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극 <스테디레인> 조이 배우 지현준

[엔터미디어=공연전문기자 정다훈] 2009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휴 잭맨과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연극 <스테디 레인>은 극작가 키스 허프가 쓴 2인극이다. 모든 스토리를 대사로 밀어붙이는 이 연극은 2인극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풍부한 이야기와 놀라운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 해 타임지가 선정한 2009년 Top 연극 2위에 오르며 평단에서도 인정받았으며 현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제작도 추진 중이다.

지난 해 12월 충무아트홀에서 개막한 <스테디 레인>은 어둑한 시카고 뒷골목에서 인생이 송두리째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진 남자의 이야기이다. 자칭 시카고 최고의 경찰이라 자부하며 언젠가 스타스키와 허치 같은 경찰이 될 것이라 믿는 대니와 조이는 성향은 전혀 다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늘 함께였다. 하지만 대니 집 창문으로 날아든 총알 한 방으로 시작된 불행은 꼬리를 물고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한다.

독신자 아파트에서 매일 같이 술을 마시며 미래에 대한 비전도, 지켜내야 할 가족도 없던 음울한 인물 ‘조이’가 한줄기 '빛'을 발견하고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입체감 있게 보여 준 배우 지현준을 만났다.

■ 속내를 알 수 없는 ‘조이’의 호흡을 찾아가는 여정

-<스테디 레인>이 개막 후 중반이 지났다. 초반에 비해 달라진 게 있다면?
“한참 공연하면서 알게 되는 게 많아요. 서로 조금씩 해보려고 하는 게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기본적인 텍스트 이외의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는 점이요.”

-<스테디레인> 제안이 왔을 때 바로 OK했나?
“대본을 보고 하루 만에 한다고 했어요. 우선은 같이 하는 이석준 이명행 문종원 배우 분들과 김광보 연출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선택했어요. 작품에 대한 욕심도 나고 궁금했어요. 늘 부족하다 생각하는데 작품을 하면 성장하는 게 있어요. 이 작품 역시 제가 성장할 수 있을 작품이라 여겼구요. 연출님은 굵직한 주제와 방향 라인만 잡아주시고 지켜봐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연기에 힘을 실어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화술, 말의 템포 이런 것에 대해서 말씀 하시고 나머지는 저희에게 맡겨주셨어요.”

-처음엔 조이란 인물보다는 대니에게 끌렸을 것 같다.
“처음엔 대니가 외형적으로 보여지는 게 많아 관객에게 사랑받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전해져 대니란 인물에 끌렸어요. 배우라면 뭔가를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잖아요. 그런데 조이는 보이기보다 안에 담고 있는 게 많은 인물이라 처음에 봤을 땐 대니가 더 눈에 들어왔어요. 또 안에 뭔가를 담고 안하는 게 더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알면 알수록 ‘조이란 역할을 하길 잘했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지난 기자간담회에서 상대배우인 문종원 대니를 만나 원래 생각했던 조이 이미지를 수정했다고 말했다. 거기에 대해 조금 더 말해달라
“대본을 읽으면서 ‘이 캐릭터는 이럴 것이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요. 그런 이미지나 판단을 내리게 되는 건, 그 동안 제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제 기준에서 그렇게 보이는 거겠죠. 하지만 연극이란 건 상대방 배우를 만나야 가능 한 거잖아요. 게다가 이 작품은 2인극인데, 배우가 배우를 이해하고 조율해 나가는 과정을 거쳐야죠. 종원이가 해석하는 대니와 (이)석준형이 해석하는 대니가 다르죠. 종원이가 구현해낸 대니를 보며 거기에 맞는 밸런스를 찾아갔어요. (제 생각엔) 대니가 크고 활달하고 세게 할 줄 알았는데, 종원이는 소프트하고 자분자분하게 그려냈어요. 상대 배우인 저는 거기에 맞는 캐릭터를 만들어내게 됐고요.”

-석준 대니랑 짝을 이뤘으면 초반에 생각했던 조이를 그려냈을까
“아마도 그러했겠죠. 연습 전엔 ‘수줍고 어둡고 대니에게 끌려가는 조이를 해야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종원이랑 연습을 하면서 동등한 우정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시니컬 하고 내적으로 뭐가 있는지 모르는 조이란 인물을 만들어갔어요. 종원이랑 함께 만들어간 결과물이 좋게 나오게 됐다고 봐요.”

