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된 연기보다 중요한 건 앞뒤가 맞는 연기”[인터뷰]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돌직구 인터뷰] "뚱뚱한 사람이 미미(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를 맡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노래를 잘 하면 얼굴도 예뻐 보이니까요. 하지만 상황에 맞지 않는 정의를 내리는 연기.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배우는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어요. 최근에 스타니 슬랍스키의 ‘배우수업’을 다시 읽었어요. 거기서 배우의 진실된 연기보다 더 중요한 건 ‘앞뒤가 맞는 이야기, 연기’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됐어요.“

2012년 초연에 이어 재공연 중인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에서 찰스 다네이로 분한 배우 정기열(KAI 카이)을 만났다.

■ 인터뷰에 관한 리얼 대화

-그동안 많은 인터뷰를 해본 배우나 아티스트들은 인터뷰 자체가 싫을 것 같다
“배우로서 인터뷰 그렇게 많이 한 것 아닌데요”

-했던 이야기 또 하고 하는 게 지겹지 않나
“전 작품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건 전혀 지겹지 않아요.”

-인터뷰 자체에 대해 불신한 인터뷰이들도 있는 것 같다
“전 기자들이 무서운 적은 있어요.”

-언제 무서웠나
“인터뷰가 뭔가요. 서로 통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건데, 뭔가를 미리 정해놓고 인터뷰 하러 오신 분이 계세요. 정해진 답을 들으러 오시는 거죠. 그 답을 듣기 위해 계속 유도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무서워요. 또 공연 안 봤는데, 본 것처럼 질문하시는 기자분도 그렇고요.”

■ 진실된 연기의 시작을 알게 해준 <두 도시 이야기>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는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인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2008년 브로드웨이 공연 당시,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의 뒤를 이을 세계적인 뮤지컬이 될 것' 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이번 작품은 런던과 파리를 넘나들며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한 남자의 운명적인 사랑이 주요 내용.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만난 루시와 귀족 청년 다네이, 그리고 루시와 그녀의 가족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의 남편인 다네이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마저 희생하는 또 다른 남자 칼튼의 이야기가 얽혀있다.

배우 정기열은 최수형과 함께 프랑스 에버몽드 가문의 귀족 출신으로서 귀족들의 오만함과 잔혹함에 신분과 이름 모두를 버리는 남자 찰스 다네이 역으로 출연 중이다.

-초연에 이어 재연에도 참여하게 됐다. 새롭게 투입된 제임스 바버 연출이 전체 흐름에 수정을 가했던데 초연 배우로서 소감은?
“변화 한 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의 평가는 관객이 할 것 같아요. 배우로서 말하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새롭게 만들어진 ‘찰스 다네이’란 인물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거기에 부합해야 하는가?란 마음 속의 고민도 계속 됐어요.”

-더블 캐스팅 된 최수형 배우의 다네이는 남성미가 넘쳐 흐르던데 그 점이 고민에 포함됐나
“다른 배우와 비교 할 필요 없이 제가 느끼는 다네이는 너무나 나약해요. 그렇다고 한 없이 약하기만 한 인물은 아닙니다. 심지가 굳고 지조가 있지만 심지가 부러지지 않는 인물이죠. 지나치게 곧으면 부러지잖아요. 그런데 그런 다네이가 부러질 정도로 강하게 서 있으면 극 자체가 무너지게 되요. 그렇기 때문에 강함은 찰스 다네이의 임무가 아니라고 봤어요.”

-보면 볼 수록 이 다네이란 인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는 분석력을 요구하는 것 같다. 지난 시즌은 물론 이번에도 캐릭터에 고민한 흔적이 보여서 좋았다.
“너무 다행인 것은 다네이란 캐릭터가 고민하는 인물이란 점이에요. 정기열이란 배우 자체도 고민을 많은 하는 사람인데 말이죠. 우선 ‘<두 도시 이야기>는 찰스 다네이가 아닌 시드니 칼튼을 위한 작품이다’란 정의를 세웠어요. 그렇기 때문에 다네이가 강해지려고 하면 할 수록 칼튼이 작아져 버린다고 봤어요.”

