 삶을 사는 이 시대 아빠의 모습까지 투영되면 짠한 감정까지 더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모습을 시청자들은 이미 알고 있기에 <구가의 서>의 지독한 악역 조관웅은 밉더라도 조관웅을 연기하는 배우 이성재가 결코 미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구가의 서>에서 이성재가 치가 떨릴 만큼 생생하게 연기한 조관웅이라는 어마어마한 악의 그림자가 없었다면 <구가의 서>는 오히려 너무 심심한 동화처럼 느껴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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