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 이후 10년, 퓨전사극에 미래는 있나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3년 퓨전사극의 기반이 될 두 편의 사극 작품이 연달아 방영되었다. MBC의 <다모>와 <대장금>은 기존의 사극에서 확실하게 벗어난 드라마였다. 두 작품 모두 중심인물이 왕이나 장군, 혹은 궁중암투의 대가들인 왕비와 후궁들이 아니었다. 역사가 늘 기록하던 중심인물들은 조연급으로 밀려나고 역사가 주목하지 않았던 인물들에 오히려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졌다.

그렇게 조선시대의 여형사인 다모 채옥이 태어났고 수라간 나인에서 의녀가 된 장금이란 인물이 널리 알려졌다. 중심인물의 행적이 사료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덕에 이 사극들은 오히려 다양한 이야기의 변주가 가능해졌다. 그래서 <다모>에서는 무협과 멜로가 절절하게 엮이는 이야기가 탄생했다. <대장금>은 궁궐을 배경으로 음식과 의학 그리고 인간의 삶을 엮어나가면서 오히려 기존의 사극보다 풍성한 장면과 이야기를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이후 10년 동안 사극은 과거의 역사를 정면으로 다룬 전통사극과 과거의 역사에서 뼈대만 가져올 뿐 많은 상상력이 가미된 퓨전사극이 공존했다. 하지만 2013년 현재 전통사극은 이미 시청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 같다. 퓨전사극의 경우 2011년과 2012년이 정점이었다.

세종대왕의 인간적인 면과 한글 창제의 비밀을 엮었던 <뿌리 깊은 나무>는 퓨전사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작품성이 무엇인지 알려준 드라마였다. <해를 품은 달>의 경우에는 작품성 면에서 많은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지만 어쨌든 퓨전사극에서만 가능한 액받이 멜로로 시청률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 tvN에서 방영된 <인현왕후의 남자>는 역사물과 타임워프물은 물론 멜로의 비중까지 적절하게 섞어낸 맛있는 퓨전요리 같은 퓨전사극이었다.



하지만 2013년 현재의 퓨전사극들은 사극이 가져야만 하는 미덕을 모두 내다버린 것 같다. 아니면 그 미덕을 흉내만 내고 있거나. 드라마 상에서 사극의 시대는 지금 현재가 아니다. 사극의 사건들은 현재의 것보다 더 무거우며 인물들은 현대물에 비해 더 심각하고 더 절실하고 때론 더 도덕적이다. 현대물에서는 따분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이런 면들이 사극에서는 오히려 매력적인 미덕으로 살아난다. 거기에 더해 현대물에서는 보여주기 힘든 화려한 장면들 역시 사극의 묘미다. 2013년의 퓨전사극은 2003년에 비해 화려함이라는 면에서는 일취월장했지만 정작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매력은 퇴보한 느낌이다.

현재 방영되는 대표적인 퓨전사극은 MBC의 <불의 여신 정이>와 KBS의 <칼과 꽃>이다. 그리고 SBS의 경우에는 <대풍수>와 <장옥정, 사랑에 살다>를 올해 상반기에 방영했다. 이 퓨전사극들은 화려한 외향에 비해서는 실망스러운 결과물을 보여주는 중이거나 보여줬다.

각 작품들의 단점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불의 여신 정이>는 안일하다. <대풍수>는 허술하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경박하다. <칼과 꽃>은 공허다.

<불의 여신 정이>는 <대장금>과 <동이>, <마의> 등등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MBC표 퓨전사극이다. 마음씨도 좋고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출신은 미천한 인물이 입궐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성공하는 이야기다. 사실 MBC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시대나 고려시대까지 거슬러가도 민담이나 전설 등에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구조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누구나 좋아하는 이야기이기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 여신 정이>는 현재 지지부진하다. 익숙한 구조를 신선하게 포장할 의지가 이 작품에는 전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쓸데없는 말장난이나 뜬금없는 장면 전개는 MBC표 퓨전사극이 지닌 전래동화 같은 분위기마저 엉망으로 만든다. 여주인공 정이의 성격 역시 과거 MBC표 퓨전사극의 여주인공에 비해 그저 그런 소년만화 여주인공만 같을 뿐 매력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다.

한편 SBS <대풍수>는 풍수지리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역사를 엮는 대단한 상상력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상상력을 따라잡기에는 이야기의 방식이 너무 허술했다. 같은 방송사의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장옥정을 어떻게든 사랑에 살게 하기 위해 사극이 지니고 있는 품위 자체를 아예 날려버린 경우였다.

반면 KBS <칼과 꽃>은 퓨전사극치고는 엄청난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다. 고구려 연무왕의 딸 무영과 연개소문의 서자인 연충의 사랑 이야기다. 거기에 당시 시대의 피 튀기는 권력다툼이 비장하게 그려진다. 주연급 인물인 최민수, 김영철, 엄태웅, 김옥빈 모두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 무게감 했던 배우들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 묵직한 이야기를 초반부에 너무 은유적으로 풀었다. 예술작품 같은 장면 장면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함축적인 대사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의 무게감을 실어주는 장치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뚝뚝 끊어지는 대사를 시를 읊듯 말하는 이 드라마에 가까이 다가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칼과 꽃>은 퓨전사극이지 애절한 사랑노래의 초대형 뮤직비디오는 아니잖은가? 그렇기에 이 드라마의 주요 줄거리들은 맥락이 파악되기도 전에 공허하게 흩어지기 일쑤다. 드라마란 특성에 맞게 조금만 더 친절하게 이야기를 풀었다면 빛이 났을 연무와 연충 같은 캐릭터가 아쉬운 작품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퓨전사극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올해 퓨전사극 중 꽤 괜찮은 작품이었던 KBS <천명> 역시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받지 못한 걸 보면 안타깝게도 퓨전사극의 시대는 이미 보름달을 지나 그믐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 건 아닐까? 더 이상 쫄깃쫄깃한 찰떡이 아닌 딱딱하게 굳은 인절미 같은 그런 드라마로. 더구나 PPL 협찬을 받기도 힘들면서 제작비까지 많이 드는 사극이 제작사의 입장에서도 꺼려지지 않을까 싶다. 물론 PPL 제품인 한방샴푸로 궁중 여인들이 머리를 감고 선비들이 간밤의 숙취를 풀기위해 헛개나무차를 마시는 괴상한 퓨전사극이 방영될 날이 언젠가 닥쳐올 수도 있겠지만.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SBS,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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