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제국' 박근형 어떤 찬사도 아깝지 않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지난 주 방영된 SBS 월화드라마 <황금의 제국> 명장면의 주인공은 두 주연 남자배우가 아니었다. 아무리 피범벅의 얼굴로 등장해도 여전히 잘생긴 고수도 재벌가의 아들이건만 눈만은 여전히 순한 소 같은 손현주도 그날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16일 밤 <황금의 제국>에서 가장 빛났던 인물들은 이미 늙어버린 사내들을 연기한 박근형과 정한용이었다. 이들은 비록 드라마 상에서 이빨 빠진 호랑이 처지지만 존재감만은 다른 배우들을 압도했다.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박근형과 정한용은 각각 성진그룹의 회장 최동성과 그의 동생이자 부회장인 최동진을 맡고 있다. 이 두 인물은 드라마의 시작부터 이미 지나간 세대의 맹수들로 등장했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황금의 제국의 상징이었던 최동성은 뇌종양 수술 후 점점 심해지는 치매에 시달린다. 그의 동생인 최동진은 형을 대신해서 감옥에 갔다 온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지금은 토사구팽의 신세다. 이 드라마는 이미 한물간 두 노년의 사내가 아닌 그들이 쌓아놓은 황금의 제국을 서로 뒤통수치며 빼앗아가는 수많은 인물들의 싸움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두 노역의 연기는 수많은 주연급 인물들이 보여주는 뒤통수치기 싸움들의 흥미진진함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이날의 명장면은 최동성과 최동진의 독대장면이었다. 동생 최동진은 고구마를 한 상자 들고 와서는 옛날 고구마를 마음껏 먹고 싶어서 돈을 벌었던 그 시절을 기억하고 함께 회사 지분을 나누자고 형에게 이야기한다. 고구마란 두 형제에게 죽음과 맞바꾼 삶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피난길에 두 형제가 허겁지겁 고구마를 베어 먹는 사이에 가족들은 비행기 피격에 몰살당하고 말았던 것. 두 사람이 함께 마주하며 그 시절의 회환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황제의 제국>의 빠른 속도에 비하면 훨씬 느린 장면이었지만 그럼에도 긴장감이 넘쳤다.



이 과거 회상에서 정한용은 타고난 나약함 때문에 1인자는 될 수 없어 나약한 2인자로 평생을 산 남자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또한 동생의 요청을 단박에 거절한 냉혈한 회장에서 순식간에 치매에 빠진 노인으로 돌변하는 박근형의 연기도 놀라웠다. 그는 겁에 질린 소년으로 되돌아가 자신의 식솔을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한 가족들로 오인하며 고구마를 하나씩 안기며 눈물을 흘린다. 자칫하면 지극히 유치하게 보일 수 있는 이 순간들을 박근형은 연극무대 위의 비극 장면처럼 만들었다. 고구마, 고구미 유머로 우스꽝스러워 보이던 이 뿌리채소가 이렇게 한 인간의 비극적 결말을 상징하는 소재로 적절하게 여겨질지 그 누가 알 수 있었을까?

물론 과거에도 박근형과 정한용은 베테랑 배우들이었다. 젊은 시절 개성 있는 미남배우에서 연륜이 쌓인 뒤에는 박근형은 꾸준하게 노역 캐릭터를 연기해 왔다. 정한용 역시 이웃집 두꺼비 청년처럼 편안한 연기로 과거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배우다. 그 후 금배지의 맛을 본 뒤에는 정계나 재계의 타락하고 은근 속물적인 중장년층 남자들을 제대로 보여주곤 했다.

하지만 이들이 최근에 빛을 발하는 까닭은 비단 그들의 연기력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드라마의 남자 노년 캐릭터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만이 아니라 몇 년 전까지도 노년 캐릭터는 지극히 평범하고 빤한 성격들이었다. 그들은 술주정꾼이거나, 놀부거나, 인자하거나, 아니면 불쌍했다. 하지만 박경수 작가의 <추적자>나 <황금의 제국>을 비롯해 최근에 몇 편의 드라마에서 노년 캐릭터는 지나간 시절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풍성한 인물들로 재조명되고 있다.



최근 마지막 뒷심을 발휘하는 KBS 월화드라마 <상어>의 경우 노역 조상국을 연기하는 이정길의 활약이 그 힘의 밑바탕이다. 젊은 시절 추억의 드라마 <암행어사>로 지극히 점잖은 정의로운 인물을 연기했던 이정길은 너무나 점잖지만 그래서 더 끔찍하게 여겨지는 악역인 조상국을 제대로 보여준다. <상어>의 조상국은 친일파인 것은 물론 한국전쟁에서는 인민군 등으로 변신하며 신분세탁을 통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로 묘사된다. 조상국 역시 우리 시대의 혐오스러운 권력층의 일생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인물인 셈이다.

박근형의 경우에는 <추적자>에서 서회장 캐릭터를 맡으면서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권력자의 내면을 연기할 기회를 붙잡고 최고의 연기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추적자>에서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약육강식의 꼭대기에 올라 있는 서회장이란 인물을 연기했던 그는 <황금의 제국>에서는 약육강식의 절벽에서 떨어질 위기에 놓인 최회장을 보여준다. 고수가 연기하는 성공을 위해 달리는 젊은 남자 장태주보다 박근형이 연기하는 몰락하는 황제 최회장이 멋있는 건 그래서다. 오랜 세월 약육강식의 꼭짓점에 있던 인물의 비극적인 말로는 언제나 드라마틱한 향취를 진하게 남기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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