-대본을 읽고 그림이 제대로 그려지고 이해가 잘 되던가
“솔직히 잘 몰랐어요. 연습 중반을 지나 알아간 게 더 많아요. 대본을 보면 대니는 상황을 토로하는데 조이는 계속 내레이터 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조이의 성격적인 건 없게 되는 건데’ 란 의문도 들었지만, ‘작가가 이렇게 쓴 건 분명 많은 이유가 있을텐데?’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대니의 대사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전체가 다 완성될 수 있다고 봤어요. 다른 작품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작품이었어요.”

-어디서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나
“종원이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찾아간 게 많아요. ‘대니와 조이 둘이 (무대 위에)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어쨌듯 과거의 이야기다. 이들의 과거가 도대체 어디서 출발됐을까?’ 그때 쫙 이야기의 흐름을 꿰뚫어 보기 시작했어요. 과거 일을 이야기하는 하는 것 같은데 또 어느 순간 보면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이 모든 일이 몇 분이 걸리지 않아요. 지금으로 싹 나올 때와 과거 그때 안에서 상황을 이야기 하는 호흡을 구분해서 딱딱 바꿔주면 되겠다. 그렇게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어요. (<나는 나의 아내다> 때 익혔던 호흡이 도움이 됐을 것 같다)그 때의 느낌과 완전 다르긴 하지만 호흡 체인지, 걸음걸이 등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 지적인 와이프 조이는 왜 파국을 맞이했나

-이명행 조이에 비해 지현준 조이는 먹물을 많이 먹은 느낌이다.
“지적인 와이프의 느낌을 가져가려고 했어요. 대니가 가려는 길을 보며 조이 입장에서도 그걸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요. 서로의 노력은 있었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아 튕겨져 나가게 되는거죠. 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진짜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느 부분은 만들어내는 부분이 분명 있었겠죠. 우리가 흔히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선 내가 기억하고 있는 촉감 그 부분을 부각해서 이야기하잖아요. 조이가 이야기 하는 부분 또한 정확히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대니 또한 그럴 것이고요.”

-다른 조이와 달리 술병을 들고 무대에 선다.
“조이는 알콜중독이 분명 있어요. 알콜중독인 사람이 그러하듯 초초하고 불안해 하는 게 많아요. 환청이 들렸을 수도 있고요. 그런 면을 보이고자 술을 들고 있을 때가 있어요. 조이가 지금은 술을 끊어서 잘 살고 있지만, 현재 시점에서 술병을 들고 하는 건 과거 시점과 섞어보려고 시도한 거죠. 연출님에게 의견을 말 했더니 한번 해 보라고 해서 저만 술병을 들고 하게 됐어요.”

-술병 외에도 조이의 속내를 치밀하게 잡아 놨다.
“내레이터적인 게 많아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조이가 극 안으로 빠져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해요. 사실 조이는 현재에 있는 거고, 대니가 살아있는 건 과거 시점이죠. 대니는 현재는 죽은 사람이잖아요. 그 상태에서 제가 그 상황 속으로 같이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고, 다시 나와요. 대니가 움직이는 상태에서 ‘대니가 이랬었죠’ 라고 의미를 설명해요.

극 전체를 바라보고 설명할 때가 있고 극 안으로 들어가서 설명 때가 있어요. 나중엔 뭉쳐 있게 돼요. ‘대니가 왜 악마라도 들었냐?’란 말에 대한 악마 같은 반응이 그 때 싸웠던 조이가 아니라, 자살했던 대니가 르망의 후미등을 보며 악마같은 눈깔이라고 말했던 것을 현재에 떠올리며 보여주는 거죠. 조이의 심리가 복합적으로 적혀있는 대본이에요. 전반적으로 저희 팀은 같이 안으로 들어가는 게 있어서 템포가 6분 정도 빨라요.”

