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대 시어머니들의 납량특집 주말극장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MBC 주말드라마 < 백년의 유산 > 의 시청률을 이끌었던 모진 시어머니 방영자 여사의 위력 때문일까? 최근 각 방송사의 밤 9시 이후 주말드라마에는 악덕 시어머니들이 떼로 등장한다. 더구나 이들은 박원숙이 연기했던 방영자의 귀여운(?) 매력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오롯이 악역의 역할에만 충실한 캐릭터들이다. 며느리 구박하고 자기 잇속 챙기기에 바쁜 마치 고생대 드라마에서나 본 것 같은 그런 시어머니들 말이다. 심지어 < 사랑과 전쟁2 > 에서도 어쩌다 잠깐 등장해 불난 집에 부채질 한번 해주고 슬그머니 빠지는 그런 캐릭터들이 주말극장을 점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어머니들은 한여름 납량특집 주인공 같은 역할을 충실하게 재연하고 있다. 그들 때문에 신생대의 며느리들은 심장이 죄여오는 공포를 체험하고, 중생대의 초식공룡처럼 유순한 남편들은 두 여자들의 기 싸움으로 제물이 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등골이 오싹해진다.

먼저 MBC 드라마 < 금 나와라 뚝딱! > 에서는 시대를 가로질러 공명하는 두 명의 악덕 시어머니들이 등장한다. 우선 내 아들은 무조건 안쓰럽고 내 며느리는 무조건 건방지다는 신조로 살아가는 시어머니 김필녀 여사가 있다. 90년대 초반 SBS 아침드라마로 방송되었던 원조 < 겨울새 > 의 악덕 시어머니로 이미 명성을 얻은 반효정은 서울깍쟁이 시어머니 같은 김필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역시 이 드라마의 악덕 시어머니 최고봉은 청담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장덕희 여사다. 비록 재벌집의 마나님이지만 호적상 본부인이 아닌 첩으로 살아야하는 그녀의 운명은 당연히 비비 꼬여 있을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이간질시키고 비아냥대고 잘근잘근 씹는다. 하지만 그녀는 < 백년의 유산 > 의 방영자 여사처럼 무조건 큰 소리로 며느리들을 윽박지르지는 타입은 아니다.

이혜숙이 연기하는 청담동은 짬짬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강좌라도 들었는지 특유의 논리로 사람들의 내면을 헤집고 후빈다. 그녀의 논리적인 대사를 듣자면 < 금뚝딱 > 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무기력해지고 만다. 그녀의 논리에 따르면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의 억울한 사연은 결국 자신이 자초한 인과응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최근 방영을 시작한 SBS의 < 결혼의 여신 > 의 재벌가 시어머니 이정숙 여사의 경우 아예 < 더러운 철학 > 이라는 책을 우아하게 읽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마도 그녀는 니체의 초인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있는 인물이 아닐까 한다. 그녀의 입장에서 재벌가 시어머니는 모든 것을 초월한 초인일 테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이정숙 여사는 같은 초인적 힘을 가진 재벌가 회장인 남편을 상대할 때만 손톱을 드러내고 사납게 군다. 반면 며느리를 부릴 때는 그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하찮은 물건 대하듯 몇 마디 말만 툭툭 던진다. 하지만 그 몇 마디 짧은 대사와 이정숙 여사의 분위기만으로 드라마는 한순간에 오싹한 공포물의 분위기가 감돈다.

이정숙 여사를 연기하는 배우는 영화 < 올가미 > 에서 이미 스릴러 시어머니 연기의 정점을 찍은 배우 윤소정이다. 그녀는 이 드라마에서도 그저 며느리인 여주인공을 훑어보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시청자들을 소름끼치게 만드는 중이다.

한편 < 결혼의 여신 > 은 재벌집 시어머니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악덕 시어머니를 한 명 더 내세운다. 바로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성우출신 성병숙이 연기하는 변애자 여사다. 변애자 여사는 그 동안 수많은 드라마에 등장했던 철판형 시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아들 잘못은 세발의 피고 며느리 설움은 결국 며느리 성격 탓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시어머니 말이다. 낡을 대로 낡은 고생대 시어머니 캐릭터지만 여전히 며느리들이 동시에 한을 품어 한여름에 서리가 내리게 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같은 시간 MBC에서 방영되는 < 스캔들 > 에서는 악덕 시어머니가 주요인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70년대 미스코리아 출신인 배우 홍여진이 연기하는 우아미의 시어머니가 잠깐씩 등장할 때마다 극에는 서늘한 분위기가 감돈다. 최근에는 남편이 죽고 아이까지 유산한 며느리에게 미역국 국그릇을 내던지는 장면을 선보였다.

지금 세상에 이런 고생대 시어머니가 어디 있나, 라고 텔레비전을 끄고 멍하니 앉아 있자니 문득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나마 드라마 속 현실은 고생대다. 하지만 자유로운 신생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현실세계가 실은 안 들리고, 말 못하고, 안 보이는 포스트-선캄브리아 시대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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