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코리아’라서 가능한 아날로그적인 매력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MBC 수목드라마 <미스코리아>는 쨍하면서도 살짝 오래된 듯한 화면의 질감에서 90년대의 <베스트극장>을 닮은 아날로그적인 매력이 느껴진다. 하지만 <미스코리아>는 추억에 푹 잠기게 하는 그런 종류의 드라마는 아니다. <미스코리아>의 배경인 97년 겨울의 대한민국이 그렇게 행복한 시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절은 이 드라마의 초반부에 등장했던 백화점 엘리베이터 같던 상황이었다. 모두들 꼭대기까지 올라갈 거라 믿었지만 IMF로 한순간에 엘리베이터는 멈추었고 결국에는 많은 이들이 몇 달 사이에 엘리베이터의 추락 같은 일들을 경험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엘리베이터걸들의 친절한 와이키키 미소, 아버지들의 인자한 미소, 어머니들의 희망을 믿는 미소,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던 삶이 아름답다고 믿는 어떤 여유로운 미소마저 사라졌다.

<미스코리아>는 그 아팠던 겨울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절절하게 파고드는 대신 후추를 뿌리듯 간질간질하게 그린다. 하지만 그 간질간질함 속에 그 시절을 살아갔던 이들의 풍경이 담겨있다. 백화점의 마네킹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했던 엘리베이터걸들의 설움, 미스코리아대회를 준비하는 미용실에서 벌어지는 우아하지 못한 속내를 보여주는 장면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누군가는 그 간질간질함에 킬킬대며 웃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코끝 찡한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드라마의 중심에 퀸미용실 마원장(이미숙)과 비비화장품의 생사가 걸린 문제 때문에 자기의 첫사랑을 미스코리아로 만들려고 애쓰는 김형준(이선균)과 엘리베이터라는 갇힌 공간에서 벗어나 세상사람 모두가 환호하는 미스코리아 진을 꿈꾸는 오지영(이연희)이 있다. 이 세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산 인물이지만 각각 다른 방식으로 그 시절을 살아온 이들이다.

마원장은 짧게는 미스코리아대회 넓게는 미용계의 권력을 손에 쥔 여인이다. 더 나아가 그녀는 미스코리아대회의 속성 혹은 돈과 화려함이 한데 얽히는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물이다. “가난을 벗고 돈을 걸쳤다고 생각해. 이 길만 걸어가면 네 평생이 달라진다.” 그녀는 지하철 안에서 수영복 차림의 미스코리아 연습생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워킹연습을 시킨다. “자, 너도 이제 한 마리 사자가 되었구나. 미스코리아 대회는 정글이야.” 지영에게는 얼굴이 작아 보이는 잔뜩 부풀린 사자머리를 만들어준 뒤에 미스코리아대회의 진실을 알려준다.



한편 목욕탕집 아들이었던 형준은 우리나라 최고 대학 출신의 수재다. 하지만 그는 공부머리는 좋아도 아직 돈에 대한 감각은 영 별로라서 그의 사업체 비비화장품은 몰락 일보직전이다. 더구나 그는 사랑에 대해서는 둔재이기도 하다. 자신이 첫사랑이었던 지영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그리고 다시 만난 그녀에게 또 어떻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폼은 잡아도 폼이 안 나는 그 시절 수많은 헛똑똑이 오빠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형준의 첫사랑이자 마원장이 처음에 미스코리아 진으로 점찍었던 담뱃가게 딸 지영은 또 두 사람과는 다르다. 그녀는 얼굴 예쁘고 씩씩하고 나름 정의롭지만 영악하지 못하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늘 당하기만 한다. 첫사랑 형준은 대학에 입학한 후 공부와는 거리가 먼 여고생이었던 그녀를 무시한다. 느물느물한 직장상사는 바른말하는 엘리베이터걸인 그녀를 빈정대기 일쑤다. 그런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일탈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승객이 아무도 없을 때 억지미소를 짓는 대신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삶은 계란으로 재빠르게 허기를 때우는 정도다.



드라마 <미스코리아>는 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이들이 97년 미스코리아대회를 계기로 만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다. 이들은 각기 다른 욕망으로 미스코리아를 꿈꾼다. 미스코리아를 탄생시킨 최고 미용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회사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지금과는 다른 삶에 첫발을 내딛기 위해서. 그리고 세 주요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인물들이 부딪히면서 주인공들은 성장하고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무대 위의 미스코리아대회처럼 “아름다운 밤이에요.”의 분위기가 아니라 그 뒤편의 먼지 풀풀 날리는 대기실처럼 간질간질 정신없다.

하지만 이 간질간질한 <미스코리아>는 종종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아름다운 장면들을 보여준다. 고교시절 담뱃가게 딸과 목욕탕집 아들이었던 지영(이연희)과 형준(이선균)이 서로 가까워져 가는 장면을 묘사한 과거회상들이 특히 그렇다. 그중에서 두 사람이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함께 도시의 아이들의 ‘달빛 창가에서’를 부르는 장면은 <미스코리아>의 달콤한 명장면 중 하나다.

물론 <미스코리아>는 재미의 엑기스만 모아놓은 매끈한 요즘 드라마와는 좀 거리가 있다. 보자마자 웃기고 슬픈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이해하고 생각하고 또 되새김질 해 봐야 느껴지는 재미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재미를 찾는 그 순간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입술을 움직여 “와이키키, 하와이” 미소 짓는 순간이 찾아온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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