-단순화시킨 해석이긴 하지만 조이는 나쁜 놈이다.
“대니와 조이 둘 다 나쁜 놈이에요. 결과만 놓고 보면 조이가 나쁜 놈이죠. 친구 아내를 그렇게 했으니까요. 하지만 누구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봐요. 그 과정 속에 일어난 관계의 해석, 그때는 그 선택의 이유가 그러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들이 분명 있어요”

-그럼에도 조이는 나쁜 놈을 넘어서 무서운 놈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조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던 친구에요. ‘빛도 가족도 아무것도 없었다. 대니가 자살하려고 총알을 장전하는 모습이 세 달 전 내 모습이었다’는 대사도 있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가족, 자신을 따뜻하게 인정해주는 코니, 이런 것들이 우정을 깨는 위기로 다가오게 되는거죠. 바라봐주는 따뜻한 빛이 그 것밖에 없는 상황에서 대니는 죽음으로, 조이는 코니 이쪽으로 선택하게 되요. 사실은 둘 다 파국이죠.

또 조이는 살면서 한 번도 열려보지 않았던 놈인데 그런 놈이 열렸으니 종잡을 수 없게 되는거죠. 저만해도 여자란 동물을 중3 때 가까이에서 처음 봤어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완전 새로운 세계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여잔 일상적으로 저말을 걸었는데 전 세상에서 온갖 데미지를 다 받았다고 느꼈어요. 첫사랑이었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과 삶이었기 때문에 그랬겠죠. 조이 역시 그동안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느껴 파동은 더 크게 다가왔지 않았을까요.”



■ “대니와 조이, 둘 다 가족이란 매개체를 통해 감염돼요”

-조이가 경찰이라는 직업을 택한 건 대니의 영향인가
“거기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아마도 대니에게 이끌렸지 않았을까요. 항상 혼자있을 수밖에 없었던 조이는 그런 외로움 안에서 술이 친구이고 대니가 유일한 친구였겠죠. 뭔가 상황을 개척하지 않으면 이런 생활이 계속될텐데...그 와중에 대니가 경찰 일을 선택했기 때문에 거기에 들어갔겠죠. (코니란 빛을 보기 전)대니의 결정은 뭐든지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아이니까요.”

-조이가 빛을 본 순간 실제로 비가 내리고, 베스트 프렌드에게 버려진 채로 쏟아지는 빗속에 서 있게 된다. 조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과 의미에 대해 더 말한다면.
“작가는 실제적으로 비가 온다는 표현을 썼어요. 대니가 월터로 인해 다리에 상처 입은 날, 난 2층으로 올라가 코니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날부터 비가 내렸다는 표현을 써요. ‘점점 우리는 젖어갔다’는 식으로 비가 우리를 감염시키는 느낌이 있죠. 드디어 비가 그친 날 깨진 창문도 고쳐져요. 깨진 창문은 대니의 허벅지에 난 구멍처럼 다가와요. ”

-비가 와서 젖어간다는 말과 ‘감염’됐다는 말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본건가
“비가 오는데 조이가 피부까지 흠뻑 젖었다고 말해요. 점점 침투되듯이 감염돼요. 저희 작품에선 상징적인 의미로 ‘악마’를 상정했는데 점점 빠져드는 거죠. 가족이란 이름으로 스스로 깎아 먹는 것이요. 둘 다 가족이란 매개체를 통해 감염돼요. 대니는 가족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그렇게 가고, 조이는 코니가 보여준 가족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 낸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거죠. 그걸 감염이라고 표현했어요. 또 대니는 계속적으로 다친 다리에 모르핀 치료를 받아야 하고 조이는 알콜에 중독돼 있어요.”

-조이가 코니에게서 본 빛이 스스로를 감염시켰다는 의미인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아내를 보며 빛이 들어와요. 사실 그러지 말아야 하는 마음의 병이자 바이러스가 들어오는거죠. 공식 문구가 난 ‘감염됐어’인데 대니는 가족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움직여요. 하지만 얽매이고 파멸하는 길로 가게 되죠. 난 친구 아내를 사랑하는 것인데 이건 결국 추구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죠.“

-대니가 그런 파국을 맞이하는 데 조이의 책임도 있다고 보는건가
“조이가 대니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이해 할 수도 있다고 봐요. 조이의 영향도 분명 있어요. 멈췄어야 하는건데 모든 일은 감염되기 때문에 조이가 정신이 잠시 나갔어요. 그런 부분을 봐서 대니가 망가진 것에 대해서 조니가 후회의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파트너이고 거의 한 몸처럼 지냈던 친구인데 그렇죠.”

