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뮤지컬 <아가사> 연출가 김태형

[엔터미디어=공연전문기자 정다훈] 김수로 프로젝트 8탄 뮤지컬 <아가사>는 실제 발생했던 영국의 추리소설 여류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실종사건을 소재로 한다. 실종된 열하루 동안 아가사에게 있었던 일을 영웅 테세우스의 미궁 신화를 끌어들여 재구성한 것. 아가사가 내부의 괴물을 극복하고 용기를 내서 찌르고 나오는 과정이 이야기의 중요한 축이다.

‘살인의 여왕’ ‘죽음의 공작부인’ 영국의 대표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궁 속 내면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연출가 김태형을 만났다.

■ ‘삶의 용기’를 주는 작품 <아가사>

-한지안 작가가 쓴 <아가사> 대본을 읽고 연출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점은 뭐였나
“작가는 자신이 쓴 인물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데, 살인에 대해 써야 하는 추리소설 작가는 살인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얼마나 괴로웠을까. 작가를 보는 시선이 왜곡돼 있는 데 그걸 견뎌내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궁극적으로 이 모든 걸 극복하는 숭고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점이요. 창작자 입장에서 눈물나고 어떻게든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이 작품이 창작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 건가? 무대화시키면서 염두해 둔 부분을 더 말한다면.
“창작자의 고통에 대한 부분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자위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나. 아가사가 내부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내서 찌르고 나온다. ‘삶의 용기’가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봤어요. 그녀가 한 것과 비슷하게 용기를 내고 한 발 나아가 이겨내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첫 번째 저에게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었기 때문에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이유들이 무대화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요.”

-기자간담회에서 <아가사>는 추리극이 아니라고 했다.
“추리극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추리극인 것처럼 멘트를 쓰고 레이몬드가 탐정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여줘요. 꼬마아이가 열쇠구멍을 보며 하나하나 캐나가는 것이 한 축이고, 아가사와 로이가 알아가는 또 하나의 축 이렇게 크게 두 축으로 진행 돼요. 추리극이라면 다른 축으로 갔겠죠. 또 추리극을 뮤지컬로 보여주는 것은 별로라고 생각해요. 애초부터 추리극인 척 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니에요. 추리극으로 보면 부족한 게 많아요. 추리소설 장르 클리셰를 가지고 놀면서 결국엔 아가사와 로이의 관계를 만들어 논 거죠.

어렸을 때부터 아가사 팬이라 추리극을 해보고 싶어 했어요. 대학교 때 <쥐덫> 공연을 한 적 있는데 ‘이런 우연이 있나?’란 말이 나올 정도로 치밀하지 않았어요. 대본을 완전 뜯어고치고 윤색했어요. 그 때 추리만 가지고 공연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죠. <아가사>는 장르물의 탈을 썼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소원을 풀었다고 볼 수 있겠죠. 다음엔 꼭 SF에 도전하고 싶어요. 제대로 된 뮤지컬이든 연극이든 상관없이요.”

-아가사 레이몬드 로이 이렇게 주인공을 세 명으로 보는 게 맞나
“세 명이 주효한 역할을 하고 있죠. 사실 처음엔 지금보다 더 인물이 많았어요. 또 레이몬드와 로이를 한 배우가 하는 1인 2역 설정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극 해석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어요. 남자 배우가 더 필요했고 분리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의 구도로 가게 된거죠. 한 배우가 아이땐 레이몬드 역할로 성인일땐 로이로 나왔다면 더 재미있는 설정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어요.”



■ “‘로이’는 만나서 싸우고 사랑하고 누르고 결국 무찌르고 나와야 하는 존재”

-아가사 다음으론 로이란 캐릭터에 대한 연출의 애정이 느껴졌다.
“로이는 각자 마음속의 살의, 욕망, 두려움 총체가 튀어나와 투사 된 존재에요.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공연에서 아가사가 끊임없이 살게 해주는 존재로 로이를 설정했어요. 아가사가 자살하려고 마음먹고 자기를 놓으려고 할 때마다 나타나 자살을 도와주든 방해 하는 존재요. 아가사의 악한 부분, 내면의 검은 것으로 없어져야 하고 숨겨놔야 하지만 그녀의 삶을 유지하는 추 혹은 원동력이지 않았을까요. 없으면 무료하고 재미없는 삶처럼 느껴지지만, 거기에 또 지나치게 먹혀 버리면 곤란해지는, 그렇기 때문에 아가사 다음은 로이란 인물에 애정이 갈 수 밖에 없어요.”

