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세대에서 엄마세대로, 신은경 성장 스토리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1994년 빅히트한 MBC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는 각기 다른 캐릭터를 지닌 여대생 셋이 등장한다. 바로 다슬과 미주와 수진이다. 이상아가 연기한 미주는 공주처럼 예쁘고 발랄한 여자아이고 심은하를 스타덤으로 올려놓은 다슬은 눈빛부터 목소리까지 청순한 여자아이다. 미주와 다슬 모두 대한민국 청춘물 드라마의 단골 여주인공인 공주파와 청순파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양대 산맥과 승부도 나지 않을 것 같은 지점에 무명배우 신은경이 연기한 수진이란 인물이 끼어든다. 수진은 활발하고 보이시한 성격에 남학생들과 친구처럼 잘 통하는 그런 캐릭터다. 수진의 캐릭터 역시 많은 청춘물에서 좋은 친구지만 연애는 잘 못하고 소주만 잘 마시는 그런 조연급의 인물로 많이 쓰였다. 어쩌면 <마지막 승부>의 작가 역시 수진이란 인물을 그렇게 설정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 승부>의 회가 거듭될수록 수진은 여주인공 둘보다 종종 더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건 오롯이 수진을 연기한 젊고 당찬 풋내기 신은경의 힘이었다. 신은경은 수진이 조연으로 묻히지 않도록 캐릭터를 스스로 만들어나갔다. 수진의 옷차림은 공주 같지도 여성스럽지도 않았지만 어깨에 걸친 망토나 머리에 쓴 모자 같은 소품은 눈에 띄게 독특한데다 멋스러웠다. 상대방을 쏘아보듯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이나 어금니 꽉 깨물고 말하는 말투로 자기주장을 탈탈 털어내는 모습 역시 건방지기보다 쿨해 보였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었다.

이후 무명이었던 신은경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시대를 만난다. 마지막 승부에서도 그렇게 길지는 않았던 머리를 더 짧게 자르고 선머슴 레지던트로 등장한 MBC 드라마 <종합병원>은 94년 많은 인기를 끌었고 그녀가 면도 하는 여자로 분한 CF 역시 화제였다. 언론에서는 그 시대의 젊은이들을 X세대라고 불렀고 신은경은 유니섹스 모드가 유행하던 X세대의 대표주자쯤으로 여겨졌다. 보이시하고 당당한 여주인공 캐릭터가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았던 적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한 세대의 대표주자라는 타이틀이 한 여배우의 얼굴로 떠오르는 시기 역시 아마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X세대라는 말의 공허함만큼이나 신은경의 인기 역시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어쩌면 X세대는 대한민국에서 IMF 이전 아주 짧은 순간 반짝반짝 빛났던 그 시기를 지칭하는 하나의 은유인지도 모르겠다. 이후 2천 년대 초반 신은경은 자신의 보이시한 이미지가 도드라지는 <조폭마누라>나 형사물 영화에서 주연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2천 년대 중반 그녀는 <마지막 승부>와 <종합병원>으로 자신이 반짝반짝 빛났던 드라마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드라마 컴백 이후 신은경은 예전 같지는 않았다.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녀의 연기는 어딘지 기죽어 보였다. 더구나 당당한 맏딸을 주로 그리는 김수현 작가의 <엄마가 뿔났다>에서도 신은경이 연기한 맏딸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신은경 연기패턴의 아쉬운 부분, 극적인 인물 연기에는 강하지만 일상적이고 섬세하고 치밀한 인물심리를 묘사할 때는 다소 삐걱거리는 단점이 더 도드라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애리 김희애 배종옥처럼 깍쟁이 분위기를 풍기는 여배우와 어울리는 김수현 작가와 배우 신은경은 맞지 않는 짝이었다.



아니, 신은경은 원래부터 여성작가보다 남성작가들과 합이 잘 맞는 편이었다. <마지막 승부>도 <종합병원>도 모두 남성작가들의 작품이었다. 그녀는 남성들이 묘사하는 남성들의 세계에서 악착같이 버텨가는 여성 캐릭터를 연기할 때 가장 도드라졌다. 그리고 안방극장에 돌아온 신은경은 남성작가 정하연이 만든 비틀린 <욕망의 불꽃> 윤나영을 통해 다시금 자신의 화려한 불꽃을 보여준다.

윤나영은 남성작가가 아니면 쓰기 힘든 캐릭터다. 윤나영은 남성작가의 거울에 비친 걸신들린 욕망과 붕괴된 자아와 집착적인 모성애를 지닌 일그러진 여성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토록 일그러진 유형의 인물들은 드라마 안에서 대부분 극적인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신은경은 <욕망의 불꽃>을 통해 오롯이 윤나영을 연기했다. 대중들이 더 이상 추억의 X세대 스타 신은경이 아니라 무서운 엄마세대의 여인 윤나영을 연기한 신은경을 기억하도록.



그런 까닭에 2년 후 같은 시간대인 주말 밤 10시에 MBC에서 방영되는 <스캔들>에 그녀가 등장했을 때 아마 시청자들은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스캔들>에서 그녀의 이름은 윤화영, 윤나영과 글자 하나 틀릴 뿐이고 모성애 때문에 울부짖는 것도 마찬가지였으나 성격은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여성작가 배유미는 드라마 <스캔들>에서 이제 엄마세대가 된 신은경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선물해 주었다. 윤화영은 윤나영처럼 일그러진 여성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든 올바르게 끌고 가려는 강한 여성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가짜 아들을 만들어내게 하고 그로 인해 고통 받게 함으로써 <스캔들>은 자칫 심심해졌을 법한 윤화영에게 극적인 힘을 부여했다.

<스캔들>에서 유괴된 진짜 아들과 남편 장태하를 속이고 친아들로 위장해 기른 가짜 아들 사이에서 윤화영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시청자를 파고든다. 그리고 신은경은 어미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고 연기한다. X세대의 반짝 스캔들인줄 알았던 그녀가 어느새 엄마세대의 내면까지 건드리는 배우로 성장하는 순간의 드라마가 <스캔들>엔 존재하는 셈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영화 <조폭마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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