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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 객석에서 터진 환호가 씁쓸한 이유
기사입력 :[ 2013-08-20 14:11 ]


‘숨바꼭질’, 왜 가난한 자를 절대 악으로 그렸나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숨바꼭질>은 드라마 <추적자> 이후 재조명을 받고 있는 배우 손현주가 첫 주연을 맡은 공포영화이다. 전미선, 문정희 등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들이 조연으로 합세한데다,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던 허정감독의 장편데뷔작으로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럽다. 장르의 측면에서나, 내러티브의 측면에서나 영화는 미진함을 드러내며, 주제의 측면에서 보자면 심지어 반동적이다.

고급 커피전문점을 운영하는 성수(손현주)는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형의 아파트 관리인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형이 사라져 연락이 되지 않으니, 짐을 정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성수는 형이 살던 낡은 아파트를 찾는다. 철거 직전의 아파트를 둘러싼 동네 공기가 음험하더니, 차에서 기다리던 성수의 아내(전미선)와 두 아이들은 낯선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형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희(문정희)는 낯선 사람을 쫓아주고 성수네 가족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형에 대해 묻자, 형이 자신의 딸을 훔쳐보는 변태라며 성수네 가족을 내쫓는다. 성수는 출소 후 혼자 살던 형이 유산을 독식한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음을 알고 불안해한다. 또한 형의 아파트를 비롯해 여러 호의 현관에 이상한 표식이 적혀있음을 발견한다. 성수는 누군가 자신의 집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 느낌으로 불안해하던 차에 자신이 사는 고급 아파트 현관에도 똑같은 표식이 있음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는데....

◆ ‘아파트 호러’로서 공간 활용이 미진하다

영화 <숨바꼭질>은 도시괴담에서 출발하는 ‘아파트 호러’이다. ‘아파트 호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공간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영화들로, <소름><아파트><4인용 식탁><독><불신지옥> 등 나름 독자적인 계보를 지닌 장르이다. 아파트는 문을 닫고 들어가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힘든 폐쇄적인 공간이다. 또한 폐쇄된 공간들을 이어주는 엘리베이터나 복도에서 누군가를 마주치는 일은 두렵다. 그가 괴한인지 이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숨바꼭질>은 초반에 ‘아파트 호러’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다. 오프닝 시퀀스인 엘리베이터 장면은 꽤나 섬뜩한 공포를 안긴다. 화이버를 쓴 괴한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버티고 서 있는 장면만으로도 늦게 귀가하는 여성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의외의 대범함을 보이던 젊은 여성이 끝내 피살되는 장면도 선연한 날것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영화의 ‘아파트 호러’로서의 약발은 뒤로 갈수록 떨어진다.

<숨바꼭질>에 등장하는 낡은 아파트는 중정을 사이에 둔 독특한 구조이다. 사방으로 둘러 친 복도를 따라 건너편 사람들이 보이는 구조로, 복도를 따라 출몰하는 사람을 통해 공포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숨바꼭질>은 이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중정을 지닌 낡은 아파트 복도에서 우수수 추락사하던 장면으로 독특한 공포를 불러 일으켰던 <초능력자>와 비교해보면 특히 아쉽다. <소름>이 보여주었던 철거직전의 아파트가 품은 낡고 가난한 생활의 때를 통해 괴기스러움을 전달하지도 못하며, <불신지옥>이 보여주었던 아파트 건물 속의 감추어진 공간들을 적극 활용하지도 못한다.

오프닝 시퀀스 이후 <숨바꼭질>이 아파트라는 공간을 활용해 공포를 준 장면으로는 발코니가 옆집과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장면과,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사투를 벌이던 장면 정도이다. 방범을 위해 보안카드가 있어야만 열리게 되어 있는 문이 오히려 성수네 가족을 위협하는 장면은 안전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 다 봐도 앞의 장면들이 설명되지 않는다.

<숨바꼭질>이 ‘아파트 호러’로서 공간 활용이 미진하다는 단점은 부차적이다. 더 큰 문제는 영화를 다 보고나서도 초반의 흥미로운 장면들이 도무지 해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형의 아파트와 옆집이 발코니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누가 언제 왜 그렇게 했다는 것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굳이 이해를 하자면, 두 집을 헐어서 한 집으로 넓게 쓰고 있는 주희는 옆집 사람을 죽이고 집을 확장했던 것인데, 그가 성수의 형도 죽이고 우발적으로 옆집 여자도 죽이고 난 뒤, 그 공간을 발코니를 통해 오가며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왜? 주희가 성수의 형을 죽인 이유는 무엇일까? 주희는 무엇 때문에 이들의 아파트를 오가며 공간을 점유한 걸까? (이 대목이 영화의 주제와 관계되는데, 이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중반에 등장해 긴장감을 끌고 가던 남자는 오프닝시퀀스에서 죽은 여자의 애인으로 밝혀진다. 입은 걸어도 사무직 노동자처럼 보였던 여성이 하층민으로 보이는 남자와 연인관계였다는 것이 선뜻 믿어지는가? 위험을 인지한 성수와 처가 경찰이나 경비를 부르지 않고 기필코 위험에 빠지는 것이 이해되는가? 영화는 초중반에 긴장을 고조시키는 몇몇 장면들을 배치하며 그럴듯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연결지점이 매끄럽지 못하고,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서사에 구멍이 숭숭 뚫리며 전체적인 그림이 맞추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시작과 마지막을 하나의 내레이션으로 처리한다. “다른 사람의 집에 몰래 숨어사는 사람이 있대”라는 아이의 말은 묘한 울림을 지닌다. 아이의 첫 말은 마치 <빈집>처럼, 남의 집에 깃들어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마치 <화차>에서처럼 누군가를 죽이고 그에게 빼앗은 아이디로 그의 행세를 하며 사는 사람의 이야기로 들린다. 중의적인 이 말을 주희의 딸이 한다는 점이 더 섬뜩하게 느껴지지만, <숨바꼭질>은 <빈집>이나 <화차>가 보여주었던 독특한 문제의식을 심화시킨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숨바꼭질>은 <빈집>이나 <화차>가 개진했던 문제의식에 비스듬히 기댄 채, 위의 작품들과 완전히 반대되는 정치성을 보이는 영화이다.