-남성성과는 다른 다네이만의 강인함도 있지 않나
“다네이는 겉으론 연약하지 않나요? 강인함을 내면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마지막 감옥장면을 예로 들면, 극 중 다네이는 칼튼에게 ‘당신이 루시를 사랑하고 있다면...’란 말을 해요. 이 대사의 의미는 뭘까요. ‘당신이 루시를 사랑하고 있다면 당신이 루시를 가져라. 당신이 책임지세요.’ 이건 다네이 마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진짜 나는 죽지만 내 아이와 여인은 살려다오. 당연히 말도 안 되지만.... 그게 다네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방식의 사랑이라고 봤어요. 내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더 큰 용기가 거기에 있어요.

요새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게 ‘진실된 연기’입니다. ‘진실되게 연기해라 진실되게 연기해라’ 선배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씀이죠. ‘배우수업’을 다시 읽으며 진실된 연기에 대해 찾아보니 ‘앞뒤가 맞는 연기’라고 나와 있더군요. 단순히 작품을 사랑하는 게 진실된 연기가 아니라, 먼저 (자신이 맡은 인물의) 자세, 생각, 캐릭터를 맞게 만들어 가는 게 진실된 연기의 시작이죠. 찰스 다네이 캐릭터도 그렇게 만들어 갔어요.“

-재판 장면에서 미세하지만 설득력 있는 다네이의 액팅을 보여줬다. 대사가 아닌 움직임만으로 인물의 내면을 알게 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사람이 아무리 귀족이고 삼촌에게 큰 소리를 치고 나왔어도 본인이 쓰지도 않은 편지를 썼다는 누명을 쓰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 루시가 재판장에 와서 아는 것을 모른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돼요. 게다가 위증은 사형이라는 말도 듣게 되는 상황인데. 여기서 다네이가 고개를 빳빳이 드는 게 맞는 걸까요? 죽음이 눈 앞에 닥쳐 왔는데 어떻게 턱을 들어요? 어떻게 보면 관객은 1차원적으로 배우가 커다란 제스처를 보여주길 원할 수 있어요. 내가 턱을 들어줘야 ‘아~ 강한 인물이구나’라고 받아들이는 것 처럼요. 하지만 그건 그 순간에만 기억되는 연기 같은 거죠. 여기서 말하는 예는 작품 자체의 분석만이 아닌 하나의 예입니다.”



■ 지조 있는 배우 류정한과의 인연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두 도시 이야기> 주인공 시드니 칼튼 역을 맡고 있는 배우 류정한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관객들이 <두 도시 이야기>에서 보고 싶은 건 시드니 칼튼의 취한 모습이 아니라 취하면서도 반짝이는 눈이에요. 보이지 않는 걸 보고 싶은 게 관객들의 바람 아닐까요.”

-류정한이 보여주는 칼튼의 눈빛과 행동 하나 하나는 한 남자의 숭고한 사랑을 관객에게 온전히 이해시키는 것 같다.
“누군가는 정한이 형이 나이가 들었다 평가한다 치더라도, 제가 정한이 형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부분도 그거예요. 나이보다 중요한 것을 알려주세요. 감옥에서 칼튼이 제 입을 틀어 막아 쓰러지는 장면 있죠. 그때 칼튼이 제 가슴에 손을 대면서 ‘이 순진한 친구야 당신은 이제 살아났어’라는 이야기를 할 때, 그 손길에 에너지가 담겨 있는 사람은 정한이 형이에요. 그렇다고 (서)범석이 형이나 (윤)형렬이가 아니라는, 상대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보이는 것 말고도 보이지 않는 에너지 같은 게 계속 계속 흘러나오는 배우이다.’ 그런 부분을 말 하고 있는 겁니다. 주변에서 괜히 ‘류정한! 류정한!’ 하는 게 아니구나,라고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칼튼과 다네이 궁합은 류정한 배우와 같이 출연 할 때가 더 좋은가
“아니요. 관객들 나름의 취향은 있겠지만 전 그 누구랑 해도 재미있어요. 당신이 하는 말에 따라 제 대사나 톤이 달라져요.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어요. (배우의 특징을 잡아 직접 시연을 하기도 했다) ‘어이 다네이씨’라고 정한이 형이 말하면 ‘예’라고 받아치는 모습, ‘어때요~ 다네이씨’라고 형렬이가 부르면 ‘네~’ 이렇게 말하게 되잖아요. 캐릭터에 따라 변화되는 제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죠.”

