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보이는 <혜경궁 홍씨><다정도 병인양하여><공포><햄릿>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국립극단 <혜경궁 홍씨>와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와 국립극단이 공동으로 선보인 <다정도 병인양하여>는 ‘연극성이란 무엇인지’ 대담하게 묻고 있는 작품이다. 전자는 역사극, 후자는 연애극이란 외피를 입었지만 막상 만나보면 <혜경궁 홍씨>는 스토리텔링을 제거한 역사 인물 심리극이었고, <다정도 병인양하여>는 ‘무대 위의 리얼과 언리얼’에 대해 사유를 넓혀준 작품이었다.

극단 그린피그의 <공포>는 한국 작가가 한국어로 쓴 체홉극(‘체호프’로 쓰는 게 맞나 제작자들의 원 표기를 따랐다)이자, 체홉으로부터 시작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과 삶의 본질’에 한 발짝 다가간 연극이었다. 명동예술극장의 <햄릿>은 우리 시대의 비극으로 새롭게 태어난 고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3편의 연극 모두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스쳐갔다는 점. <혜경궁 홍씨>의 이윤택 연출은 “사도 세자는 또 다른 햄릿”이라고 밝혔으며, <다정도 병인양하여>에서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란 구절이, <공포>에서는 “햄릿이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꿈 속에서 망령이 나타날까봐 두려워서였다”는 대사로 쓰였다.

■ 진실은 뒤주가 아닌 ‘인간의 속살’에 있었다. <혜경궁 홍씨>

1762년 삼복더위가 한창이던 날, 세자빈 홍씨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사도세자)을 버렸다. 사도세자는 궁내에서 칼을 휘둘러 궁녀를 죽이거나 광기어린 행동을 보여 종묘사직이 위태롭다는 이유로 뒤주에 갇혀(임호화변) 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27세. 반면 혜경궁 홍씨는 9세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가 영조-사도세자-정조-순조 4대에 걸친 가족사와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81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의 죽음을 방조한 냉혈한 여성인가. 모성본능이 강한 불굴의 어머니인가. 궁중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정치적인 여인인가. 연극 <혜경궁 홍씨>는 왜 그가 아들을 선택하고 남편을 버렸는지에 대한 동기를 찾아간다.

연출가 이윤택은 모진 삶을 견뎌낸 혜경궁 홍씨의 삶의 근원, 힘의 원천을 그녀의 비밀스러운 글쓰기. 바로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 집필이었다고 본다. 작품은 사건과 인물을 원근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좁은 구멍을 통해 방안을 들여다보듯 아주 디테일하고 세밀하게 접근하여 풀어나간다. 따라서 이번 작품에서의 영조와 정조, 사도세자, 그리고 혜경궁 홍씨는 그 동안 우리가 접해 왔던 역사적 인물과는 또 다른 ‘살아있는 인물’인 것이다.



역사서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록 ‘한중록’과 왕비가 되지 못한 왕실의 여인 ‘혜경궁 홍씨’를 새롭게 해석한 연극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 진찬례에서의 하루 낮과 밤을 보여준다. 과거와 현실의 경계에 있는 혜경궁 홍씨를 사이를 두고 산자와 죽은 자의 대면이 벌어지면서 극은 과거의 짐과 현재의 불협화음을 꺼내놓는다. 소문과 억측에 둘러싸인 인물들이 각자 자기 얘기를 하고 한판 춤을 추고 씻김굿을 한다. 마지막은 홍씨가 자기 삶의 정당성을 호소한 <한중록>을 써 내려가는 장면으로 그려냈다.

뒤주에 얽힌 역사의 굴레와 매듭은 연극 후반에 가서 풀어진다. ‘죽음’을 앞에 둔 아비(사도세자)와 아들(어린 정조)의 울부짖음, 세자를 죽도록 방조한 장인 홍봉한과 세자빈 홍씨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가운데, 한림윤숙의 한 마디인 ‘병자는 의원에게 보내야지 왜 뒤주에 넣어 죽인단 말이오’ 가 귓가를 관통한다. 아비에게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 세자의 광증과 콤플렉스, 소통의 부재 등이 인간의 속살을 엿보게 했다. 역사극이란 무게감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이만한 울림을 주는 연극도 없을 듯 하다. 그 여파일까? 이미 전석이 매진 돼 표 구하기가 힘들다는 후문.

이 연출은 배우들이 직접 180도 회전하는 무대 세트로 장면 전환을 꾀했다. 역사의 뒤편, 역사의 속살을 들여다보자는 의도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혜경궁 홍씨 역 배우 김소희는 심리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관념적인 세계를 입체적으로 선 보여 큰 박수를 받았다. 우리 시대의 아비를 떠오르게 한 영조 역 전성환, 사도세자의 마음을 인간애와 함께 다시 돌아보게 만든 박정무·최우성, 이중 플레이가 능한 군주 마키아벨리와 같은 성격을 지닌 인물 정조를 창조해 낸 정태준, 임팩트 있는 인상을 남긴 어린 정조 주재희 등 모두 좋은 연기를 펼쳤다. 29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 ‘연극도 병인양하여’란 종착지로 리드미컬하게 달린 <다정도 병인양하여>

2012년 초연 <다정도 병인양하여>는 관음증을 자극하는 발칙한 연애 실험극에 더 관심이 쏠렸다. 다시 만난 <다정도 병인양하여>는 실제처럼 느끼도록 만든 ‘무대 위 리얼리티’ 가 더 흥미로웠다.

