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목소리가 악기인 성악가들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듯이 성대 역시 나이 들어 창창한 소리를 내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보는 대중들은 ‘예전 전성기만 못하다’란 말을 쉽게 내 뱉는다. 하지만 연륜이 무르익은 바리톤에게선 싱싱한 성대를 가진 젊은 성악가들이 보여줄 수 없는 또 다른 깊이감이 있다. 그 중심엔 거부하기 힘든, 마음을 움직이는 보이스 컬러가 숨어있기도 하다.

지난 15일과 17일 오페라 <나부코>무대에 오른 바리톤 파올로 코니가 최고의 바리톤 아리아인 '유대의 신이여'를 부르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각자의 관점에서 유명 바리톤 셰릴 밀른즈 레나토 브루손, 에토레 바스티아니, 피에로 카푸칠리보다 '더 나았다 아니다'라며 누군간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 순간 최고의 ‘나부코’는 단연코 파올로 코니였다. 이탈리아 비평가 선정의 ‘프레미오 아비아티 (Premio Abbiati);상을 받았다는 게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지난 1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막을 내린 솔 오페라단의 <나부코>는 타이틀 롤을 맡은 바리톤 파올로 코니의 존재감이 빛난 무대였다. 관객의 모든 상념을 잠재우고 그 사람만 바라보게 만드는 매혹의 소리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바리톤 성승민은 “나부코 역 파올로 코니는 50이 넘은 나이를 잊게 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감을 보였다. 오늘 그가 보여 준 ‘칸타빌레’는 최고였다”고 감상을 전했다.

사실, 파올로 코니를 보며 떠오른 국내 바리톤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지난 8일~10일까지 라벨라오페라단이 선보인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에서 루나 백작 역을 맡은 바리톤 장성일이다. 젠틀함을 유지하며 모든 걸 가졌지만 사랑을 갖지 못한 남자의 내면이 느껴지도록 연주를 해 관객의 연민은 대부분 루나 백작에게 쏠렸을 듯 싶었다. 이렇듯 황금 보이스를 가진 바리톤의 소리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귀가 열리고 없던 힘도 날 것 같았다.

국내 성악가들의 존재감도 돋보인 <나부코>공연이었다. ‘나부코’ 역으로 더블 캐스팅 된 바리톤 최종우는 레가토 라인이 절묘하지 않은 점이 아쉬웠지만 긴장감이 느껴지는 광기와 딸에게 버림받은 노쇠한 아비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 소프라노 이승은 아비가일레는 화려한 ‘아질리타’ 기술이 최고는 아니었지만, 음의 광채가 뛰어났다. 소프라노 안젤라 니콜리 보다 훨씬 설득력 있었다. 또한 호전적인 여전사의 이미지 위에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선보여 이전 예술의전당 <투란도트>보다 훨씬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다. 두 주역 모두 피로 얼룩진 황금 왕좌에 오른 부녀의 통곡를 느낄 수 있는 ‘부녀의 2중창’에서 혼신을 다했다.



11월엔 주말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 무대에서 오페라 공연이 펼쳐진다. 이번 주말엔 수지오페라단의 <리골레토>가 대기 중 이다.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에서 호평 받은 바리톤 조지 가닛제와 소프라노 엘레나 모스크를 필두로 르네상스 양식의 회화 그리고 의상 그리고 베르디가 작곡한 아름다운 아리아를 한꺼번에 만나게 하겠다는 취지다. 오페라는 현장성을 직접 느껴보지 않고는 ‘최고의 오페라 공연이었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어떤 감탄을 자아낼지는 막이 올라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솔 오페라단의 <나부코>역시 막이 오르기 전까진 그 진면목을 알 수 없었다. 이번 <나부코>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모데나 루치아노 파바로티 시립극장(Teatro Comunale Luciano Pavarotti Modena)의 첫 초청 공연이라는 것. 이태리 모데나 루치아노파바로티 시립극장장이자 지휘자 알도 시실로(Aldo Sisillo)가 지휘를 맡았고, 쟌도메니코 바카리(Giandomenico Vaccari)가 연출을 맡았다. 1841년 오픈한 모데나 루치아노 파바로티 시립 극장은 2007년, 모데나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파바로티가 타계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극장 명칭을 변경했다.

<나부코>는 유대인(히브리인)들의 시련과 신앙, 승리를 주제로 사랑, 복수, 용서 등 극적인 스토리를 긴박하게 전개해 관객들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번 오페라는 무대 전환에 시간을 많이 소요해 극적인 긴장감이 완벽하게 유지되지 못했다. 바카리 연출가는 ‘이탈리아에서 엑기스만 가져온 고전적인 무대다’고 전했지만 이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릴 듯 싶다. 계단식 무대를 기본으로 뒷배경만 영상으로 변화를 주며 전 4막을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스펙타클 무대를 기대한 이들에겐 무대미술과 연출이 구태의연하게 다가왔을 수 있겠다.

지휘를 맡은 알도 시실로 지휘자는 첫 날엔 다소 슬로우 템포로 서곡을 연주하는 가 싶었으나, 마지막 공연에선 보다 다이나믹하게 주도했다.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탄력 역시 제대로 붙어 서곡의 긴장감이 효과적으로 살아났다. 유명한 합창곡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에서는 제2의 국가로 불려질 정도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곡이다. 스칼라 오페라 합창단은 연기에도 신경을 쓴 흔적을 엿볼 수 있게 그림을 만들어내며, 절절한 선율을 들려줬다.

성악가 중에서 가장 아쉬움을 남긴 배역은 히브리의 대제사장 ‘자카리아’였다. 1막 첫 장면부터 등장해 타이틀 롤 이상으로 오페라를 책임지고 이끌어야 하는 역을 맡은 베이스 크리스티안 파라벨리, 유형광 모두 ‘비브라토’가 과도했다. 지나치게 노쇠하고 흔들리는 소리를 선 보인 점이 관객의 호감을 얻지 못하게 한 요인이다. 국내 성악가 중에 ‘바소 칸탄테’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최저음을 내야하는 ‘자카리아’를 제대로 소화해낼 베이스를 찾기 힘들다는 의견도 분분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국내 ‘자카리아’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고 싶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솔 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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