◆ 노숙자, 빈민, 하우스푸어가 중산층 가정을 위협한다고?

<숨바꼭질>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의 무의식이 품고 있는 정치성이다. 영화는 지나치게 깔끔한 성수가 매장 앞의 노숙자를 보고 불결함을 느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성수는 노숙자가 집안을 더럽히는 악몽을 꾼다. 외제차를 타고 지방의 허름한 동네에 간 성수네 가족은 이유 없는 봉변을 당하는데, 그들을 위협한 것은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어 보이는 동네 청년이다. 성수의 딸은 주희의 딸에게 노골적으로 더럽다고 말한다. 주희의 딸은 안대를 하고 나오는데, (감독에게 “아이가 반은 보고 반은 못 보는 상황을 그린 것인가”라고 묻자) 감독은 전염성 질환을 연상시키는 설정이라고 친절하게 답했다.

성수의 가족은 깨끗함과 부유함으로 그려진다. 그들을 위협하는 자들은 더럽고 가난하다. 외부의 가난한 자들에게 공격당하는 중산층 가족. 그들의 조바심은 고급 아파트의 보안장치와 배달원에 대한 경계심으로 표출된다. 만약 <숨바꼭질>이 가난한 외부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스스로 공포에 미쳐가는 중산층 정상가족의 모습을 서늘하게 담았더라면 꽤 의미 있는 영화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가난한 외부인들에게 공포심을 느끼는 중산층 가족에게 감정이입을 유도하며, 가난한 타자들을 악으로 돌린다.



성수의 결벽증은 형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듯하다. 성수는 입양아였고, 친자인 형은 피부병을 앓았다. 성수는 형의 성범죄를 거짓 증언하여 부모의 신임을 빼앗고, 유산을 독식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셈이다. 결국 성수는 중산층이 되고, 형은 사회로부터 배제된다. 성수가 노숙인을 보고 공포를 느끼는 것은 노숙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형이 자신에게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죄의식 때문이다.

이는 하네케 감독의 영화 <히든>의 숨은 사연이 뒤집힌 판본이다. <히든>에서 프랑스 중산층 출신인 주인공은 어린 시절 알제리에서 입양된 형을 음해하여 쫓아낸다. 성인이 되어 형이 찾아오고, 주인공은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죄의식과 마주하지 않는다. <히든>은 1세계인들이 자신이 박해했던 3세계인들을 오히려 공포의 대상으로 믿어버리는 역설을 보여주는 성찰적인 텍스트이다.

<숨바꼭질>에서 가해자는 친자를 밀어낸 입양아이다. 이 자체가 외부의 이질적인 존재를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설정이다. 즉 ‘굴러온 돌’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숨바꼭질>은 이 숨겨진 이야기를 전체 서사 안에 녹여내지도 못하고, 어느 순간 슬그머니 폐기한다. 마치 자신이 무슨 말을 꺼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영화는 복잡하고 은유적인 형의 이야기에서 발을 빼서 단순하고 직설적인 주희의 이야기로 옮겨 탄다. 주희는 가난하면서도 중산층의 욕망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딸의 영어교육과 아파트에 올인 한다. (앞에 제기했던 질문, ‘주희는 왜 낡은 아파트를 여러 채 점유했을까?’ 에 대한 대답은 ‘그는 아파트에 미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고급한 것을 탐하고, 억지로 빼앗은 뒤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 주희의 딸도 성수의 휴대폰 고리를 자기 것이며 악을 쓴다. 어울리지도 않는 성수 처의 코트를 빼앗아 입은 주희는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심지어 애초에 자기 것도 아닌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타죽는 주희의 모습은 해괴하다.



<숨바꼭질>에서 최종적인 악인, 즉 가장 공포스럽고 흉물스러운 존재는 능력도 안 되면서 중산층을 욕망하며 자기도 가지겠다고 ‘생떼거리’를 쓰는(용산구청에 나붙었던 플래카드의 문구) 가난하고 촌스러운 자들이다. 돈도 없으면서 집을 탐하다 하우스푸어가 된 자들, 능력도 없으면서 사교육을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사람들이 가장 무섭고 끔찍하며 사회의 안전을 해치는 족속이라는 것이다. 성수는 주희의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간파하고, 이를 이용해 회유한 뒤 불태워 죽인다. <숨바꼭질>은 중산층 상부가 자신들에게 따라붙으려는 중산층 하부와 서민들에게 윤리적·미학적 비난을 퍼부으며, 따돌리고 밀어내어 자멸시키는 계급적 무의식을 반영한 영화이다.

마침내 우아하고 새치름한 중산층 마나님인 성수의 처가 촌스럽고 우악스러운 주희를 내려친다. 뒤늦게 도착한 성수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온한 싱글맘 주희의 숨통을 끊어 처자식을 구해낸다. 객석에선 환호가 터진다. 객석을 중산층 정상가족의 무의식으로 대동단결시킨 영화적 힘에 감탄해야 할지, 반동적 허위의식에 혀를 차야 할지 아련해진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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