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누나’ 김희애, 잡식소녀에 잘 어울리는 이유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1980년대에 KBS 일일연속극 <여심>으로 스타덤에 오른 김희애에게는 앳된 시절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데뷔 때부터 모든 방송영역에서 노련한 모습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중후반 그녀는 다양한 방송영역에서 활동했다. 우선 드라마로는 MBC 주말연속극인 <내일 잊으리>를 비롯해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에서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십대 후반은 되었을 법한 여성들을 연기했다. 더군다나 그 여성 캐릭터들은 남자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인물이거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려는 주체적인 인물들이었다. 미소 한 번 쉽게 짓지 않는 이 심각한 여주인공을 연기하는 그녀였지만 허점을 찾아보기란 힘들었다.

한편 김희애는 그 무렵 라디오DJ와 쇼 프로그램 MC로도 활약한다. 심야라디오인 <김희애의 인기가요>에서 흘러나오던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생생하다. 이십대 초반의 DJ가 진행하는 라디오라고 해서 1999년 비슷한 나이에 라디오를 진행했던 <이정현의 클릭1020> 같은 시끌벅적한 방송을 떠올리면 안 된다. 당시 그녀의 목소리는 아나운서와 흡사할 만큼 심야방송에 어울리는 지극히 절제되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MBC 간판 쇼 프로그램인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동 MC였던 이덕화가 더 방정맞아 보일 정도로 그녀의 진행솜씨는 매끄럽고 차분했다.

이 무렵 그녀는 드라마와 방송진행에 이어 히트곡도 한 곡 가지게 된다. 바로 전영록이 작사 작곡한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노래였다. 그녀의 빼어난 노래 솜씨 때문인지 이 노래는 당시 꽤 히트를 하게 된다. 그 덕에 그녀는 당시 순위 프로그램인 <가요톱10>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면 탤런트, MC에 이어 가수의 영역으로 TV에 진출하는 셈이었으나 방송에 등장한 그녀의 모습은 화려한 만능엔터테이너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기 거의 없는 얼굴로 묵묵히 서서 노래만 불렀다. 대본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치 피곤한 일은 없다는 듯.



그래서인지 1990년대까지 김희애의 이미지는 친숙했지만 친근하지는 않았다. 그건 신비주의와는 다른 맥락이었다. 사실 그 시절 김희애만큼 텔레비전에 많이 노출된 여배우는 없었다. 각종 생활용품 CF에서조차 종종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배우들과 달리 김희애는 드라마나 쇼에서의 자신의 연기나 역할에 충실할 뿐 스타로서 자신의 모습은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대표작인 <아들과 딸>의 목도리로 온몸을 칭칭 감은 후남이처럼 진짜 자신의 모습은 보호하는 듯한 그런 이미지였다.

결혼 이후 방송활동을 중단하고 다시 배우로 돌아오면서 그녀의 이미지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컴백작인 일일드라마 <하나뿐인 당신>이나 <아내>에서의 김희애는 이미 흘러간 여배우의 인상이 더 강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연기한 일일연속극은 지지부진했으며 <아내>에서는 김희애보다 오히려 함께 연기한 가수 출신의 연기자 엄정화가 더 빛났다.

이런 김희애에게 새로운 연기생명을 준 건 바로 전성기 시절 그녀를 한 번도 기용하지 않았던 김수현 작가였다. SBS의 <완전한 사랑>에서 김희애는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불행한 여인 하영애를 연기한다. 하영애는 과거 김희애가 연기했던 인물들만큼 심각하지만 그보다 더 감정선은 더 뜨거운 인물이었다. 더구나 김수현 작가의 대본답게 수많은 대사와 수많은 감정폭발이 실시간으로 연거푸 일어났다. 당시 김희애가 연기한 여인은 불행한 삶을 산 인물이었지만 아마도 배우로서는 모든 감정을 소진할 수 있는 역할을 만나 즐거웠을 수도 있겠다.



이후 김희애는 김수현 작가를 통해 또 한 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을 연기한다. 바로 90년대의 후남이를 벗어나게 한 2천년대의 김희애를 대표하는 캐릭터인 <내 남자의 여자>의 이화영이었다. 당시 이화영을 통해 김희애는 오랜만에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아이콘이 된다. <내 남자의 여자>는 연예인치고 촌스럽다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던 그녀에게 옷 잘 입는 미시스타라는 새로운 타이틀까지 쥐어준 드라마였다.

<내 남자의 여자> 이후 김희애는 과거에 비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즐기는 인상이었다. 드라마보다는 종종 다양한 런칭쇼에서 사진을 찍히는 스타로서의 모습이 점점 더 익숙해졌다. 하지만 어딘지 그건 과거의 그녀와 괴리감이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전성기 시절에도 보여주지 않았던 십대 소녀처럼 자기를 포장하려 애쓰는 듯한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난 나이를 잊었어.” 화장품 CF에서는 그럴듯했으나 나이에 맞지 않는 화장법이나 헤어스타일 때문에 보도사진 속 그녀는 네티즌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더불어 그녀의 연기 역시 예전처럼 찬사를 받는 것보다 오히려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한때는 극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였으나 지금은 어딘지 낡고 인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연기였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김희애는 JTBC <아내의 자격>에서 21세기 강남에 살지만 후남이처럼 억울하고 서러운 여인이 윤서래를 연기했다. 그리고 아무리 패러디가 된들 진중한 캐릭터의 인물을 연기하는 데에는 그녀만한 배우가 없다는 사실 또한 증명했다.



올해 김희애는 드라마가 아닌 tvN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누나>로 돌아온다. 티저영상에 등장한 ‘잡식소녀’라는 새 별명은 김희애에게 잘 어울리는 별명일 수 있겠다. 실제로 80년대에 그녀는 모든 방송영역을 다 오가던 잡식소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꽃보다 누나>는 어쩌면 김희애에게 가장 어려운 도전인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가 아닌 2013년 <꽃보다 누나>에서의 ‘잡식소녀’는 대본 대신 진짜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내야하는 역할이니 말이다. 김희애는 과연 대본 없는 상황 속에서 자기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잡식소녀가 될 수 있을까? 만일 성공한다면 그녀는 어딘가 허해 보이는 미시 패셔니스타보다 더 인간적인 ‘잡식소녀’라는 타이틀을 새로 얻을 수도 있겠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CJ E&M,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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