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극 <나쁜자석> 배우 김재범 정문성

[엔터미디어=공연전문기자 정다훈] ‘자석 돌풍’ 신드롬을 일으킨 연극 <나쁜자석>(Our bad magnet)은 고든, 프레이저, 폴, 앨런 네 소년의 9살, 19살, 29살의 성장 과정을 좇으며 그들이 가슴 속에 지니고 있던 유년시절의 비밀과 기억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풀어놓고 있는 작품.

저 마다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서로를 당기고 때로는 밀어내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숨막히게 아름답고 슬프게 그려내고 있는 점이 매력 포인트. 네 친구들의 유년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중요한 장소인 용바위 언덕은 물론 낡은 나무 의자와 바닥으로 표현되는 폐교, 푸른 하늘과 바다를 아련하면서도 서정적으로 나타낸 무대 디자인 또한 작품의 색을 제대로 살린 일등공신이다.

연극 <나쁜자석>의 두 배우 김재범과 정문성을 만났다. 반전의 매력이 가득한 인터뷰 시간이었다. 연극 속에서 ‘TV를 보지 않는다’고 말한 고든과 달리 실제로 김재범 고든은 TV보는 걸 상당히 좋아했고, ‘TV를 안 보면 억울할 정도로 재미있는 게 많다’고 말했던 프레이저와 달리 정문성 프레이저는 TV 보는 걸 즐기지 않았다. 낯을 가린다고 알려진 김재범은 실제론 잔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유쾌함이 넘쳐 날 것 같았던 정문성은 외로운 프레이저와 닮은 구석이 분명 있었다.

■ 상처를 드러내며 가까워진 두 친구 고든과 프레이저

-최근 수정 장면이 있다고 하던데 어떤 장면인가?
정문성: 고든의 장례식 장면 전에 프레이저랑 고든이 함께 나오는 장면이 추가 됐어요. 고든을 추억하는 장면으로 노래 한 곡도 추가 돼 대략 3분 가량 장면이 늘어났어요. 장례식 날 프레이저가 언덕위에서 옛날을 회상하는 거죠. 예전에 용바위 언덕에서 같이 불렀던 노래를 회상하는데 노래 후반부에 고든이 사라져요. 그리고 장례식이 시작돼요.

-장면이 추가 된 이유와 누구 의견이 반영 된 건가?
정문성: 급하게 장면을 만들어서 들어간 건 아니고 이번 시즌 시작하면서 노래 세곡을 추가하려 했는데, ‘너무 성급히 변화 시키는 게 맞나?’ 란 생각이 들어서 조금씩 수정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하나씩 시도하는 중이죠. 극이랑 어우러지는지 좀 더 고민하며 수정을 하고 있어요. 연출님과 배우들 다 의견을 냈어요.

-문성 배우는 지난 공연에 이어 다시 한 번 프레이저 역을 맡게 됐다. 다르게 다가온 감정들이 많을 것 같다.
정문성: 다르게 다가왔다! 맞아요. 이 역할은 배우가 뭘 해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또 뭘 해도 혹은 안 해도 (프레이저로) 표현이 안 되는 게 없어요. (겉으로 보기에)다른 연기를 해도 프레이저란 인물로 다 연결 돼 있어요. 그 날 그날의 감정이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어서 좋아요. 작년엔 포커스가 일정한 곳에 가 있어서 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면, 이번엔 그걸 경험한 뒤라 그런지 다른 것들이 보여요. 주된 감정 이외에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됐거든요.

추가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내가 고든이랑 둘이 있었을 때 고든을 어떻게 대했을까?’ 란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내가 케어를 했겠지. 그러다 짜증도 났겠지’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프레이저의 감정이 좀 복잡하다고 해야 하나.

