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국열차> 봉준호는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는가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이 영화는] 봉준호는 지금껏 자신의 세계관을 속 시원하게 드러내지 않아 왔다. 어쩌면 그게 그의 영화가 갖고 있는 정치적 매력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에서 전경 2개 중대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가 단칼에 거부당한 후 부하 형사 둘에게 분풀이 하듯 소리치는 수사반장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식이었다. “마 우짜겠노. 다들 시위 진압 나갔다고 안카나!” 이 영화의 형사 둘은 미치도록 범인을 잡고 싶었지만 정작 그들이 놓친 건 80년대라는 시대의 악마였다.

<괴물>에서도 봉준호는 이 괴물이 도통 어디서 온 것인지 밝히지 않는다. 가능성을 이렇게 저렇게 열어 놓을 뿐이다. 예컨대 오프닝 시퀀스에서 한강으로 투신하는 한 남자의 모습 같은 것이다. 한강의 괴물은 과연 누가 만들어 냈는가. 무엇보다 진짜 괴물은 과연 무엇인가. 사람들을 잡아 먹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아니었던가. 봉준호는 사람들이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마더> 때도 그랬다. 아들의 동네 선배라는 청년은 엄마 혼자 있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웃통을 벗어 던진 채 집을 휘젓고 다닌다. 그는 창문을 빼꼼 열고 밖을 흘깃 쳐다보며 엄마한테 이렇게 말한다. “여긴 참 이상한 동네야 엄마. 그러니까 절대 밖에 있는 놈들 아무도 믿으면 안돼.”

그런데 봉준호가 생각을 바꿨다.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자기 뜻을 전달하는 데 있어 그간의 간접적인 방식을 벗어 버리고 보다 직접적이고, 보다 원론적이며, 보다 혁명적인 어법을 채택했다. 봉준호의 이번 신작 <설국열차>는 그래서, 그의 전작과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아주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왠지 전작을 통해 보여줬던 자신의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이번 작품을 통해 총망라해 정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봉준호는 이번에 확실하게 지금의 세상은 변혁시킬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일종의 혁명을 논한다. 무산자(無産者)들의 봉기. 무산자들의 리더급이자 밴가드(Vanguard, 전위)들의 저항과 항거, 그리고 그들이 흘리는 피와 희생을 똑똑히 그려내려 애쓴다. 마치 예전의 짜르 체제를 전복시켰던 러시아 혁명이 그랬듯이. 아니면 소모사 정권을 붕괴시킨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그랬듯이. 따라서 <설국열차>는 봉준호 식의 메니페스토(manifesto, 선언)인 셈이다. 그는 지금의 세상이 여전히 보수의 가치보다는 진보의 가치가 좀더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설국열차>는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 했다가 되려 빙하기를 초래한 과학자들의 잘못으로 인류가 멸망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아 남았는데 그건 윌포드(에드 해리스)라는 기이한 엔지니어가 발명한 기차 때문이다. 이 기차에는 빙하기 한가운데를 영원히 달리게 할 수 있는 엔진이 실려 있다. 윌포드는 곧 이 기차의 최고 권력이 된다. 기차는 곧 완벽한 계급으로 재편되고 통제된다.

그런데 이 기차 꼬리 칸에는 불청객들이 실려 있다. 본래 탑승자 명단에는 없었으나 생존을 위해 무임승차 했던 이들을 윌포드와 메이어 총리(틸다 스윈튼) 일당은 꼬리 칸에 가두고 ‘사육’한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프로틴 블록이라는 이상야릇한 식량만이 제공된다. 동물보다 못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의 존엄성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다. 프로틴 블록마저 없었던 시절에 꼬리 칸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참극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 끔찍한 시절을 겪으며 사람들은 차츰 지도자인 길리엄(존 허트)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다. 그를 정신적 멘토로 여기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동생 뻘인 에드가(제이미 벨)와 함께 사람들을 모아 조직적 저항에 나선다. 열차의 보안 시스템을 설계했던 남궁민수(송강호)와 그의 딸 요나(고아성)이 이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제 그들 모두는 힘을 합쳐 한 칸 한 칸 앞으로 전진해 나간다. 예상했듯이 그 한 칸 한 칸마다 피의 살육전이 기다린다. 이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설국열차>의 열차는 지금의 세상을 축약해 놓은 것이다. 기차는, 단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대다수 사람들을 지배하는 세상의 모습을 닮아 있다. 소수 권력자의 호의호식을 의해 대중들은 피폐한 삶을 견뎌야 한다. 메이어 총리는 꼬리 칸 사람들을 모아 놓고 질서와 본분을 지키는 일이야 말로 설국열차의 위대한 가치라고 떠들어 댄다. 최고 권력인 윌포드는 기차=세상의 균형을 위해 심지어 꼬리 칸의 폭동조차도 의도하고 조종해 왔음을 내비친다. 세상의 모든 일은 소수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돼야 하며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반란 세력의 지도자인 커티스가 마지막 칸에서 목도하는 것은 좌절과 희망의 그 중간 쯤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는 올곧이 자신 스스로에게 달려 있음을 그는 깨닫는다.

체코 프라하의 바란도프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설국열차>는 열차 한 칸 한 칸마다 뛰어난 미장센을 자랑한다.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하는 꼬리 칸에서 맨 앞 권력자의 공간인 엔진 칸까지, 그 하나 하나마다 세상의 공간과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정치적 의미를 담아내는데 성공한다. 화려한 컬러의 감각으로 무채색 느낌의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묘사해 내는 기묘한 역설의 그림을 창조한다. 그건 표면적으론 미술팀의 뛰어난 기량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 공간마다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고 있는 감독의 정치사회적 역량이 두터웠던 덕이다.



영화는 매우 역동적이다. 그래서 마치 액션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장 마르크 로셰트와 뱅자맹 르 그랑, 자크 로브가 그려 낸 원작만화의 분위기와는 달리 영화는 개인의 투쟁이 아니라 대중의 투쟁에 더 무게를 뒀기 때문이다. 무릇 봉기란 정적인 분위기로 시작돼 한 순간 폭발하듯 동적인 파도와 파장을 이어가기 마련이다. 설국열차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물탱크 칸을 사이에 두고 커티스 일행, 곧 꼬리 칸 사람들이 권력의 특수부대와 일대 혈전을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 가운데 압권이다. 폭력 씬의 최고봉이다. 도끼와 쇠파이프가 날아 다닌다. 피로 뒤범벅이 된 몸과 몸이 엉키고 부딪힌다. 살점이 튄다. 협소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몹 신에서 봉준호는 자신이 연출 기량이 어느 수준에까지 이르렀는가를 여실히 증명해 내는데 성공한다.

틸다 스윈튼과 에드 해리스, 존 허트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특히 틸다 스윈튼은 두고두고 이 영화의 연기로 회자될 것이다. 그들의 연기를 이렇게까지 끌어낸 것은 바로 감독 봉준호가 갖고 있는 예술혼이다. 영화는 감독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봉준호는 또 한편의 역사적 작품을 성취해 냈다. 그것도 지금 시대에 가장 걸맞은 직설화법의 작품을. 지금은 에둘러 갈 시간이 없다. 우리의 올바른 생존을 위해서, 무엇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무엇이 요구되는지 서둘러 파악하고, 논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 호흡이 어떤 이에게는 다소 숨가쁘고, 그래서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변화는 쉽고 편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신은 설국열차의 어느 칸에 타고 있는가. 영화 <설국열차>는 우리에게 어서 해답을 찾아 나서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이제 정말 그 얘기를 귀담아 들어야 할 때이다.

영화평론가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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