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네 식구들’, 막장이 짜도 너무 짜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갱도를 의미하는 막장이 과연 막장드라마의 그 막장이 맞는 걸까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막장드라마의 막장은 허드레로 먹으려고 간단하게 만든 된장을 뜻하는 그 막장에 더 가까우리란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드라마의 작가들은 막힌 갱도 막장이 은유하는 갈 곳 없이 막다른 삶을 다루는 데 중점을 두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륜, 출생의 비밀, 내추럴 본 지랄탄 성격의 인물 등등을 섞은 막장 양념으로 사람들의 공감각적 입맛을 잡아끄는 데 힘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드라마가 가진 꿀맛의 비밀인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막장에 버무려진 우리네 삶의 맛.

KBS 주말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의 작가 문영남은 적절한 막장 양념 손맛 재주로 오랫동안 장수해 온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일일드라마, 미니시리즈, 주말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에서 성공한 흔치 않은 작가다.

그녀가 막장 양념의 손맛으로 처음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은 드라마는 바로 KBS1 일일드라마 <바람은 불어도>였다. 90년대 중반에 방영된 이 드라마는 55%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 <바람은 불어도>는 기존의 일일드라마처럼 따뜻하고 훈훈하지만 밋밋한 일일극은 아니었다. 당시 문영남 작가는 구수하고 때로는 상스러운 대사를 통해 인물들의 맛깔 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특히 그녀는 언뜻 보기에 밉상이고 이기적인 인물을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신기하게도 문영남 작가의 밉상은 짜증나는 악역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인물이 지닌 인간적인 매력 때문에 드라마에 빠지게 되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그의 드라마 속 밉상들은 미움을 받는 대신 어느새 귀여움을 받거나 안쓰러워 혀를 끌끌 차게 만드는 인물로 변해갔다. <바람은 불어도>에서 밉상 시어머니를 연기한 나문희가 그랬고, <정 때문에> 얄미운 소실 할머니를 연기한 강부자가 그랬고 <장밋빛 인생>에서 불륜을 저지른 뻔뻔한 남자를 연기한 손현주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고 최진실이 여주인공 맹순을 연기한 KBS 미니시리즈 <장밋빛 인생>은 문영남 작가에게 최고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부수수한 머리에 생활에 찌든 맹순을 연기한 고 최진실의 연기 변신이 아니더라도 이 드라마는 다시 한 번 눈여겨 볼 미니시리즈다. 빤한 막장 양념에 버무린 신파 이야기로 어떻게 작가가 사람들의 눈물을 듬뿍듬뿍 뽑아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이 드라마에서 암에 걸린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된 맹순이 친어머니와 처음 만나는 장면은 대단했다. 친어머니로 우정 출연한 김해숙이 술을 마시고 바닥에 누워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장면은 진저리치게 신파이면서도 사람들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노골적인 통곡의 장면을 아마 다른 작가들이라면 ‘촌스럽다’고 쓰지 않을 게 틀림없다. 김수현 작가의 배우라면 눈물을 흘리더라도 긴 대사를 호흡이 끊어지지 않게 눈 똑바로 뜨면서 고상하게 내뱉을 것이 틀림없다. 임성한 작가의 배우들이라면 눈물 쏟는 장면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거침없는 양념이 더 추가될 것이 뻔하다. 예를 들면 최근 <오로라 공주>에서 마마의 둘째누나 미몽이 보여준 통곡하며 자식 끌어안고, 통곡하며 상대방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통곡하며 핸드백 던져 상대방 옆구리 맞추기 신공을 한 장면에 다 담아낸 그런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문영남 작가는 고상하게 포장하거나 이것저것 양념을 더하는 대신 이런 슬픔의 장면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최근 그녀의 작품인 <왕가네 식구들>에서 큰 사위를 연기하는 조성하가 운동장에 누워 가슴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우는 장면 역시 그러했다. 겉보기에 늘 단정하고 믿음직하고 책임감 있는 사내가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어린아이처럼 울어버리는 모습이라니.

이런 애틋한 장면이 등장하지만 사실 <왕가네 식구들>은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이 드라마에서 작가의 막장 양념은 짜도 너무 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차별을 보여주는 엄마 이앙금부터 밉상의 지존을 보여주는 큰딸 왕수박, 그리고 철도 없고 그다지 정도 안 가는 둘째 사위 허세달까지. 문영남의 과거 드라마에서 보여준 밉상들이 총출동했지만 어째 이번에는 쉽게 정감이 가지 않는다. 작가는 전작의 시청률 실패에 따른 조바심 때문인지 온갖 막장 양념을 더했으나 그걸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기분은 오히려 텁텁할 것만 같다.

더군다나 작가가 보여주는 입담 섞인 대사들이 예전에는 홈런이었지만 이제는 기껏해야 안타 아니면 파울볼의 느낌이 강하다.

“나 왕년에 미스코리아 나갔던 여자야.” 이 드라마에서 큰딸 왕수박이 종종 내뱉는 대사처럼 말 그대로 그건 왕년의 일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