<다정도 병인양하여>(작 연출 성기웅)는 다중연애(poly-amory)를 지향하는 ‘다정’이란 인물과 ‘나’(성기웅)이 실제로(?) 함께 했던 연애이야기이다. 구체적인 날짜·시간·장소를 표기한 실제 두 사람의 휴대폰 문자메시지와 대화 녹취를 보고 들을 수 있다. 재 공연에선 실제 주인공인 ‘다정’이(모자이크 처리)와 배우들의 인증샷까지 볼 수 있다. 극중 관능미를 더하는 춤 탱고와 연애와의 공통점을 찾아 사랑의 본질에 대한 유쾌한 해석도 엿 볼 수 있다.

‘다정’이란 여인은 2명의 배우(이안나 김희연)가 연기한다. 어느 한 배우가 ‘다정’을 연기했다면 하나의 이미지로 캐릭터를 그려낼 수 있겠지만, 두 배우가 한 무대에서 번갈아 가면서 선 보여 ‘캐릭터’에 대한 거리두기는 물론 관객의 상상력은 끊임없이 자극된다. 성기웅 역은 성기웅 작가와 닮은 이화룡 배우가 맡았다. 리얼 기웅이 등장하기도 한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다는 은밀한 기쁨도 잠시, 작품 안에서 ‘나’와 주변인물들과의 관계, 공연이 이루어지는 현재의 상황을 계속해서 교차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관객에게 말을 걸고 프리젠테이션을 하기도 한다. 마두영 역을 마두영 배우가, 양동탁 역을 마두영 배우가 연기하기도 한다.



관객은 진실과 거짓의 모호한 경계선 위에서 환상적인 연극적 리얼리티를 체험 할 수 있다. ‘성기웅’과 ‘다정’에서 시작된 연애는 나와 당신의 연애 이야기를 불러냈고, 성기웅 연출이 불러 낸 ‘연극적 리얼리티’는 관객의 예민한 지각을 꿈틀거리게 했다. 그리고 ‘인간’과 ‘사랑’의 다층적인 면모 그리고 ‘연극’ 의 본질을 되묻게 했다.

연극은 ‘다정도 병인양하여’란 출발지에서 ‘기웅도 병인양하여’란 두 번째 정거장을 지나 ‘연극도 병인양하여’란 종착지로 리드미컬하게 달려갔다. 자유로운 연애 뿐 아니라 자유로운 연극에 대한 이야기가 맛깔스럽게 담긴 오색찬합 연극이었다. 29일까지 국립극단 소극장 판.



■ 삶의 불확실성에 두려움을 느끼는 당신에게 권하는 연극 <공포>

2013년 한 해 동안 한 인간으로서 만난 마음, 잃어버린 마음의 파도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연극 <공포>를 만나는 게 좋겠다. ‘올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연극으로 어떤 작품을 추천하겠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바로 <공포>라고 답하겠다. 아쉬운 점이라면 지난 22일 서강대 메리홀에서 마지막 공연을 올려 언제 다시 만날 지 알 수 없다는 점.

극단 그린피그의 <공포>(연출 박상현)는 체홉이 신의 분노를 뒤집어 쓴 얼어붙은 폐허의 땅 ‘사할린’을 여행하고 돌아온 이후 발표한 단편소설 <공포>를 모티브 삼았다. 소설 속 화자인 ‘나’를 ‘안톤 체홉’으로 설정하여 작가 고재귀가 새롭게 희곡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원작 소설의 미세한 틈 사이 사이를 영리하게 캐치해 낸 작가의 시각이 돋보이는 연극이었다. 인상적인 점은 일상적인 체홉의 분위기와 섬뜩한 상상력과 관찰력이 돋보이는 고재귀 작가의 색채, 체홉적 사실주의를 넘어선 공포를 무대 위에 각인시킨 박상현 연출의 시각 모두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점.

