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효진·김규리, 풋풋한 감초에서 명품 여배우로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1999년 12월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공포영화 <여고괴담>의 2탄 <여고괴담2-메멘토 모리>가 개봉한다. 이 영화는 세기말을 지나 새 밀레니엄의 첫 달에도 극장에서 상영된다. 밀레니엄의 시작은 암울하기보다는 활기찼다. 지구 종말은 오지 않았고 Y2K도 없었다. 그리고 무겁고 어두운 영화 <여고괴담2-메멘토 모리>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다.

흥행해 실패하긴 했지만 <여고괴담2-메멘토 모리>는 기억할 만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교복 입은 여학생 귀신이 피눈물을 흘리며 다가오는 장면으로 승부를 거는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의 공포는 귀신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세계에 속해 있다. 꽉 짜인 계획표 같은 일정 속 여고생들의 삶, 그 안에서 섬세하게 피어오르다가 시드는 여고생들의 복잡 미묘한 감정들. 그리고 현실세계를 감당하지 못해 현실세계를 놓아버린 한 명의 여고생.

영화는 두 여주인공들의 교환일기를 통해 매우 무겁지만 시간이 뒤죽박죽 뒤섞이면서 숨이 가쁘게 흘러간다. 안타깝게도 대중들은 지난 시대와 새로운 시대를 가로지르는 이 복잡하고 세련됐지만 음울한 영화를 그다지 즐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물론 이 <여고괴담2-메멘토 모리>에 잔재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90년대 말 유행하던 <쎄씨>, <키키>, <신디 더 퍼키>, <유행통신> 등등의 패션잡지 모델 출신인 신인배우 공효진과 김규리(당시 김민선)가 이 감초의 역할을 맡았다.



둥그스름한 짧은 머리에 까무잡잡한 얼굴의 공효진은 정신사납고 시끄러운 여고생을 연기한다. 영화 안에서 납작한 가슴 때문에 ‘절벽’이라 놀림 받는 이 여고생은 영화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잠시나마 밝게 띄워준다. 그리고 후반부 영화 속의 여고가 공포 분위기에 휩싸일 때 이 소녀는 화장실에 앉아 두려움에 떨며 엉엉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은 연기가 아니라 정말 겁에 질린 여고생의 ‘엉엉’으로 보였다. 그때부터가 어쩌면 공효진의 연기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움을 불러오는 연기의 시작이었는지 모르겠다.

한편 KBS 드라마 <학교>로 본격적인 연기를 시작한 김규리는 <여고괴담2-메멘토 모리>에서 흐릿한 서사의 축을 혼자 끌어가는 역할을 맡는다. 여주인공 둘의 비밀일기를 파헤치고 그녀들의 감정에 공감해가며 이 사건의 전후를 살펴본다. 여고생 탐정과도 같은 이 역할은 이후 김규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늘 보여주고 싶어했던 모습의 원형이었다. CF모델에 어울리는 예쁘장하고 사랑스러운 마스크와 달리 그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늘 강하고 똑부러지며 때론 악하기까지 한 인물에 손을 대었다.



<여고괴담2-메멘토 모리> 이후 그녀들은 새 밀레니엄의 봄에 한 달 간격으로 잡지 <런치박스>의 표지모델로 등장한다. 2천 년대 초반은 <페이퍼>를 비롯한 새로운 문화잡지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던 때였다. <런치박스> 역시 그런 잡지들 중 하나였는데 <페이퍼>가 깜찍한 운동화를 신고 톡톡캔디처럼 걷는 소년소녀들을 위한 잡지라면 <런치박스>는 펑크족 개목걸이를 하고 얼굴에는 피어싱 서너 개에 질질 끌리는 힙합바지로 보도블록을 쓸고 다닐 법한 소년소녀들을 위한 문화잡지였다. 이 잡지는 당시에는 파격적이면서 유쾌한 화보를 종종 실었는데 표지에서도 그런 시도는 이어졌다.

김규리와 공효진이 <런치박스>의 표지모델로 나선 것은 각각 4월과 5월이었다. 밝은 니트원피스를 입은 김규리는 표정만으로 극적이고 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고 분홍 기타를 둘러멘 공효진은 다른 어떤 여성 모델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밝게 웃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런치박스> 이후 두 사람은 각기 다른 타입의 연기를 하는 배우의 길을 걷는다. 김규리는 잡지 및 CF모델 출신이란 꼬리표가 무색하게 드라마에 어울리는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유리구두>에서는 악에서 악으로 끝나는 악녀 승희를 제대로 보여준다.



공효진은 김규리와는 다른, 아니 기존의 여배우들과는 다른 지점의 길을 걷는다. 드라마에서 그녀는 눈부시게 예쁘지도 않고 불량하지만 그래서 더 싱싱하게 느껴지는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투덜거리고 구시렁거려 가끔은 연기가 아니라 실생활의 모습 같지만 그 활력 넘치는 모습이 오히려 드라마 상에서 더 눈길을 끌었다. <화려한 시절>의 불량한 버스안내양이 그랬고 <네 멋대로 해라>의 성깔 있지만 사랑 밖에 모르는 치어리더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눈사람>을 거치면서 공효진은 이슬비만 맞아도 비실비실 쓰러질 것 같은 멜로 여주인공이 아닌 팔팔한 멜로 여주인공을 만들어냈고 <파스타>에서는 ‘공블리’라는 별명까지 얻어냈다.

2013년, <여고괴담>과 <런치박스>를 통해 비슷하게 시작했던 두 사람은 현재 SBS의 <주군의 태양>과 MBC의 <스캔들>에 출연중이다. 공효진은 전매특허가 된 ‘공블리’ 연기가 다소 식상하다는 평도 있으나 그래도 케이블채널에서나 등장할 법한 눈 퀭하고 신들린(?) 여자가 이렇게 사랑스럽기는 쉽지가 않은 법이다.



그간 다소 침체기였던 김규리 역시 <스캔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드러낸다. 이 드라마에서 김규리는 자신의 배다른 남동생과 연인이 될 뻔했던 장태하의 딸 장주하를 연기한다. 많은 톱배우들과 비중 높은 또래 남자배우들과 함께 하고 있지만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김규리는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묻히지 않고 자신의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건 상당히 애매하면서도 쉽지 않을 지점일 텐데 그녀는 그것을 이번 드라마에서 능숙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게 <스캔들>에서 장주하가 언제나 다부지고 깐깐한 모습을 보여도 극중 남자주인공인 은중의 상대역인 아미보다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유다.

사랑스러워 보이기 위해 깜찍한 표정만 짓던 패션잡지 속 그녀들이 <여고괴담> 지나 <런치박스> 너머 어느새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랑스러워 보이는 방법을 터득한 셈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런치박스>, <여고괴담2>, <주군의 태양>, <파스타>,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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