-살의란 의미 외에도 창작자로서 미궁 속에 들어가 만난 ‘로이’란 인물에 공감이 된다는 뜻인가?
“늘 새 작품에 임하기 전엔 미궁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있어요. 미궁자체를 설계해야 하는 작가는 더 많은 두려움이 있겠죠. 공력 있는 작가도 매번 찌르고 나온다는 게 쉽지만은 않죠. 그 다음에 아가사는 로이란 존재를 어떻게 했을까요? 들끊는 로이를요. 아가사가 평생 80편의 소설을 완성 했다고 들었는데 매번 ‘로이’를 만나지 않았을까요. 만나서 싸우고 사랑하고 누르고 결국 무찌르고 나왔겠죠. 마치 시지푸스 신화 같이 매번 그렇게요.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매력적이면서 두려워요. 아가사는 로이를 버리지 않고 필요 할 때마다 매번 만났을 거라고 봤어요.”

-‘로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느껴진다.
“극 마지막에선 아가사가 내면의 꿈틀거리는 ‘살의’를 죽이면 로이는 사라져요. 수정을 하면서 지이선 작가에게 도움을 얻었는데, 새 작품을 쓰고 만드는 건 늘 미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어요. 중심에 가면 무찔러야 하는 괴물이 있어요. 그걸 알기 때문에 힘을 내서 괴물과 싸워야해요. 붉은 실과 함께 밖으로 나오면 한 편의 공연이 올라가고 있어요. 결국 창작자들과 늘 함께 있는 존재인거죠.”

-공연 속에선 탱고와 왈츠로 아가사와 로이의 사랑과 전투를 그려낸다.
“탱고의 기본적 성격이 정열과 관능이에요. 에로스는 파토스 그리고 죽음과 닿아있죠. 왈츠는 ‘죽음의 무도’란 의미로 잘 어울린다고 봤어요. 극 중에서 사람을 독살 하고 성공했다고 믿을 때 왈츠를 춰요. 자신이 미워했던 이들이 죽은 걸 보고 기뻐하면서 춤을 추는 거죠. 자신의 마음을 터트리고, 욕망을 투사하고 관능을 쏟아낸 뒤 춤을 추게 한거죠. 왈츠는 일부러 바리에이션을 뒀어요. 처음엔 아가사가 로이에게 끌려가듯 나른하게 추다가 나중엔 아가사가 로이를 리드하면서 춰요. 욕망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생각, 자기를 지배하는 살의를 극복한다는 의미로 넣은거죠.”

-김수용, 진선규, 박인배 이렇게 세 배우가 로이로 분한다. 각자의 색채를 입히도록 했나?
“로이 셋 모두 어려워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분명한 라인은 ‘로맨틱했으면 좋겠다’였어요. 계속 그런 건 아니고요. 많이 말 했던 건 ‘밀당’이에요. 남자가 튕기는 것 같고 쿨한 척 도망가야 따라온다. 장난도 치고 유머도 많은데 아가사가 로이에게 빠져들게 갔으면 좋겠다란 말도 했어요.

로이가 신사처럼 젠틀하기만 하면 재미없죠.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욕망, 두려움, 비도덕적인 자아 잖아요. 무섭고 싫지만 굉장히 매력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나쁜 남자인데 이 사람과 결혼하면 망할 것 같은 캐릭터요. 공연이 올라가고 어느 정도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않았나 생각해요. 배우 자체의 매력도 함께 보여지고 있고요.”



■ “레이몬드는 관객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인물”

-아가사에게 온 편지의 이니셜은 같은 R이다. 레이몬드 와 로이 모두에게 온 편지인가
“애초에 한 배우로 했기 때문에 모호하게 정리 된 게 있는데, 지금은 레이몬드라고 보고 있어요. 한 배우로 한다고 했을 땐 레이몬드에겐 로이와 다른 이성적이고 정의로운 면을 부여하려고 했거든요.