-작품 같이 하면서 류정한 배우와 많이 친해졌겠다.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에요.”

-거리를 두는 사이인가
“농담이구요. 사실 인연이 깊어요. 대학 선배이기도 하구요. 친하다기 보다는 정한이 형이 절 좀 사랑하죠.(웃음) 제가 자주 장난스럽게 말해요. ‘저를 그만 좀 사랑하라’ 고. 사실 제가 성악을 그만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메일 주소를 알아내서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한이 형에게 답이 왔어요. 아주 시크하게 딱 두 줄로 왔어요.”

-딱 두 줄 뭐라고 적혀있었나
“오래 되서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나도 네 나이 땐 그런 고민을 했었다. 머지않아 무대에서 만나자’ 란 내용의 편지였어요.”

-정말 무대에서 만나게 됐다
“작년 초연 때 연습 시작 전 프로필 촬영을 할 때 했어요. 칼튼과 다네이가 대립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서로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고 말했죠. ‘재미있는 세상이다’고 이야기 하시더라고요.”



■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하기 보다는 상대 배우가 많은 이야기를 나눠요”

-두 명의 루시 중 임혜영 씨와 더 친하다는 소문도 있던데
“제가 작년에 감사하게도 <두 도시 이야기>로 한국 뮤지컬 대상 신인상을 받았어요. 그 때 수상 소감을 발표하면서 정한이 형이랑 혜영 배우를 언급했는데, 그것 때문에 임혜영 씨랑 사귀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기도 하더라고요. 세상 살면서 그렇게 떨린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떨려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던 날입니다. <스토리오브마이라이프>가 제 뮤지컬 데뷔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뒤에 한 작품이 <두 도시 이야기>였어요. 당시 뮤지컬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없었어요. 저랑 붙는 장면이 많아서 혜영 씨에게 더 많이 물어보게 됐고, 많은 조언을 해줬어요.”

-다네이와 루시가 극중 사랑하는 사이인데 무대 위에서 실제로 사랑스러워 보여서 좋다. 반면 스킨십이 많아서 긴장되지 않나
“긴장이요? 전 무대에 오르기 전, 붙는 장면이 많은 배우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입니다. 계속 ‘오늘은 어때?’ 라고 물어보면서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되면 그날 그날 상대의 컨디션을 알게 되고 더 자연스러운 장면이 나오게 되는 것 같아요.”

-상대 역 최현주 루시와 임혜영 루시가 다르다. 남편 역으로 함께 출연 중인데 어떻게 다른가
“두 분의 매력이 달라요. 최현주 씨는 여성적이고 고귀하고 지적인 이미지에 가깝고, 임혜영 씨는 명량하고 친근한 이미지입니다. 상대 배역이 어떻게 다가오는지에 따라 저도 거기에 맞춰 받아들이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마담 드파르지 역으로 출연중인 배우 신영숙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나
“함께 출연하는 장면이 많은 최현주 씨나 임혜영 씨보다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어요. 하지만 <두 두시 이야기> 뿐 아니라 <레베카>때 보면서 정말 배울 게 많은 분이란 걸 깨달았어요. 좋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누가 될 정도로요. 타고 난 목청과 감각, 강한 지조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무대 위 뿐 아니라 무대 아래에서도 많이 배우고 있어요.”

