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교실’ 고현정 아니면 누가 가능했겠나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고현정은 미스코리아 출신이지만 미스코리아의 왕관보다 배우라는 타이틀이 더 잘 어울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데뷔시절부터 단순히 얼굴 예쁜 미스코리아라고 얕잡아볼 수 없을 만큼의 능력을 드라마에서 보여주었다.

데뷔시절 고현정의 분위기는 모든 것을 빗겨가지만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오묘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고현정은 89년 미스코리아 진을 차지했던 오현경만큼 화려한 마스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90년대 초반 그녀가 조연으로 출연했던 <여명의 눈동자>에서 여주인공 여옥을 연기한 채시라처럼 차가운 얼음조각상을 닮은 야무진 인상도 아니었다.

90년대 초반 고현정은 언뜻 보기에는 흰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 큰 눈망울 때문에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의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그녀의 함박웃음과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어우러지면 청순함은 어느새 당차고 씩씩한 분위기로 종종 뒤바뀌곤 했다. 그녀의 브라운관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의 막내딸 말숙이가 귀여운 당찬 모습이라면 <모래시계>의 여주인공 혜린은 좀 더 성숙한 분위기의 당찬 모습이었다.

하지만 고현정은 씩씩한 분위기만이 아니라 쓸쓸하고 우울한 쓴맛의 표정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손바닥 위에 소복이 올려놓은 모래가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듯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고 난 뒤의 표정을 그녀는 어린나이에 짓고 있곤 했다. 그래서인지 90년대 초반 고현정이 연기한 인물들은 늘 누군가를 잃어버려야만 하는 운명으로 달려갔다. <두려움 없는 사랑>에서는 연인을, <작별>에서는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운명에 처한 여주인공을 연기했다.

그런 그녀였기에 90년대 초중반 멜로물이건 대작드라마건 그녀는 늘 여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딱 한번 그녀가 드라마에서 빛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그건 MBC 주말연속극 <엄마의 바다>에서였다. 그 드라마에서 고현정은 맏딸을, 당시 신인이었던 고소영은 둘째 딸을 연기했다. 고소영은 비록 고현정처럼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주진 못했지만 그 특유의 발랄하고 여우같은 모습은 브라운관에서 너무나 빛이 났다. 고소영은 당연히 그 드라마를 통해 90년대 초반 젊은 여성들이 동경하는 스타일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처음으로 여주인공 고현정보다 조연이었던 고소영이 더 빛났던 드라마였다.



하지만 그 후로 고현정은 자신의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특히 <모래시계>의 혜린은 그녀가 은퇴 이후로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겨지도록 만든 드라마였다. 혜린은 모든 여배우들이 한번쯤 꿈꾸지만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 그런 캐릭터였다. 씩씩하고, 사랑스럽지만,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관통해야 하는 그런 시대의 드라마를 지닌 인물이 바로 혜린이었다. 그리고 <모래시계>에서 고현정은 고현정이 아닌 혜린은 상상할 수 없게끔 만들어놓고 브라운관을 떠났다.

10년 후 고현정은 다시 배우로 돌아온다. 그 후에도 고현정은 출연하는 드라마마다 모두 자신의 드라마로 만들었다. 대중들 역시 그녀가 출연하는 드라마를 고현정의 드라마라라고 불렀다. <봄날>은 조인성의 드라마가 아니라 고현정의 복귀작이었다. <여우야, 뭐하니>는 히트작 <내 이름은 김삼순>을 쓴 김도우 작가의 작품이라기보다 복귀 이후 고현정이 망가지는 노처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걸로 화제가 된 그녀의 두 번째 드라마로 불렸다. <히트>만이 예외였다. <히트>는 여형사로 등장하는 고현정 중심이 아니라 하정우를 비롯한 다양한 형사들이 등장하는 사건 중심의 수사물이니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하지만 이후 MBC 사극 <선덕여왕>에서 고현정은 드라마의 모든 인물들을 그림자처럼 만들어버린 미실로 열연한다. 결국 그해의 연기대상은 타이트롤을 맡은 선덕여왕이 아니라 미실의 차지였다.



이처럼 고현정은 자신의 드라마에 대단한 존재감을 발휘했지만 고현정은 막을 내린 <여왕의 교실>에서 의외의 맞수들과 조우한다. 그들은 고현정이 마여진 선생으로 분해 가르친 6학년 3반의 아이들을 연기한 아역배우들이다. 심하나, 오동구, 김서현, 은보미 같은 꼴찌반장들을 연기한 김향기, 천보근, 김새론, 서신애 같은 아역배우들은 물론이고 6학년 3반 전체의 아역배우들은 고현정 앞에서 기죽지 않고 자신들의 연기력을 뽐냈다. 아역배우들은 아이들 세계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물론이고 어른들의 사회를 상징하는 부분까지 깊이 있게 보여주었다. 그 결과 드라마가 종반에 이르면 아이들은 다함께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귀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른들의 눈물샘을 펑펑 터트리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이들의 맞수였던 고현정의 연기 역시 이 드라마에서 여전히 빛났다. 아이들의 생기발랄함과 대비되는 절제되고 무심하나 자신의 따뜻한 마음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그녀의 연기는 원작과는 다른 하지만 원작보다 더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가깝게 다가오는 마선생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더불어 고현정이 영리한 여배우라는 사실을 오랜만에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대사를 건조한 모래처럼 속삭이듯 덤덤하게 말하고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줄 아는 여배우는 그리 흔치 않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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