<아가사>는 처음부터 아가사와 레이몬드가 계속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극이 시작해요. 사실 레이몬드도 실존인물이 아니라 추리소설 속 인물로 잠깐 가자는 의견도 있었어요. 레이몬드의 기억이 왜 생각이 안 나냐? ‘넌 소설 속 캐릭터이고 작가가 거기까지 밖에 안 썼어’라고 답하려고 했는데 계속 고치는 과정에서 때려치자라고 결정됐어요. 이쪽 부분에선 레이몬드, 또 이쪽 부분에선 로이로 나온다는 게 너무 무리수 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렇게 계속 수정과정을 거치면서 작가는 아가사처럼 실종 된 듯 골방에서 뭔가를 써야 해서, 연출인 저보고 ‘당신이 로이’라는 말까지 나왔어요(웃음)”

-추리 소설가를 꿈꾸는 소년 레이몬드가 어른이 돼 편집자의 압박에 시달리며 글을 쓰는 모습이 아가사가 처한 입장과 겹쳐진다.
“아가사와 로이, 레이몬드를 중심으로 이중 삼중의 이야기 틀을 가지고 있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아가사가 레이몬드에게 자기가 겪었던 일을 이야기 해주면서 레이몬드가 한 단계 성장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이야기 구조에요. 밖의 큰 틀은 레이몬드가 기억을 감추고 숨겨왔던 트라우마를 아가사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극복하면서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 테마를 늘 만들어 보고 싶어했고 해 보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레이몬드 이야기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사실은 관객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인물로 레이몬드를 설정해 레이몬드의 시선을 따라서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죠.

그런데 ‘레이몬드’란 인물을 만들어내는 게 어려웠어요. 그냥 화자이고 개입하는 인물이 아니라 기억을 어느 정도 잃어버린 인물이에요. 그 원인은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과 어른들에 대한 모순을 본 ‘환멸’ 일 텐데 공연 근원적으로 이걸 어떻게 그려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로이에 비해 레이몬드 역할을 입체적으로 만들기 어려웠다는 의미인가
“레이몬드는 아가사와 친하게 지내며 무슨 일을 겪었는데, 자세한 부분을 잊고 어른이 된 거죠. 그러다 아가사가 실종 된 기간에 책이든 칼럼이든을 써야 해요 그 기간중에 불현듯 뭔가를 깨닫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나아가는 것으로 설정했어요. 그렇다면 ‘기억을 왜 잃어버렸나? 왜 잊고 있었지?’ ‘이런 지점들이 잘 보이고 있나?’ 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로이에 비해 흐지부지 되는 것 같아 고통스러워했어요. 4고에서 연습을 시작했는데 공연은 11고가 됐어요. 어떤 원고에서는 레이몬드란 인물이 명확하게 보이는 게 있는데,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들을 수정 하면서 그 틀이 바뀌는 것도 있었어요”



■ 레이몬드는 왜 괴물이자 빨간 실이 되었나

-아가사는 남편의 외도, 믿었던 하녀의 배신, 과도한 세간의 관심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런데 악마의 얼굴들 중에 레이몬드(박한근 김지휘 윤나무)도 있다.
“그렇죠. 레이몬드가 아가사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아가사의 미발표 원고를 유출한 건 악의를 가지고 한 게 아니라 기자 폴이 꼬마 아이에게 ‘너 맨날 아가사 소설 훔쳐 읽었다고 했는데 재미있는 거 없냐? 네 소설 쓰게 해줄 테니까 한번 보자 ’ 물어보니 아이가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었어요. 아가사는 천재인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전개됐겠죠. 아가사 입장에게 결과적으로 레이몬드의 행동들이 짐이고 괴물처럼 다가올 수도 있는데, 레이몬드 입장에선 그럴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게 돼요”

-마지막에 레이몬드의 잘못을 확실히 드러내기도 하지만, 중간 중간 레이몬드와 아가사의 연결고리를 더 드러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레이몬드가 나쁜 놈이다’는 걸 처음부터 드러내는 건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너무 숨겼더니 잘 모르겠다는 말도 나왔는데 그 부분이 아쉬웠어요. 처음 대본엔 레이몬드와 폴 둘이 하는 장면이 더 있어서, 폴이 레이몬드에게 끄집어내고, 레이몬드가 신나서 폴에게 더 이야기해주는 것들이 있었는데 수정과정에서 덜 보이는 것도 있는 거 같아요.