-최후의 승자게임이란 말도 나오지만 결국 대니를 밀어내고 대니의 가족 안에 들어온 사람은 조이다
“‘최후의 승자가 누구였나?’라고 물었을 때, 모든 걸 나 안고 떨어진 대니와 달리 조이라고 답 할 수 있지만... 온전히 ‘내가 이겼어’가 아니라 엄청 아프죠. 결국 나의 잘못이고 평생 가져가야 할 어떤 것이죠. 상대를 구하고자하는 간절함과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두 모습이 다 있지만 어찌 보면 조이가 더 크게 상처받는 모습이 느껴져요. 그들의 선택에 연민이 느껴져 둘 다 승자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거죠.“

-조이를 대니의 또 다른 자아로 본 건가
“조이가 대니의 또 다른 자아의 느낌이 있긴 하죠. 결국은 조이가 기억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점도 그렇고요. 극 안에선 두 명의 사람으로 보여지는 게 있기 때문에 내 안의 대니의 속성이 아니라, 어린 시절 같이 살아 온 ‘대니가 이랬었지. 그래서 이렇게 됐었지’ 하는 실제적인 관계에서 그랬다는 걸 보여주고 있어요.”



■ 내 안의 숨겨진 모습을 솔직하게 바라보게 하는 <스테디 레인>

-두 친구의 이야기지만 결국 미국 사회 전체의 부조리로 보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미국사회에 대한 상황을 가지고 있어요. 대니는 닐슨 패밀리에 가입돼 뻐기면서 미국의 중산층 부류가 되고자 하지만 결국 그렇지 못해요. 사실 대니와 조이 둘다 찌질한 인간이자 가장 밑바닥 인간인거죠. 형사 승진도 계속 떨어지는 만년 경찰인데 그 밑바닥에 있는 적합한 걸 끌어내기 위해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도 있어요.”

-<스테디 레인>이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하는가
“공감대를 얻기 위한 노력을 일부러 하진 않았어요. 어떤 결론을 주는 작품도 아니고요. ‘전반적으로 이런 모습들이 우리네 모습들과 다르지 않다’란 생각을 했어요. 관객들도 자기의 모습으로 해석을 할 테니까요. 어떤 분들은 ‘조이가 안타깝다’ 혹은 ‘대니가 안타깝다’ 식으로 다르게 반응하는데 관객들이 느끼는 건 다 다른 것 같아요.”

-현대인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의미인가
“이 부분에선 그렇고 저 부분에선 저렇고 하는 식으로 정확한 메시지를 보여준다기 보다는 사람 사는 모습과 적합하다고 봤어요. 우리가 고통스럽다고 할 때 ‘고통’엔 힘든 것만 있지 않아요. ‘기쁨’ 안에도 항상 기쁨만 있는 게 아니듯 말이죠. 조이가 가정을 꾸리고 최고의 행복을 누린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안엔 아픔도 있어요. 이런 점이 현대인의 모습을 품고 있는거죠. 대니에 대한 이해와 아픔이 병행해요. 누구도 승자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게 그거죠.“

-인물을 악인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이 모든 게 인간의 속성이란 의미로도 들린다.
“세상을 살다보면 나쁜 의지를 가지고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어느 순간 이끌려 잘못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아요. 누가 그렇게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 사랑했던 사람을 두고 바람을 피울거라 생각하겠어요.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 아니잖아요. 아껴주고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게 목표였지만, 익숙해지고 뭔가 새로운 자극이 다가왔을 때 거기에 한발 내 딛는 순간 잘못된 인생을 살게 되죠. 구멍 난 인생이 되버리는거죠. 담배만 예를 들어도 한 대만 피워보자 마음 먹고 피는 순간 계속 피어야 돼요. 그런 쪽에서 유혹이 오면 평생 노력을 해야 해요. 쑥 들어갔을 땐 헤어나오기 힘들어지는거죠.”