-배우의 지조에 대해 말한다면
“정한이 형과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제작사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티켓파워가 있는 배우를 쓸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너만의 지조. 신조이다. 명분에 따라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요. 정한이 형이 의외로 겸손해요.(웃음) 타협도 중요하지만 나름의 신조를 잘 지켜나가려고 합니다. 멘탈리즘이라고 하죠. 그 정신을 지켜나고 싶어요.”



■ 테너에서 바리톤으로, 다시 팝페라 가수에서 뮤지컬 배우가 되기까지

팝페라 가수 카이는 서울예고 수석졸업, 서울대 성악과 학사 석사 박사를 거쳐 2008년 팝페라 가수로 데뷔, 크로스오버 무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아티스트이다. 소속은 유니버설뮤직으로 그동안 음반 발매는 물론 KBS 클래식 FM 라디오 진행, 각종 클래식 음악회와 MBC TV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에 출연해 주목받았다.

2008년 <사랑은 비를 타고>(사비타)로 첫 뮤지컬 배우 신고식을 치른 배우 정기열은 2011년 <스토리오브마이라이프>, 2012년과 2013년 <두 도시 이야기>에 출연하며 배우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2012년엔 제18회 한국뮤지컬대상' 시상식에서 남우신인상을 거머쥐며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지난 가을에 올려진 ‘테너 박인수와 제자들이 함께한 50주년 기념 음악회’를 잘 보고 왔다. 당시 사회를 보면서 울먹이던데, 사제지간의 정이 다른 제자보다 더 특별해보였다.
“박인수 선생님은 저에게 그랜드 마스터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들 때 도움을 주셨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정신적인 멘토에요. 제가 방황할 때 혼도 많이 내시고 저를 많이 이끌어 준 분이세요. 제 인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분이시죠.”

-바리톤 정기열로 많이 알려졌는데, 원래 테너이지 않나
“서울대 성악과를 테너로 입학 한 게 맞아요. 그런데 목에 결절이 생겼어요. 그래서 파트를 바리톤으로 바꾸게 됐어요. 2002년 제 실력을 좋게 보신 줄리어드 음대 학장님에게 제의도 받고, 일본 나가노 음악 캠프에도 초청받았던 시기에 그렇게 불운이 겹쳤어요.”

-목 상태가 치유가 안 된 상태에서 음역대를 바꾼 건가
“제가 가진 컨디션에서 상위의 것을 익혀서 소리를 낼 수 있게 됐어요. (배우 유지태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 <더 테너-리리코 스핀토> 실제 주인공인 테너 배재철 씨의 경우와는 다른 건가란 질문을 던지자) 배재철 선생님은 혀근 암이었고 전 목에 물혹이 생긴거였어요. 혹시나 목소리에 이상에 생길까봐 수술하지 않고 자연치유 쪽으로 결정을 내렸어요. 도망치듯이 바리톤으로 내려온 거죠. 또 그 사이 3년간 휴학을 했어요. ‘난 뭘 하고 살아야 하나’ 같은 청년의 고민이 시작된거죠. ”

-데뷔하기 전 100㎏이 넘는 거구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3년의 공백 기간 동안 체형 뿐 아니라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그 전까지만 해도 성격이 상당히 외형적이고 액티브 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그 사건 뒤로 내성적은 아닐지라도 혼자 있는 걸 좋아하게 됐어요. 제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죠. 또 예전엔 성격이 상당히 급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느려요.(인터뷰 내내 카이는 차분하고 느린 말투를 유지했다). 사람이 180도 완전히 달라진거죠. 주변에선 독기를 품었다는 말도 했는데, 전 스스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봐요.”