레이몬드의 행동 때문에 아가사가 괴로워하는 게 많이 노출이 안 된 점도 그랬구요. 작가라면 ‘누가 내 이야기를 팔아먹었나?’쪽 보다는 처음엔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가 뻔한건가?’란 생각을 갖게 됐을텐데...그게 사실 창작자에게 괴로운거고. 나중엔 자기 아이디어가 누군가에 의해 도용 당하는 걸 알고 견디기 힘들어해요. 그 설정을 주고 싶었거든요”

-폴은 중간 중간 아가사의 <오리엔탈특급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 줄거리를 코믹스럽게 들려준다. 이 장면들이 레이몬드가 알려준 아가사 소설을 폴이 팔아 먹은걸로 이해하면 되나
“폴과 레이몬드가 예전부터 친해서 그렇게 지내왔고 그 과정에서 그런 인들이 벌어졌겠죠. 장난스럽게 풀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너무 진지하게 가면 스포일러처럼 보일 수도 있어서 쇼스타퍼 식으로 폴의 유쾌한 송으로 만들어냈어요. 관객에게 유쾌한 걸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홍우진 오의식 두 배우 모두 유머나 그런 성향, 호흡이 좋아서 결국 그런 쪽으로 밀어붙이게 됐어요.”

-아가사는 레이몬드가 단초가 돼 최악의 상황으로 가지 않게 되는가? 중의적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범인은 아가사죠?’란 말이 다각도에서 해석하게 만든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보단 일부로 모호하게 넘어가는 게 있어요. 설정은 아가사가 아직 완성 전인 소설 발표를 위한 티파티 초청장을 보내요. 마음먹고 보낸 거죠.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내주고, ‘난 당신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어요’라고 발표를 하고 쭉 읽어보게 해요. 그런데 초대받은 그들의 죄악이 드러나니 충격 받고 놀라게 되겠죠. 그 다음에 미워했던 그들을 독살하려고 마음 먹었을겁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자신의 의도를 꼬마 레이몬드에게 들켜버린거죠. 꼬마가 아가사 소설을 읽으며 ’범인은 이 사람이죠‘ 말을 해요. 사실 이 말은 ’범인은 (작품 속 소설)’미궁 속의 티타임‘작가죠 라고 꼬마애가 말한 거겠죠.

그 상황에서 아가사는 열세 살 꼬마에게도 들킬만한 살의를 풀어냈다는 마음 때문에 자책감과 자괴감이 들어서 집에서 뛰쳐나갔다고 설정하고 있는거죠. 뒷부분에서 또 한 번 티파티가 일어나는 건 아가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로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자신에게 살의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죽이고 싶었던 건 숨기지 말고 터트리자란 마음을 먹고 살인을 머릿 속에서라도 행하는거죠. 그렇지만 아가사는 죽을 때까지 살인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거나 일부러 잔혹하게 이슈가 될 만한 걸 끄집어오거나 하지 않았던 작가에요. 늘 머리싸움, 심리싸움을 글 안에 썼죠. 그리고 ‘살인은 즐길 일이 아니라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고 말 하듯, 살인자가 반드시 처벌받아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게 작가의 세계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각(살의)을 하고 있는 자신을 용서 못하는거죠. 이야기가 조금 복잡하죠?”

-‘라비린토스’ 이야기에 빗대면 레이몬드는 아가사에게 괴물이자 빨간 실로 작용하게 되는가
“레이몬드는 궁극적으로 나쁜 인간은 아니죠. 아가사가 집안 사람들과 관계, 그런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마음을 레이몬드에게 들킨 뒤, ‘이래선 안 되겠구나’ 충격을 받아요. 그래서 뛰쳐나가 혼자 있을 때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오게 하죠. 자살을 꿈꾸고 뛰쳐나간 작가가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된 힘은 뭐였을까요. 환상적인 공간에서 레이몬드가 말 하는 ‘그 다음 이야기 뭐에요?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거죠?’ 그것 아니었을까요. 부끄럽지만 창작자들을 끊임없이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다음 이야기’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인 것 같아요. 한편으론 부담이 되겠지만 그게 창작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봤어요. 레이몬드가 아가사의 손에 빨간 실을 쥐어준거죠.”

