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사’는 어떻게 남자들을 TV앞에 앉혀 놓았나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1994년 여름 김일성의 죽음이 속보로 알려졌을 때 필자와 친구들은 자율학습을 하던 중이었다. 에어컨도 없는 교실에서 찌는 더위 탓에 반절 넘게 책상에 엎드려 자던 스포츠머리의 우리들은 모두 일어나 전쟁에 대해 토론했다, 아니 수다를 떨었다. “우리, 정말 이러다 다 죽는 거 아니야.” 누군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우린 다들 키득키득 웃었다. 김일성은 죽었고 휴전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파주에 살지만 우리들에게 전쟁은 여전히 딴나라의 농담 같은 이야기였다. 선생님 중 한 분은 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면 파주는 피해서 바로 서울에 떨어지기에 오히려 이곳은 안전하다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도 했다.

그 해 여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끊어졌던 한강다리는 그해 10월에 다시 끊겼다. 바로 성수대교의 붕괴였다. 그 소식을 아침뉴스로 접한 파주의 고등학생들은 학교에 모여 또 우리와는 다소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서울의 성수대교 붕괴 사고에 대해 한참을 떠들어댔다. 그 후, 대학에 가서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친구에게 우연히 1994년의 성수대교에 대한 말을 들었다. 자신이 몇 분만 더 늦게 버스를 탔더라도 사고 당일 그 시간에 성수대교 위에 있었을 거라고.

1994년은 MBC의 대표적인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이 종영한 해이기도 했다. 1세대 홍학표, 고 최진실 2세대 김찬우, 장동건이 주연을 맡은 이 드라마는 꽤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후 대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캠퍼스 드라마의 인기는 주춤해졌고 대신 <남자셋, 여자셋>이라는 청춘 시트콤이 1996년 시작된다. 우연찮게도 <응답하라 1994>는 <우리들의 천국>과 <남자셋, 여자셋> 사이 중간지점에 서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실제의 배경도 그러하고 드라마가 취하고 있는 호흡의 방식 역시 그러하다. 드라마와 시트콤의 그 어디매쯤 아련한 지점에서 <응답하라 1994>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리얼리티의 포즈를 취한다.

 

 

 

 

 

<응답하라 1994>가 유독 남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까닭 역시 거기에 있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지금 삼십대 중반에서 후반인 세대들의 고교시절 대학시절 유행코드로 이루어져 있다. ‘추억’이란 마하세븐 스포츠음료처럼 마흔으로 달려가는 남자를 다시 이십대 초반의 감수성으로 재빠르게 돌려놓기에 얼마나 적절한가? 더구나 1994년을 즈음한 그 시기는 어마어마한 사건사고들이 많이 터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문화가 곳곳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던 활기찬 시기였던 건 분명하다.

삐삐의 음성사서함을 확인하려 많은 이들이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기다리던 풍경, 뚜뚜뚜뚜 띠딩 띠띵 디디디딩... 모뎀연결음에 괜히 마음이 설레던 천리안과 하이텔, 나우누리 같은 PC통신의 등장, 서태지와 아이들의 열풍과 015B 노래의 발랄한 감수성, 신촌 락카페 스페이스에 모여들던 청춘들의 모습, 심지어 대학에 입학하면 선배들에게 가장 먼저 배우는 노래와 율동인 ‘바위처럼’에 이르기까지. 이 수많은 추억의 요소들은 이미 청춘을 살짝 잃어버린 이들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게 해준다. 물론 그 시절을 겪지 못하고 삼촌이나 선배들의 말로만 들었던 이들에게는 이 드라마의 배경이 오히려 신선할 수도 있겠다.

 

 

 

 

 

<응답하라 1994>가 여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드라마에 관심이 적은 남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그것도 남자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감정이입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 사실 <응답하라, 1994>는 청춘과 사랑을 말하는 방식에 있어 지금의 드라마와는 많이 동떨어져 있다. 거기에는 쿨한 남자도 없고 시크한 여자도 없다. 날 때부터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회장님의 아들이 한눈에 반한 여자를 명품매장으로 데려가는 사건 같은 건 결코 일어날 일이 없다. 사실 최근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들은 능력은 기본이요 처음부터 멋있고 끝까지 멋있고 심지어 죽는다고 해도 멋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남성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 에서만 가능한 사랑 이야기에 다분히 질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4>에서의 사랑 방식은 압구정동 오렌지족이란 말이 등장하던 90년대를 조망하지만 결코 오렌지스럽거나 야타족스럽지 않다. 유자처럼 투박하고 감귤처럼 흔하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와 닿는 사랑의 감정을 이 드라마 속 남자들은 보여준다. 그래, X세대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트윈엑스 로션을 쓰던 X세대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알 수 없어 언제 마음을 털어놓을지 고민하며 연신 마음에 X자를 그리던 소심하고 풋풋한 청춘들의 사랑이다. 그러니 처음 연애하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응답하라 1994>의 사랑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이 드라마의 묘미다.

더구나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학생들은 사랑만이 아니라 많은 것들에 대해 고민한다. 친구에 대해, 가족에 대해, 앞으로 살아갈 삶의 방향 대해. 그래서 <응답하라 1994>를 시청하는 남자들은 어느새 이 드라마의 등장하는 쓰레기, 해태, 삼천포, 빙그레, 칠봉이의 심정에 쉽게 빠져든다. 이 드라마에 배경음악인 노래 <언젠가는>의 가사처럼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살았지만 뒤돌아보니 그땐 정말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으니까 말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CJ E&M]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