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오동진의 영화일기] 지난 어린이날,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을 찾은 것은 순전히 착각때문이었다. 문래동하면 소규모 철강업체들이 군집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가로 유명한 동네다. 거기서 무슨 행사가 열린다고 들었고, 그게 영화제일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최근 코오롱, 그리고 패션지인 마리 끌레르와 일종의 영화펀드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문래동 행사에 마리 끌레르가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 역시 영화 일과 관계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면서 알았다. 내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았다는 것을. 이건 영화행사가 아니었다. 착각을 일으키게 된데는, 그 전에 내게 온 문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지 않은 탓이 컸다. 이제라도 돌아가? 하지만 돌아간다 한들, 1년중 가장 할 일이 없다는 어린이날이었다. 내친 김에 가보기로 했다.

낯선 풍경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정확한 캠페인명은 ‘Be an active natual – 도시농부 프로젝트’다. 문래동처럼, 도심 슬럼가 곳곳에 방치된 낡고 남루한 건물 옥상에 텃밭을 키우자는 것이다. 일종의 생활환경 운동인 셈인데 여성환경연대, 마리 끌레르 등이 이들의 후원단체다. 문래동에 살고 있는 아티스트들, 도시농업과 환경에 관심있는 사람들, 일부 지역민들 다수가 참여하고 있었다. 모두들 생기있고 유쾌한 표정들이다. 세상엔, 조금이라도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넘쳐날 정도는 아니지만 찾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을 조금이라도 관심있게 지켜보면 될 일이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근데 사실은 그게 가장 어렵다.

막 조성중인 옥상 텃밭 한 구석에서(다른 사람들은 일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넉살 좋게도) 비료 포대를 방석 삼아 텃밭 키트를 뒤집어 놓고 막걸리를 마셨다. 화가 김정헌, 성완경 선생 등이 오고 가며 한두잔씩 술잔을 기울였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다들 이런 술자리가 최고라고들 입을 모았다. 마치 농활에 나온 어린 대학생같은 마음이 됐다. 여러 얘기들이 오고 갔다. 환경과 생태, 우리가 잘 사는 법, 미술과 영화 그리고 영화제 얘기까지. 물론 정치와 사회에 대한 주제는 병풍처럼 둘러처졌다. 그건 이런 자리에선 낯부끄러운 화두에 불과하게 된다.

영화는, 이렇게 영화밖 세상 속으로 들어와 보면, 사실 한줌의 ‘세력’에 불과하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영화 안에 있을 때면 서로 머리를 쥐어 뜯으며 내가 잘났네, 네가 잘났네 하지만 영화는 그동안 세상을 바꾸지 못해 왔다. 영화가 세상을 바꾸려면 아직 한참을 노력해야만 한다.

DMZ영화제가 부산국제영화제와 MOU를 체결했다. 지난 5월 3일의 일이다. DMZ영화제는 경기도 일원에서 열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제다. 올해로 3회째다. 연혁은 짧지만 국내 유일의 다큐멘터리 영화제라는 점에서 기대치가 높다. 위원장인 배우 출신의 조재현씨가 물심양면으로 영화제를 위해 뛰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몇해 더 잘 하면 일본의 ‘야마가타 영화제’처럼 될 것이다.



당초 DMZ영화제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웬지 ‘우파보수’ 색채의 행사가 되지 않을까하는 선입견이 작동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제는 오히려 좌와 우를 자유롭게 오가며 독특한 행사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 해 이 영화제의 한국 경쟁부문 최우수 작품상은 용산참사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 <용산 남일당 이야기>였다. DMZ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은 경기도의 김문수 도지사다. 그는 오른쪽에서도 가장 오른쪽에 가있는 인물이다. <용산 남일당 이야기>는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셈이다. 영화제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게 또 영화제를 만들고,보고,즐기는 이유다.

문제는 이런 작은 영화제들이 여전히 목소리가 작다는 데에 있다. 인지도는 높지만 활용도는 아직 그리 높지 않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국제청소년영화제, 환경영화제 등등, 이른바 군소영화제들이 갖는 한계다. DMZ-부산영화제가 연대의 틀을 갖춘 것은 그런 면에서 의미가 크다. 부산국제영화제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를 대표하는 가장 큰 영화제다. 어떻게 보면 국내 영화제들로서는 핵우산같은 존재다. 세상이 소통하는 방식은 늘 큰 것과 작은 것, 중심과 지역, 다수와 소수가 어떻게 공존의 틀을 갖느냐 하는데서 찾아진다. 거기에 비밀의 열쇠가 있다. 그 시작은 작은 것을 어떻게 잘 가꿀 것인가에서부터다. 부산영화제가 잘되려면 DMZ나 환경, 제천영화제 등등 작은 영화제들이 생명력을 발산시킬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이번 연대는 DMZ가 부산영화제에 손을 내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산이 DMZ영화제에 손을 내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쉬운 건 오히려 부산영화제일 수 있다.

그런 등등의 생각은 영화제가 아니라 영화를 생각해도 마찬가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멀티플렉스에 걸리는 대규모 상업영화들이 더 크게, 더 많이 성공하는 길은 그 시장을 떠받치는 작은 영화들, 독립영화들, 예술영화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야 한다. 할리우드의 메이저 배급사들인 워너나 20세기 폭스 등등이 각각 ‘워너 인디펜던트’나 ‘폭스 서치라이트’같은 회사를 만들며 군소영화의 배급에까지 돈을 대는 이유는 그 시장까지 장악하겠다는 의도보다는 그 시장이 살아야만 자신들도 계속해서 생존할 수 있다는, 일종의 ‘공생 논리’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영화, 작은 영화제들이 잘 돼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그때문이다.

문래동의 작은 텃밭 가꾸기 운동은 그런 측면에서 우리사회문화 여러 곳에 유의미한 징표를 던진다. 세상사는 한결같이 이것 저것이 연결된다. 모든 일은 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다. 우연히 찾게 된 한 지역행사가 영화에 관한 단상을 이것저것 일깨운다. 그것 참, 신기하고 반가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텃밭 가꾸기 행사, 도시농부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영화제도 계속된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모두들 언젠가 한 자리에서 만날 것이다. 그 꿈같은 미래를 기다릴 뿐이다.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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