-배해선 양소민 두 배우에겐 ‘아가사’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나
“아가사가 이러 이러하니 어떤 그림을 그려내라는 이야기는 안 했어요. 상황 상황을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도중 뭔가 불분명 할 때만 말을 해요. 두 배우 모두 잘 받아들여서 많이 맡기는 편이에요. 아가사가 추리 소설 작가이고, 실존인물이란 생각을 중심에 두기 보다는 자기 주체적인 일을 하고 있는 여성으로 바라보라고 했어요. 두 배우 모두 나이대가 어리지 않고 배우로 살면서 겪었던 일 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자기 삶에 닿아있을거다’ 이 과정은 (자신 안의) 로이를 발견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인정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식의 말을 했어요.”



■ 건맨의 붉은 의상에 대해 궁금한 것들

-아가사란 개인의 일대기, 아가사의 작품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더 흥미롭게 관극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아가사의 집 이름도 스타일스 저택이고, 아가사의 걸작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포맷도 가져왔다. 초청장이 배달되는 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이야기가 떠오르게 했다.
“아가사는 실제적으로 자신이 살던 집을 소설 속 이름과 같은 스타일스 저택이라고 불렀어요. 낸시 닐이란 정부의 이름도 똑같아요. 또 아가사는 전쟁 때 약사로 일한 적이 있어 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요. 그녀의 작품을 보면 칼보단 독살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요. 칼로 찌르는 것 보다 독은 증거도 덜 남게 되죠. 극 안에선 힘 없는 약자들의 칼이란 뜻도 있구요.

아가사는 실종 사건 이후 더 유명해졌어요. 실종 사건을 겪으면서 억압 혹은 압박 받은 걸 벗어난 거 아닌가란 생각도 들어요. 그 뒤 이혼하고 새로운 남자랑 결혼생활을 쭉 유지했어요. ‘그 사건이 작가 개인적으로도 탈바꿈 할 수 있었던 계기가 아니였을까’로 생각했어요.”

-아가사가 스트리크닌 약을 먹고 환각 속에서 태어난 존재가 건맨인가?
“아가사가 로이를 환영으로 깨닫게 되면서 빨간 옷으로 입고 나와요. 살아있는 남자로 생각하고 로맨스를 키워가다 어느 순간 깨닫게 돼요. ‘이 남자가 내 머릿 속에서 만들어낸 환영이구나.’ 아가사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거죠. 그래서 로이가 아닌 건맨으로 들어올 때는 비일상적 의상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의도가 이런 거 였고, 디자인이 받아들여져 의상이 나왔는데 개막 후 수정 요구가 들어왔어요.”

-건맨의 의상이 교체된 건 붉은 의상에 대해 악평이 많았기 때문인가?
“아가사가 상상한 건맨을 형상화 하기 위래선 적합한 의상이라고 생각했는데요...의견이 많았어요. 관객들 평도 있지만 컴퍼니에서 의견이 들어오는 것도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임시로 첫 장면에서 입었던 검은 의상을 입고 나와요. 그런데 원래 제가 의도했던 임팩트가 없어서 다시 제작하는 중이에요.”

-2주간의 프리뷰 동안 수정이 있었다. 연출적으로 충족이 됐나
“매번 공연을 올릴 때마다 만족을 못하지만, 대본 읽었을 때 좋았던 부분이 충족이 안 된 게 있어요.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덜어내고 수정하면서, 처음에 대본을 읽으면서 느꼈던 정서에 전부 다가가진 못한 건 같아요.”