-그 시기에 뮤지컬에 대한 관심도 생긴 건가
“성악과를 다니면서 뮤지컬의 ‘ㅁ’도 몰랐어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레미제라블>DVD를 선물해줬어요. 정말 일생 일대의 쇼크를 경험했어요. ‘세상에 이런 게 있구나’라고 놀랬거든요. 그 사이 조승우의 <카르멘>을 만났고, 뮤지컬 배우의 꿈을 꾸게 됐어요. 2005년경 마침 국내에서도 <레미제라블>을 공연한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그래서 ‘도전해봐야 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오디션을 봤어요. 그런데 영국인 심사위원이 제가 노래를 부른 지 30초만에 ‘됐다 돌아가라’고 말하는데...그 자리를 그냥 떠날 수가 없었어요. 몇 년간 꿈꾼 기회인데 30초만에 거절됐다는 생각이 들자, 어떻게든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어요. 그래서 외국 연출자를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오디션을 다시 보고, 결국 앙상블로 뽑히게 됐어요. 그런데 <레미제라블> 국내 공연이 무산됐고, 나중에 뮤지컬 <겨울연가> 오디션에 뽑혀서 최종까지 올라갔는데 마지막에 떨어져서 아무것도 못하게 됐어요.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다시 학교로 돌아갔어요.”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성악을 좋아해서 우연히 동아 콩쿠르 평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 평을 보고 뭔가 목 쪽에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전 동물 같은 우렁 찬 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가진 건 없어요. 1등 소리는 아니죠. 게다가 목에 이상도 생겼죠. 그런데 이게 하늘의 장난인지 바리톤으로 음역대를 바꾸고 성악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어요. 물론 처음엔 계속 떨어졌어요. 열 번 넘게 도전한 뒤 받은 상이죠. 당시 평들도 음악성이 좋다는 쪽이 많았어요. 그런데 테너가 바리톤이 되는 게 권투 선수가 중량급을 바꾸는 것처럼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정말 말 그대로 도망치듯 바리톤을 하게 됐어요. 고음을 내야 하는 테너 음역대의 고된 길을 좇기보다 다른 것에 도전해보자는 생각도 컸구요. ”

-성악가의 크고 멋진 소리가 감동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보는데
“박인수 선생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세상에 소리 좋은 사람은 세상의 모래 알처럼 많다‘. 스승의 말씀처럼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건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음악성 아닐까요. 당시에 서울대 음반자료를 꺼내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어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는 뭐가 있을까?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가는 누가 있지? 라는 고민과 호기심으로 계속 찾아봤어요. 타고난 소리는 좋으나 연구를 안 하는 학생이 있다면, 저는 좀 더 공부하고 연구하는 쪽이었죠.”

-성악가들은 소리를 지나치게 중요시 여기는 것 같다.
“성악가들이 거쳐야 할 통과의례 같은 거라고 봐요. 물론 ‘내가 들었을 때 어떤 게 더 좋으냐, 안 좋으냐’는 말 할 수 있다고 봐요. 하지만 소리보다 중요한 게 노래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죠. 내면이 들어있는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은 다르잖아요. 누가 소설가를 놓고 1위 2위 3위를 꼽을 수 있겠어요? 마네 모네 등의 화가에게 누가 순위를 매기겠어요? 전 1등 가수가 아닌 오래 기억나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성악 콩쿠르 말고도 가곡 쪽으로도 상을 받은 걸로 안다. 가곡이 정기열의 음악성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장르 같다.
“2002년 테너로 슈베르트 가곡 상을 받았어요. 슈베르트나 브람스 뿐 아니라 영국 작곡가들 음악도 좋아해요. 차로 이동하면서는 늘 다양한 가곡을 들어요. 콩쿠르 레퍼토리가 대개 비슷한데, 전 다른 곡을 많이 불렀어요. 주변에서도 좋은 노래를 추천해달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천천히 그리고 흔들림 없이 본인의 생각을 말하는 배우 정기열을 지칭하는 호칭은 많다. 훈남 팝페라 가수, 모델 같은 외모를 지닌 가수, 미소천사, 따뜻한 목소리의 소유자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가 지닌 스페셜리티(Specialty)는 뭘까?

“성악 전공 배우들의 성악 발성을 불편하다고 여기시는 분도 충분히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걸 다르게 생각하면 저 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항상 기본으로 삼는 건 클래식이에요. 그 안에서 캐릭터를 온전히 갖추어 나갔을 때 나오는 음악성, 뮤지컬의 감동, 팝페라의 매력을 보여주고 싶어요. ”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비오엠 코리아, 유니버설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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