-지현준 배우의 설명을 듣다보니 조이란 인물이 안쓰러워진다.
“이 작품은 모든 일이 끝난 시점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지난 과거요. 난 이미 대니의 자리에서 대니의 가족들과 살고 있는 상황이요. 그렇게 잘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어느 날... 비가 내려요. 그러면 비가 올 때마다 조이는 이 모든 게 생각나지 않을까요? 그 끔찍했던 시간들이요. 조이가 평생 가지고 가야 하는 짐 인거죠. 어쩔 땐 조이가 지금 무대에서 보이는 대니를 못 봐요. 그땐 지금 내 이야기만 하고 있는거죠. 지금 대니랑 있는 상황과 조이 혼자 있는 상황이 섞여있는 거죠.”

-배우 스스로에겐 이 작품이 어떤 주제의식을 던져줬나
“저 밑에 있는 많은 것을 알게 했어요. 우리가 모르고 살고 있지만 닥쳤을 때 끄집어 나오는 게 있죠. 그런데 자기 안에 뭐가 있는지 들여다봐야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관객들이 이 둘이 파국으로 치닫는 걸 보고 먹먹하다고 해요. 왠지 모르게 생각하는 게 많아요. 여기선 악마라고 언급하고 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나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요. 내 안의 숨겨진 모습을 솔직하게 바라보게 하는 연극입니다.”

-<스테디 레인> 하면서 어떨 때 가장 좋았나
“2인극은 상대방 호흡이 특히 중요한데 꾸미지 않고 종원이가 솔직하게 연기하고 있고, 그걸 공유할 때 좋았어요. 관객들도 서로 숨죽이면서 우리랑 함께 하고 있다는 공기가 느껴질 때도 좋아요. 또 그런 날은 여지없이 종원이랑 이야기하면서 ‘좋았어’라고 말해요. 우울한 작품이라 매 번 끝나고 나면 힘들어요. 그런데 종원이의 눈을 보면서 ‘좋드라’라고 말할 때 느껴지는 그 기운이 좋아요. 그땐 대니와 조이가 아닌 지현준과 문종원으로서 이야기하는 순간이죠.”



■ 배우 지현준의 말, 춤 그리고 노래가 날아오르는 시간

-정확히 나이가 몇 살인가?
“빠른 78년생이라 77년생들과 동기입니다. 연기는 27세에 시작해 11년차가 됐네요.

-지난 뮤지컬 시상식에서 ‘배우가 무대에 서면 맨 먼저 말을 하고 싶어지고, 다음에는 춤을 추고 싶어지고, 다음에는 노래를 하고 싶어진다. 노래를 하면 날 수 있다.’고 말 했던 게 화제가 됐다. 현장에서 그 소감을 들은 기자들도 다들 눈빛을 빛냈던 게 기억난다. 10년 이상 배우로 살아왔는데 배우로서 날 수 있게 됐나?

“아직 안 날아봤어요. 크하하. 시상식 소감 말은 이윤택 선생님께서 오래전에 해 줬던 이야기인데, 항상 제 가슴에 있어요. ‘배우가 말과 춤, 노래 이 세 가지를 다 할 수 있으면, 무대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란 생각을 해요. 그렇게 되면 연극에서든 어떤 장르에서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백 마디 말보다 노래 한편이 더 확실히 보여 줄 때가 있고, 춤이 또 그런 역할을 할 때가 있잖아요. 어쩌다 보니 춤을 배우고 연극을 하고 뮤지컬도 하게 됐어요. 이제 노래를 배우고 있는데 ‘지현준이란 이름을 가지고 저의 방법으로 가고 있지 않나’란 생각이 들어요.”

-20대 시절 연희단거리패에서 보여 준 연기 잘 봤다. <천국과 지옥>, <곡예사의 첫사랑>, <햄릿> 등 많이 봤다. 연희단에서 연극에 대해서 많이 배웠을 것 같다.
“오래 전에 했던 <천국과 지옥>도 보셨어요?(웃음) 방송국 PD로 일 하다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가게 됐어요. 이윤택 선생님을 만나 제 진짜 모습을 알게 된거죠. 연기를 한 것도 아니고 대사만 읽었는데, 마치 제 자서전을 쓰듯이 ‘니 성품이 어떻고, 니가 이렇게 살아 왔기 때문에 그렇고, 그게 너의 한계고...’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옷이 홀딱 벗겨진 느낌을 받았어요.

