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웃음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지는 연극 ‘터미널’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쉽게 빠져 나올 수 없게 만드는 긴장감과 설렘을 지닌 9차원적인 연극을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터미널의 대합실 의자에 앉아서 우연히 누군가의 사연을 엿듣는 기분이 이런 걸까. ‘피식’ 웃음을 터트리다가 어느 순간 공감의 미소를 흘리는가 싶더니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 누구나 가슴 속에 담아 둔 미완의 연극이, 새로운 극장의 문의 열릴 것 같아 기대감이 용솟음쳤다.

9개의 옴니버스 형식의 연극<터미널>(Terminal)은 기승전결을 갖춘 한 편의 연극 이상의 감정의 파도를 경험하게 했다. 게다가 60석의 아기자기한 객석과 아늑한 박스 모양의 무대는 친밀감을 불러일으켰다.

‘터미널’은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이 뒤엉켜 가장 높은 온도의 말과 몸짓이 오고 가는 곳이다. ‘터미널’이라는 그 공간 자체가 극작가이자 배우이자 연출가로서 기능을 담당하며 관객은 객석이 아닌 터미널의 대합실 의자에 앉아서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사건과 사고, 사연을 엿듣게 되는 탑승객으로서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터미널’을 배경으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써 내려간 연극 <터미널>(연출 전인철)이 지난 25일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개막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젊은 작가들 모임인 ‘창작집단 독’의 작가 9인(박춘근, 고재귀, 조정일, 김현우, 김태형, 유희경, 천정완, 조인숙, 임상미)이 같은 곳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는 우리 시대의 만남과 헤어짐에 관해 써 내려간 아홉 편의 짧은 우화이다. 총 아홉편의 작품 중 여섯 작품을 만나봤다.

조인숙 작가의 <소녀가 잃어버린 것>은 불의의 사고로 13년 만에 의식이 돌아온 여자가 옛 동창들을 만나 잃어버린 청춘의 그림자 앞에서 불안하게 서성거리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특별한 장치보다는 대사 안에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 호불호는 갈릴 수 있지만,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청춘을 현실적이면서도 포근하게 위로해주는 작품이다. 청춘의 추억만 되새기며 사는 건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그런 청춘의 시간을 훌쩍 건너뛰는 건 더 싱겁고 쓸쓸한 일이지 않나. 결국 세상을 살면서 가장 좋은 나이는 10대의 현재, 20대의 현재, 30대의 현재 매 순간이 아니었을까.



"인생은 제비뽑기와 같은 것. 딱 한번 뽑는 게 아닌 매순간 뽑은 결과의 합과 같은 것" 특히 이 대사는 <터미널>이란 작품을 위해 모인 작가, 스태프들 더 나아가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는 작품 같았다. <터미널>이란 작품 역시 개별 작품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닌, 아홉 작품 모두가 함께 엮어지고 관객의 감상평이 더해져 하나의 연극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김현우 작가의 1인극 <러브러브트레인>은 KTX의 새로운 상품인 ‘러브러브트레인’을 소재로 끌고 왔다. 이 작품은 빠르고 편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여행이 아닌, 여행지까지 가는 과정을 중시여기는 ‘여행의 개념을 바꾸는 여행’에 방점을 찍었다. 결정적인 사건을 향해 달리는 일반 연극들과는 다른 ‘SEEYA PLAY’의 <터미널>이 내건 정신과도 비슷하다. 열차의 기적 대신 교성이 울리는 러브러브트레인, 은밀한 웃음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지는 <터미널>의 매력이 여기에 있었다.

천정완 작가의 <소>와 고재귀 작가의 <터미널>은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터미널>은 시골총각과 베트남처녀가 알선업체 직원의 도움을 받아 결혼으로 가기까지 과정을 그렸다. 각 인물들의 심리를 단편영화 보듯 섬세하게 그려내 잔향이 강하다. 배우 우현주 김주완 이은의 존재감이 골고루 돋보였다. 전반과 후반 이야기를 좀 더 추가해 한 편의 연극으로도 만나고 싶어진 작품이다.

<소>는 ‘한 사람의 일생에 할 수 있는 노동에는 정해진 양이 있는데, 인간은 그 정해진 양을 넘기면 소가 된다’는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그렸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땀을 흘린 아버지는 늙은 소가 되어 우시장에 팔려가기 위해 형제의 손에 이끌려 역 앞으로 끌려 나온다.



두 작품 모두 사랑으로 이뤄져야 할 ‘결혼’과 ‘가족’이 돈을 주고 받는 상품으로 전락된 현실을 짧지만 강렬하게 담아냈다. 반은 사람, 반은 소의 형상을 한 ‘얼핏 소’의 모습을 리얼하게 무대로 불러낸 첫째 아들 이명행의 연기도 탁월했지만, 어둠 속에서 뒷모습만 내보인 채 간헐적으로 슬픈 소의 울음소리와 꼬리 흔들기를 보여준 아버지 역 배우 이창훈의 연기도 대단했다. 눈은 ‘얼핏 소’의 몸짓에 놀라고, 귀와 마음은 ‘딱 소’의 슬픔에 진저리쳤다.

유희경 작가의 <전하지 못한 인사> 외피는 두 남녀의 우정과 사랑 사이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불쑥’ 밉고, ‘불쑥’ 사라지고, ‘불쑥’ 보고 싶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고 통통 튀는 대사와 배우 이은, 이창훈의 찰떡궁합 연기로 관객을 집중시킨 점이 좋다.

박춘근 작가의 <은하철도999>는 ‘메텔’로 나선 배우 이명행의 깜짝 분장으로 호기심을 유발한 작품이다. 서울역에서 은하철도999를 기다리는 우체국 택배상자를 든 철이와 분홍색 여행가방을 끌고 나온 메텔을 주인공으로 실제와 환상을 오가는 연극이다. 만화보다 더 만화같고 연극보다 더 연극같은 작품이다. 관객의 머릿 속에서 말풍선은 계속 솟아오른다. 정욕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선 모두가 기다린 ‘은하철도999’가 더 이상 운행하지 않을까. 철이의 두 손에 든 박스 안에는 어떤 그리움이 들어있을까. 이 시대의 메텔은 광인이 된 노숙자였을까.

여섯 작품을 만나고 나니, 아직 만나지 못한 김태형 작가의 < Love so sweet >, 임상미 작가의 <동구와 재돌이>, 조정일 작가의 <나에게 쓰는 편지>가 너무도 궁금해진다. 11월 10일까지 용산구 프로젝트박스 시야.

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정다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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