■ “연출가의 의무는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설득력”

-과학고, 카이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연극 연출가가 됐다. 몇 년 차인가?
“연극을 시작하게 된 건 자본주의 모순에 대해 고민하며 메신저 역할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카이스트를 졸업해서 자본주의의 개가 되어 사는 것은 아닌가?란 회의감도 있었구요. 2007년, 제 나이 30세에 연극 연출을 시작해 만 7년, 횟수로 8년차가 됐어요. 운이 좋아 쉬지 않고 매년 연출을 해왔어요. 정말 운이 좋은 거죠. 그 동안 요령은 많이 생긴 것 같은데 반짝반짝 하는 게 없어서 괴로워요. 그리고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아 부담스러워요. 기대와 부담이 스트레스인데 이런 부담이 어쩌면 ‘붉은 실’ 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관객들은 김태형 연출에게 뭘 기대할까?
“지금까지 이런이런 공연(<모범생들><연애시대><히스토리 보이즈>)을 했다는 걸 보고 뭔가를 기대하겠죠. 데뷔 초반 제가 무슨 공연을 하든 신경 쓰지도 않았을 때는 부담이 없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제 공연을 본 사람들이 ‘재미없잖아’ 란 말을 했을 때 그게 스트레스로 다가오나봐요. 기대감을 원동력 삼아 해 나가고는 있지만요.”

-공연이 재미없으면 다 연출 책임인가? ‘연극은 배우 예술이다’는 말은 거짓말인가?
“공연이 배우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공연이 재미없으면 8할이 연출의 몫이 돼요. 물론 배우가 무대에 서야 관객이 볼 수 있고 얻어갈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죠. 하지만 그 판을 깔아주는 게 연출인데 그걸 못 깔아주면 배우가 힘들어지는 거죠. 드라마는 작가가 써주는 거지만, 그 드라마를 요리하고 정리하는 건 연출의 몫입니다. 배우의 연기를 끌어내 관객과 만났을 때 그 작품이 빛나게 만들어주는 게 좋은 연출가일 텐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저만해도 어떤 공연을 보고 ‘별로다’ 싶으면 연출 탓으로 돌리죠. ‘연출의 능력이 부족한지? 가치 있는 이야기인지?’ 이런 판단 후에 배우, 의상, 무대 등이 좋은지 보게 되요.”

-연출의 책임이 연출의 예술로만 보여지게 될 수 있다. 극단적인 표현으로 연출만 보이는 작품이 있고, 배우가 돋보이는 작품이 있다. 이렇게 구분 했을 때 연출의 색이 제대로 보여야 한다는 의미인가
“쓸데없는 책임감인지, 아니면 제가 이기적이어서 ‘내가 다 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요. 알게 모르게 제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씬을 정리하고 해결하는 게 있어요. 기본적으로 어떤 이야기이고, 뭘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인가에 따라 연출이 해야 하는 방식은 달라지죠. 김태형 연출의 색깔이 묻어나는 것?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있겠지만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공연이라는 게 뭔가를 전달해야 하는 건데, 그렇기 위해서는 관객이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고, 공연 전체의 음악성 그러니까 강약과 리듬감에 대한 고려를 많이 해야죠. 결국은 (연출가로서) 배우를 설득하는 거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으로 관객을 설득하는 거라고 봐요. 그런데 설득에 대한 근거는 텍스트를 연출이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느냐에 있다는 거죠. 그걸 가장 매력적으로 설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연출의 힘 아닐까요. 설득의 과정을 거친 연출이 만든 그림을 배우가 돋보이게 수행하는 것, 그게 연출의 색이라고 볼 수 있겠죠.”

-추후 일정은 어떻게 되나
“연극 <히스토리보이스> 작업이랑 안산에서 하는 뮤지컬 <반짝 내맘> 준비중입니다. 그리고 오세혁 작가랑 <홀연했던 사나이> 뮤지컬화 하는 작업도 하고, 가을에는 영화 원작인 <두결한장>을 연극으로 만들 예정이에요. 추민주 누나가 대본 각색을 했는데 영화보다 대 본을 잘 썼어요. 전 연출로 참여해요.

김태형 연출은 “창작자들은 공연장에 찾아온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연 보러 극장 찾아가는 것, 사실 귀찮잖아요. 집에서 편하게 TV만 켜면 인터넷만 열면 다양한 콘텐츠가 있는데, 이렇게 추운 날씨에 극장에 찾아와요. 관객들이 오는 게 신기하기도 하지만 고마워요. 그렇게 온 사람들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음의 위안, 그런 걸 얻어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공연은 영화나 다른 장르에 비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죠. 어찌 보면 모순 같은데 그게 중요한 건 체험을 하게 해요. 사진만으로 영상만으로는 볼 수 없는 체험이잖아요.”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정다훈, 허영옥, 아시아브릿지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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