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1985> 뉴욕 상영 동행 취재기
-“’남영동’을 보며 콴타나모 수용소를 떠올리면 좋겠어”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이 영화는] 마치 로버트 카파의 손이 떨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날 정지영 감독의 목소리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8월 9일 뉴욕 맨해튼. 현대미술관(MOMA :the Musuem of Modern Art) 지하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영화제 ‘포커스 온 코리아’.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영동 1985>의 상영이 막 끝난 직후였다. 뉴욕커들은 이 영화를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란 제목으로 봤다. 원제보다는 영화를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미국에도 부시 시대 때 제정된 ‘국토안전법’이라는 비슷한 개념이 법이 있기 때문이다. 약 300석 규모의 극장 안은 영화에 따른 충격 탓인지 다소 침울한 분위기였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 정지영 감독은 <남영동 1985> 때문에 해외를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지난 달 6일과 7일에는 각각 오사카와 도쿄에서 상영회를 가졌다. 그곳에 있는, 일종의 양심수들의 모임에서 영화를 초청했다. 정지영 감독은 또 이번 뉴욕 상영이 끝나는 대로 캘리포니아 얼바인으로 날아가 다시 관객들을 만난다.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한국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미국에 오는 김에 거기까지 좀 들러달라고 했어. 영화가 초청되는 곳이라면 당연히 어디든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간다고 했지. 앞으로도 시체스 같은 몇몇 영화제를 더 다녀야 해. 바빠. 요즘 많이 바빠.”

<남영동 1985>는 해외판권이 쉽게 팔릴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상업성이 전염병처럼 창궐하는 영화계의 모습은 비단 국내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신 각종의 영화제가 이 영화를 찾고 있다. 이번 뉴욕 상영은 뉴욕 내 ‘코리안 소사이어티’와 ‘현대미술관’의 합작품이다. 이들은 <남영동 1985>외에도 이지승 감독의 <공정사회>와 전수일 감독의 <콘돌은 날아간다>, 이송희일 감독의 <백야>와 장건재 감독의 <잠못드는 밤>을 함께 초청했다. 모두 작은 규모의 영화들이고, 일반극장에서 쉽지 않은 개봉 과정을 거쳐 소개됐지만 지금의 한국사회를 각자의 시선으로 꿰뚫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찾아진다.



특히 <남영동 1985>의 뉴욕 MOMA 상영은 ‘진실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1980년대 미국은 전두환 군사정권이 주도했고 남영동 등에서 자행됐던 야만적인 고문 행위에 대해 눈을 감고 외면했었다. 이 영화의 상영은 어떤 면에서, 비록 작은 규모이긴 해도, 미국인 스스로의 자성과 반성,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았을 때에 자신들에게 나타나는 결과를 이미 목격한 터였다. GV(관객과의 대화)가 열리기 직전, MOMA 내 커피숍에 앉아서 정지영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난 여기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관타나모 수용소를 떠올렸으면 좋겠어. 거기서도 남영동과 똑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

정지영 감독의 말이 이어졌다. “일본 상영 때 정말 놀랐었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치유의 느낌을 받았다는 거야. 세상에. <남영동> 저 영화가 불편하면 불편했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런데 뒷말을 듣고나서 아 그렇겠구나 하면서 무릎을 쳤어. 영화를 본 사람들 상당수가 이런저런 이유로 고문의 후유증을 앓았던 사람들이었어.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김근태 같은 사람도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기 동지들 이름을 불더라는 거야. 사람들을 평생 괴롭히는 게 자기가 동지를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이거든. 육체적 고통보다 오래 가는 게 그런 트라우마래. 그러니 고 김근태 고문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큰 힐링을 얻었다는 거야. 역설이야. 그지? 그 이야기를 듣고 좋아해야 하는 건지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건지 한참 고민했어.”



영화 후 열린 GV에서 객석으로부터 나온 질문들은 한국에서 상영했을 때와 비슷한 것들이었다. ‘고문 장면은 어떻게 찍었는지’, ‘고문 기술자들이 고문을 가하면서도 자식 학교 얘기를 하고 그런 것이 과연 실제였는지 아니면 픽션이었는지’, ‘고문 전문가 이두한의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가 계속해서 부르는 휘파람 소리와 그 노래는 왜 선택했는지’ ‘주인공 역을 맡은 박원상과의 교감은 어땠는지’ 등등이었다. 관객들은 시종일관 진지한 모습들이었다. GV의 모더레이터가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의 답은 이랬다.

Q : 1980년대에 <접시꽃 당신> 등 멜로영화를 찍던 당신이 어느 시점에서 부터인가 강한 사회의식을 담은 영화들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그건 어떤 사명감 때문인가?
A : 멜로영화 역시 당시의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 둘이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980년대는 지독한 검열의 시대였다. 사회정치적 이슈를 담은 영화를 만드는 게 불가능한 나날이었다. 1987년 한국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은 내게도 큰 전환점이 됐다. 그 이후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만들려고 애써 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영화가 세상을 바꾸거나 혹은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사명감 때문에 이런 류의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 성격이 그럴 뿐이다.

적은 수의 관객이었지만 <남영동 1985>의 MOMA 상영은 성공적이었다. 여전히 이 영화는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국내 상영 당시에는 33만 관객을 모았다. 결코 만만치 않은 수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상일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 본다. 이 영화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잠재 관객 수는 어마어마한 수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대적 공감의 울림 폭이 큰 영화라는 얘기다. <남영동 1985>가 드디어 세계 관객들을 한명 한명씩 만나기 시작했다. MOMA 상영은 바로 그 첫걸음이었다.



영화평론가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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