‘어떻게 알지’란 생각에 놀라움도 있었지만 자존심도 상했어요. 나름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머리로만 살았던 인간이었던거죠. 이 사람과는 이 정도, 좋은 사람에겐 이 정도로 대했던 거 같아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요.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사실 너 좋은 사람만은 아니잖아. 부모님께 깽판 부리잖아. 정작 중요한 사람은 안 챙기면서 옆에 여자는 왜 챙겨?’ 그 말을 들으면서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에 대해 진짜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상대 배우에게 관심을 갖게 되니 관객에게도 관심이 생겼어요. 이만큼 절 벗겨낼 수 있었던 게 연극을 했기 때문아닐까요.”

-그런데 연극 무대를 뒤로 하고 2011년 SBS TV ‘기적의 오디션’에 출연했다.
“어머니가 9년 동안 연극 그만두란 말 한번 하지 않았는데, 편찮아지면서 갑자기 ‘기적의 오디션’ 한번 나가보면 안 되겠냐? 란 말씀을 하셨어요. 그게 마치 9년 동안 쌓아온 말처럼 느껴졌어요.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나갔던 겁니다. 제가 TV에 나온 것 보고 병이 나으셨어요. 부모란 그런가봐요. 만약 떨어졌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하하. 엄마는 제가 마치 뭔가라도 된듯 좋아하셨어요. 그 다음에 연극 <댄스레슨>을 했는데, 정말 좋아하셨죠. 엄마에게 엄청난 존재인 고두심 배우랑 함께 작업한다고 하니 전 이미 성공한 사람이 됐어요. 어머니 아버지 기준에서 보면 성공한거죠. 텔레비전 드라마 <바스켓 볼>이 흥행하지 못하고 막을 내렸는데도 거기 나온다고 또 좋아하셨어요. (현재 어머니 기준에서 모르는 연극만 하고 있다. 현재는 어떤 반응을 보이나) 지금 다시 기분이 중간 정도 되셨어요. (웃음)”

-방송 일을 해 보면서 뭘 느꼈나
“연극작업만 계속 했다면 찌질한 연극배우가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어요. 그 전엔 저도 연극 예술이 진짜지 않나란 신념을 가졌던 것 같아요. 뮤지컬은 상업주의라고 욕하고, 방송 출연하는 배우들은 연기를 못할거라는 못 돼 처먹은 생각을 했어요. 혼자 산만 쌓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뮤지컬도 하고 방송도 해 보면서 ‘사실 내가 배워야 할 게 많구나’란 걸 알게 됐어요. 그 안에 직접 들어가보니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방송에 나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일인데 현준씨 연기를 대중이 좋아할까요? 초등학생이 이해할까요’ 란 말에 뒤통수를 맞았어요. 제 연기를 다시 돌아보게 된 거죠.”

-<모비딕>,<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등 뮤지컬 작품에도 출연했지만 아직까지는 뮤지컬 보다는 연극 무대 위 현준 배우 모습이 편해 보인다.
“많이 깨졌어요. 뮤지컬에 대해 많이 배워가고 있어요. 아직은 노래적인 제약이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준비해서 제 방식으로 설득 시키고 또 다른 기쁨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2013년 <나는 나의 아내다>,<단테의 신곡> 등으로 주목받고, 대한민국 연극대상 신인 연기상, 동아연극상 유인촌 신인 연기상 이렇게 2관왕을 거머쥐었다. 현준 배우를 찾는 무대가 더 많아질 것 같다.
“감사하게 상도 받았지만 연희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실 지금 괴로운 건 나이 먹고 점점 힘들어지는 것, 그거죠. 전 뮤지컬에서도 신인이고 연극에서도 신인이니 이제 열심히 하는 일 만 남았어요.”