소설과 희곡의 가장 큰 차이는 화자인 체홉(소설의 주인공 ‘나’)이 관찰자로 등장한다는 점. 작가가 공들여 쓴 인물인 조지마 신부(신덕호)와 요제프 신부(이필주)가 초반과 후반에 등장해 ‘삶의 불가해성’에 대해 보다 열린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시험’이라는 접근과정을 통해 체홉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시도가 상당히 흡인력 있다. 특히, ‘체홉’(김태근)과 자신의 친구인 실린(이동영)의 아내 ‘마리’(김수안)와의 관계는 불가해한 모든 정념,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한다. 작가 고재귀는 “시험의 상태를 통해 이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매 장을 성경 구절로 시작한다. 1장과 7장은 최고의 지혜문학으로 꼽히는 ‘욥기’를 인용했다. 두 명의 여자를 낳아준 부인을 절망적으로 사랑하는 ‘실린’의 공포와 실존적 질문, 더 나아가 체홉의 ‘인간은 어디서 구원을 받아야 하고 그 죄로부터 어떻게 도망쳐야 될까?’란 질문으로 까지 나아간다. 이는 자신을 만끽하고 있는 신 앞에서, ‘선이란 마음이 아니라 ’의지‘임을 알게 한 술주정뱅이 가브릴라와 그의 아버지 도쯔키에 얽힌 이야기로 귀결된다.

박상봉 무대디자이너는 서로에 대한 냉정한 관찰만 있는 인물들의 어두움과 공포를 온기가 사라진 공간과 메마른 자작나무 질감으로 표현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넘버 7 수족관 등을 들려 준 민경현 음악감독의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두려운 사람들의 두려움을 나눌 수 없다는 것보다 더한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는 한 마디도 작품의 콘셉트와 일치했다. 배우 신재환(가브릴라), 정은경(빠샤), 박하늘(까쨔) 또한 호연을 보여줬다.



■ 가혹한 세상 앞에서 미치기 직전까지 가 있는 정보석 <햄릿> 탄생

시공을 뛰어넘어 보편성을 발휘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수백 년간 문학, 철학, 영화 연극 등 분야를 막론하고 8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혀지고, 공연돼 왔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텍스트로서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명동예술극장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햄릿>을 오경택 연출, 정보석 배우와 손 잡고 무대에 올렸다. 콘셉트는 한 때 청년기의 시련과 고민을 경험했던 이 시대의 모든 이들과 만나는 ‘햄릿’이다.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놓치지 않는 오경택 연출은 “작품의 핵심키워드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고 주요 상징은 ‘거울’이다. 거울은 ‘질문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며 ”400여 년 전의 햄릿이 오늘날 우리와 만날 수 있도록, ‘유쾌하게 살기라도 하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을 그려내도록 했다”고 연출 의도를 전했다.

편안한 일상복과 헐렁한 점퍼를 입은 ‘햄릿’이다. 정보석은 지난 해 <우어 파우스트>의 때 보다 한 단계 발전 된 무대 장악력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고뇌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햄릿의 분열된 자아와, 아무리 질문해도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가혹한 세상 앞에서 미치기 직전까지 가 있는 인물을 섬세하게 불러냈기 때문이다.

굉음이 각자 가슴 속의 ‘햄릿’을 불러낸다. 무대(정승호 무대디자인) 위에 걸려 있는 크고 작은 금속판들은 햄릿을 비추거나, 관객들이 각자의 고민을 투사하게 하고, 햄릿에게 유령을 보여주는 등 다양한 이미지들을 계속해서 생산해냈다. 특히 함석판 재질의 문은 배우들이 등 퇴장시 주위를 환기시키는 강렬한 소리를 만들어 내 긴장감을 더했다.

비희극(tragicomedy)의 요소를 적극 활용하여 비장미를 덜어냈다. 폴로니우스(김학철), 길덴스턴(구도균)의 희극성을 살려 관객의 숨통을 틔운다. 또한 그동안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던 거투르트(서주희), 클로디어스(남명렬), 오필리어(전경수)를 입체적인 캐릭터로 탄생시켰다. 붉은 가발을 쓴 채 요가 동작을 반복하는 거투르트의 민낯을 보여주는 장면, 펜싱 경기 장면에서 “햄릿을 위해 축배를 들겠다.”고 하는 장면에 대한 보다 디테일한 해석까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윤색(이양구)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게 했다. 원작에서 분명치 않았던 부분들이 촘촘하게 채워진 처절한 복수와 참혹한 사랑의 이야기인 셈.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선 채 선포식을 한 뒤 락커 처럼 몸을 흔들기도 한 클로디어스 남명렬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욕심으로 인해서 한 가족, 그리고 한 왕가를 몰락시키게 한 욕심의 근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 오필리어의 죽음과 함께 등장 하는 빨간 실타래 오브제도 강렬함을 선사했다. 그렇게 2시간 40분을 달려가던 연극은 노르웨이 왕자 포틴 브라스(김병희)가 새 왕이 됐음을 선포 한 뒤, 유명한 햄릿의 독백 ‘사느냐 죽느냐’ 로 마무리 된다.

햄릿의 고뇌가 덜어져 위대한 비극을 즐기러 온 관객이라면 호불호가 나뉘겠지만, 부조리한 세상과 마주해 세상에 섞일 수 없었던 고독한 인간 ‘햄릿’을 만날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외롭고 연약한 현대의 ‘햄릿’은 그렇게 무대에서 객석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29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극단, 코르코르디움, 드림아트펀드,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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