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손가락 마이크 빼고 배우로 나서라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이정현의 신곡 ‘V’의 뮤직비디오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채 2분이 되지 않는 짧은 티저 영상이다. 이 영상에는 그 동안 사람들이 박찬욱 감독의 특징이라고 여겼던 미장센들이 알차게 들어 있다. 음산한 기운이 감돌지만 칙칙하기보다 오히려 낡은 벨벳 같은 화면의 질감, 좀비신부 이정현이 살고 있는 어딘지 낡고 기괴한 분위기의 귀곡산장 같은 세트가 그러하다.

한편 ‘V’의 티저 영상에서 눈꺼풀에 그린 파란 눈까지 도합 네 개의 눈을 가진 좀비신부 이정현이 등장하는 장면은 10초가 될까 말까다. 하지만 이정현이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타고난 스타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것도 특별한 움직임 없이 깜박이는 눈과 살짝 찡그린 미소로 이 호러적이면서 코믹한 이정현의 신곡 뮤직비디오에 대한 기대감은 한껏 드높아진다.

안타깝게도 정작 본편이 시작되면 뮤직비디오에 대한 흥미는 금방 시들해진다. 우선 이정현의 신곡 ‘V’는 그렇게 신선한 맛은 없는 노래다. 이 전형적인 클럽송은 몇 개의 잘빠진 해외 클럽송의 요소요소를 믹스해놓은 분위기다. 촌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어느 부분에서 흥겹게 몸을 흔들어야할지 아리송해진다. 차라리 대놓고 나이트클럽의 후끈한 분위기를 노렸던 초창기 히트곡인 ‘반’이나 2010년에 나왔다고 하기엔 당황스러울 정도로 오래된 분위기의 댄스곡이지만 즐기기엔 좋았던 ‘수상한 남자’가 더 나아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여전한 것은 배고픈 소녀가 울부짖는 듯한 이정현의 찢어지는 보컬이다.

하지만 그저 그런 흔한 노래도 포장에 따라 최고의 곡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뮤직비디오의 힘이다. 박찬욱 박찬경 감독이 함께한 ‘V’는 재미있는 영상이지만 잘 만든 뮤직비디오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이 영상물은 세련되게 잘 빠진 것도, 최근 트렌드 중 하나인 ‘병신미’에 충실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박찬욱 박찬경 팀의 개성이 도드라진 것도 아니다. 그저 몇 번의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자그마한 소품이다.



‘V’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장면들도 어딘지 지나치게 익숙한 감이 있다. 좀비신부 이정현의 눈코입이 입술 세 개로 바뀌는 장면은 마돈나의 90년대 뮤직비디오 ‘Bedtime story’나 흑인 여성 래퍼 아질리아 뱅크스의 뮤직비디오 ‘Yung Rapunzel’에 등장했던 장면과 흡사하다. 코르셋을 조이듯 끈을 가지고 몸을 조이는 장면들도 마돈나의 ‘MDNA’ 투어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좀비 콘셉트 역시 이곳저곳에서 많이 쓰였던 터라 단물도 좀 빠졌다.

무엇보다 뮤직비디오라는 기준에 부합하기에는 음악 자체의 리듬과 영상이 흘러가는 리듬이 너무나 따로 논다. 그러다 보니 화면 안에서는 유쾌해 보이는 영상이건만 정작 눈으로 보며 즐기기에는 오히려 지루하다.

물론 뮤직비디오 한편에 너무 많은 기대를 갖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티저 영상의 독특함을 뒤로 하더라도 대중들은 박찬욱 박찬경과 팀과 이정현의 단편영화 <파란만장>에 이은 두 번째 만남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기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번 이정현의 ‘V’는 흥미로 한번 볼 뿐 여러 번 보고 싶은 뮤직비디오는 아니다. 다만 이정현의 팬이라면 이 뮤직비디오에 흥미로운 부분을 찾을 수도 있겠다. 이정현이 좀비들과 함께 보여주는 춤은 전혀 세련되지 못했지만 귀신 들린 인형 같은 좀비신부 연기는 여전히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2천년대 중반 이후 이정현은 국내에서 추억의 스타가 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비록 99년 세기말에 기묘한 외계어로 자기소개를 하는 소녀이면서 한복과 흡사한 무대의상에 부채춤을 추며 손가락 마이크로 노래를 부른 ‘와’가 수록된 1집이 어마어마한 히트를 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와’와 ‘바꿔’의 태풍이 지나간 뒤에 보컬리스트나 댄서로서의 타고난 재능이 그리 빼어나지 않은 이정현은 그 후로 무얼 하건 다소 아쉽다.

하지만 아직까지 배우로서의 이정현은 매력 있는 존재다. 비단 <꽃잎>에서의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박찬욱 박찬경 감독과 함께 한 <파란만장>에서의 신들린 무당 연기는 오랜만에 그녀의 강렬한 이미지를 다시 보여준 작품이었다.



반면 <범죄소년>에서 미혼모 효승으로 출연한 그녀는 연기자로서의 전혀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범죄소년>의 효승은 단순히 불쌍한 미혼모로 환원될 수 없는 인물이다. 효승은 연약하지만 영악하지 못하고 착하지만 책임감이 없어서 삶에 이리저리 치이는 인물이다. 생글생글 귀엽게 웃는 효승은 때론 뻔뻔하고 때론 히스테릭하며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여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정현은 큰 과장 없이 효승이란 인물에 녹아들면서도 설득력 있는 리얼한 캐릭터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이처럼 이정현은 진지한 배우로서의 입지를 조금씩 쌓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반대편 손에 쥐고 있는 부채는 중화권에서는 모르겠으나 국내에서는 이제 너무 낡았다. 더구나 그 부채를 움직일 때마다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다시금 허물어져간다. 손가락 마이크를 빼느냐, 마느냐 이것이 어쩌면 뮤직비디오 ‘V’의 완성도보다 이정현에게는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겠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에이바 필름 앤 엔터테인먼트, 영화 <꽃잎>, <파란만장>, <범죄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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