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호기롭게 관객들 귀를 막 쳐들어오는 김지훈 작가의 극작술은 여전했고, 치밀한 서브텍스트 분석으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그림을 보여주는 김광보 연출의 손길도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원전유서>,<풍찬노숙>에 이은 김지훈 표 개국신화 3부작의 마지막인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의 막이 올랐다.

연극의 표면적 서사는 권력을 위해 지식층을 회유하고, 거짓 건국신화(열매론)를 만들어 나라를 창업하고자 하는 도련님과 도련님의 반대편 혹은 최측근에서 권력의 핵심을 찾아 쫒아 다니는 인물들의 암투, 죽음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의 이야기다.

권력 놀이에 빠진 남자들과 용감한 여자들의 한판 승부를 그렸다. ‘수천 년 동안 나라가 세워졌다가 사라지는 세월 속에서 인간의 삶을 지속시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질문이 담겨있다. 남성중심의 ‘개국신화’라는 허상과 위선 속에 가려진 가장 겸허한 진실, 즉 가족을 만들며 다음 세대의 미래를 내다보는 진실하고 원초적 삶의 고귀함을 들춰내고 있다.

배우들은 무대 밖으로 퇴장하지 않고 양쪽 사이드에 일 열로 앉아있다 자신의 역할이 돌아올 때 등장하는 식이다. 단 초초하고 유약할 뿐 아니라 광기에 미쳐가는 인물인 도련님은 어둠 속에서도 계속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자리하고 있다. 김광보 연출은 “도련님을 무대 앞 가운데 위치시키고 퇴장을 시키지 않고 남겨 두는 건,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도련님이 이 공간에 갇혀서 꾸는 백일몸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연출의도를 전했다.

박동우 무대미술가는 작품의 주요한 배경이 되는 산을 관을 쌓아 형상화 했다. 화전민 여인들의 공간은 무대 오른쪽 제일 상단에, 여인들과 대립하는 군대의 공간은 왼쪽 중간에, 권력자인 도련님은 맨 하단에 있다가 조금씩 올라가게 설정해 전혀 새롭지만 또한 낯익은 세계를 펼쳐 놨다.



언뜻 보면 권력의 갈등과 암투를 그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작품은 몸으로 배운 형이상학을 실천하는 화전민 여인들의 삶에 더 방점이 찍혀있다. 제목 그대로 전쟁터에서 사는 남성들이 아닌,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의 삶 속에서 원초적 진실을 캐치할 수 있다. 특히, ‘사람의 허기야 말로 제일로 무서운 임금님’이다고 말하는 매지, ‘곡식 뺏는 나라 말고 떡 주는 나라면 괜찮지’라고 말하는 자개가 그러했다.

도련님은 병들어 인육을 먹고 있음에도 백성을 들먹이는 왕이 되자고 거들먹거린다. 또한 월경하는 여성의 몸이 신화적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개짐론’을 치켜세우기에 이른다. 도련님은 늙은 문관과 함께 자신이 월경하는 여인의 뱃 속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뿌리 있는 배롱나무 열매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열매론'을 완성하기 위해 배롱나무가 있는 산을 통째로 들어다 도성으로 들여가려고 한다. 세상이 망하고 탄생하는 반복을 거듭하는 이유는 높은 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높은 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밑바닥으로 끌려와 보복을 당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한 것.

‘도련님이 인륜을 져버리니 몸이 썩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될 쯤 유식한 말은 모르지만 옳은 소리를 하는 여인들이 나타난다. 김지훈 작가의 말재간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먹는 것’의 숭고함을 중요시하는 작가의 심성대로 이번에도 역시 ‘먹는 이야기’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터의 싸움보다 더 위에 자리한다.

콩 팥 밤 대추가 고루 들어있는 일명 망령떡(미친떡)의 아리송한 맛을 유머러스하게 설파하는 가 싶더니, 다람쥐 살림을 헤아리지 못하고 도토리를 통째로 털어 온 아주까리에게 매지의 입을 통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삶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칼과 총보다 강한 여성의 생명력은 아지두부의 2세가 탄생하는 것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렇게 전쟁터를 훔쳐 나라를 구한 여인들의 고귀한 ‘피의 역사’, 아니 ‘진짜 피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김지훈 작가의 상상력은 대단함을 넘어 어마 어마하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더욱 귀한 이유는 거대하고 관념적인 이야기들로 점철되는 게 아닌, 살아있는 친근한 언어로 지금 이 시대를 돌아보게 할 뿐 아니라 정나미 있게 언어의 맛을 살려내는 데 있다. 푸근한 어머니의 언어를 이만큼 맛깔스럽게 펼쳐내는 작가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원래의 대본에서 반 이상을 덜어내 4시간이 아닌 2시간으로 러닝타임이 줄었지만 중간 중간 점핑되는 전개가 이야기의 맥락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프로그램 북 외에 원 대본 집을 함께 구매할 수 있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2013 국립극단 가을마당 창작희곡 레퍼토리 첫 번째 작품으로 공연되는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이 대단한 작품임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한 마디는 하고 싶다. 이 연극을 안 봐도 살아가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안 보고 넘어가기엔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방 구석에서 혼자 외로이 TV를 보는 사람처럼 안타까울 것 같다. 수많은 연극 중에 스쳐지나가는 한 편이 아니라 소수의 특별한 연극이니 말이다.

배우 이호재, 오영수, 김재건, 정태화 등 중견배우들이 무게감을 잡아준다. 매지 역 배우 길해연의 깊이 있는 혜안, 도련님 역 젊은 배우 이승주의 단단한 내공도 좋다. 김지훈 작가의 페르소나 처럼 느껴지는 황석정 배우는 <풍찬노숙>에 이어 이번에도 함께해 인간적인 바람을 솔솔 불어넣었다. 이 외 배우 김정영, 최승미, 전형재, 유수미, 문경희, 유성주, 강학수, 호진, 한동규, 김송일, 장현석, 이기돈, 유영욱, 이창수, 서미영, 김병건, 강민지 등이 출연한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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