-2014년 추후 일정은 어떻게 되나
“<스테디 레인>이 끝나고는 연극 <에쿠우스> 작업을 하게 됐어요. 더블 캐스팅인데 말 한명(지현준 배우 스스로 말 이미지와 닮았다는 유머를 날린 것)과 정상적인 엘런(전박찬) 이렇게 두 명의 엘런을 뽑으신 거 같아요. 하하. 올 중반엔 연희단거리패에서 작업을 할 예정입니다. 저희들은 김소희 배우를 엄마라고 부르는데 엄마랑 선배님들과 다시 만나서 작업하게 됐어요. 두산아트센터에서 남명렬 선배님과 함께하는 <나는 나의 아내다>, 국립극장의 <단테의 신곡>도 다시 하게 됐고요. (한동안 뜸했는데 연희단 거리패 와의 작업이 다시 활발해지는건가?)배우의 뿌리 같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신 이윤택 선생님, 연희단거리패와의 인연을 끝까지 버리지 않을겁니다.”



■ 자기 안의 꽃을 발견하게 만드는 가난한 연극의 힘

-배우로서 철학이 있다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게 저의 철학입니다. 일본의 유명 연출가가 쓴 <보이지 않는 배우>란 책을 보면, 일본의 국민 배우 두 명이 나와요. 첫 번째 배우가 나오면 관객들이 그 배우만 본대요. 반면에 두 번째 배우가 나오면 관객들이 달을 본대요. 항상 그걸 마음에 두고 무대에 오르려고 해요. ‘배우로서 관객에게 뭘 보여줘야지’ 가 아니라. 달을 보여주고 없어져야 하는거죠. 지현준이란 내 이름 석자는 의미 없다. 정확한 거울이 돼야 한다는 마음인거죠.”

-연극이 시대의 거울이 돼야 한다는 의미인가
“‘연극은 시대를 살아가는 영혼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게 정답이에요. 하지만 요새 많은 예술들이 외형적인 거울을 들이미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영혼의 거울을 들이밀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그걸 보기 위해선 지루하고 재미없어요. 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어떤 고통이 지나가면 뭔가가 와요. 내가 편해서 얻는 기쁨과 다른 무언가죠. <스테디 레인>이 그런 작품입니다. 정말 연극 냄새 나는 연극이죠. 그 부분을 건드리기 위해서 다들 충분히 고민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냥 돌아가시진 않을거라 생각해요.”

-10년간 연극배우로 살아오면서 무슨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나
“‘내가 조금씩 나은 인간이 되어 간다. 그래서 잘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요. 사실 연극은 흥했던 시기가 있긴 하지만, 어느 시대나 주류인 적은 없었어요. 연극은 시대의 흐름과 반대로 가야 하는 책임이 있어요. 문제가 있으면 연극을 통해서 스스로 치유된 느낌을 받아요. 사실 연극 배우란 게 가난하고 힘들죠. 하지만 ‘가난하게 하는 힘’이 조금씩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1년간 50만원을 받은 것도 있었는데 ‘연극’의 그런 물질적인 가난함을 말 하는 게 아닌 정신적으로 가난하게 하는 힘이요. 연극은 수많은 생각들을 싹 걷어내게 하는 힘, 그것만 보게 하는 힘이 있어요. 그게 외로운 힘일 수도 있지만 조금씩 성장하게 만들어요. 외로움을 돌아볼 수 있는 힘을 분명 가지고 있어요.”

배우 지현준은 “연극이 인간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소해준다”고 말했다. “‘뮤지컬’은 세상을 살면서 한 도 웃어보지 못한 사람을 웃게 만드는 희열이 있어요. <단테의 신곡> 같은 고전은 삶의 태도,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어요. 멈춰야 보이는 것처럼, 멈췄을 때 그 무언가가 사실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연극이 인간을 멈추게 하고,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 줄 알게 하고,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소해줘요. 고은 시인의 시에 나오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란 말처럼, 평소 살면서 수많은 꽃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데 극장에서 비로소 보게 되는 거죠. 한편의 연극을 통해 자기 안의 꽃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떤 그림을 보고 멈췄을 때, 나만의 음악을 들었을 때도 그렇고요.”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노네임씨어터,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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