-고든은 웃지 않지만, 프레이저는 애써 밝은 척 한다. 고든과 프레이저는 똑같이 외로운 아이인가?
김재범: 고든은 환경적인 영향이 커요. 어릴 때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학대 받고 자란 아이에요. 어머니가 안계시고 아버지와 둘이 사는데, 아이 입장에선 어머니가 죽었다기 보다는 아버지의 학대에 못 이겨 사라진 거라고 봤어요. 고든을 사랑하지만 자식을 두고 도망 간거죠. 그게 고스란히 고든에게 이어져, 공황장애 같은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고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해요. 환경적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정문성: 프레이저는 좀 다른데, 이 아인 아버님도 게시고 어머님도 계시는 아이에요. 게다가 그 분들은 마을 사는 사람들이 다 아는 의사에요. 프레이저는 항상 공부도 1등을 하고 반장이죠. 운동도 잘 하고 또래들 사이에선 대장의 위치에 있어요. 겉으로 봤을 때 누구나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세계에 사는 아이이고,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따지고 보면 하나도 가지지 못한 아이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완벽한 세계에는 이 아이를 위로 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하나도 없어요.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억압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살아왔거든요. 마치 자기 자신이 없는 것처럼 살아 와 외로운 아이요. 그런데 그 외로움을 고든에게서 느껴요.



-그런데 고든과 달리 프레이저는 사람들 앞에서 웃는다
정문성: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라와 몸에 박히다보니 그렇겠죠. 제 프레이저는 집에서 아빠에게 폭력을 당해요. 겉으로 봤을 땐 행복한 집안이지만, 아빠는 반박할 수 없는 위압적인 존재에요. 저 사람에게 잘 해야 한 대라도 덜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요. 내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집을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아들인 내가 웃어야 최고라고 생각하겠죠. 그래서 행복하지 않지만 웃었겠죠.

TV를 보면, 폭력당하는 아이에게 일기를 써서 가져오라고 하면, 폭력을 행한 계모를 제일 예쁘게 그린대요. 계모가 너무 잘해주셔서 행복하다고 표현하는데, 사실 내가 굽신거리고 잘해야 하는 최고의 공포의 대상인거죠. 행복한 척 하는 게 몸에 배어있는 프레이저의 웃음은 행복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건데, 이 친구 고든이 자기는 웃지 않는다고 했을 때 굉장히 충격이지 않았을까요.

-프레이저는 고든에 대해 갖게 되는 첫 마음이 호기심과 동질감이 반반씩 섞였던 건가
정문성: 아홉살 프레이저는 고든의 ‘행복하지 않아’ 란 말에, 웃을 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를 바로 인지하지는 못해요. 어떤 날은 아 정말 웃을 수도 없게 불행한 아이라고 느껴요. 또 어떤 날은 고든은 ‘행복하지 않아. 그래서 안 웃었던 아이야’ 란 생각이 들어요. 그 날은 제가 비겁해지는 날이 되고, 그래서 고든이 나보다 훨씬 용감한 아이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그리고 또 어떤 날은 돌아서 앉으면, ‘행복하지 않은데 난 왜 웃었지?’ 이럴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저 아이랑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고든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도 있긴 해요. 프레이저 입장에선 자신이 살아온 인생처럼, 무리들 중 최고 대장이기 때문에 이 아이를 케어하려고 해요. 하지만, 고든이 그 말을 하고, 행복에 관해서 말 하고, 아픔이 느껴지는 그 순간부터는 진짜 본질적인 아픔이 궁금해져요. 결과적으로 프레이저와 고든은 극도의 공포의 공간인 폐교에서 그 누구한테도 드러내지 않는 상처를 드러내면서 완벽하게 가까워집니다. 프레이저는 친구들에게도 요만한 가면을 쓰고 있었던 아이인데, 고든 앞에서 그 가면을 벗은거죠.

-고든은 프레이저를 어떤 존재로 생각했을까. 엄마처럼 감싸주는 존재로도 보였다.
김재범: 고든에게 프레이저는 엄마 이후로 처음 손을 내밀어 준 아이인거죠.
정문성: 프레이저에게 고든은 유일하게 진짜 100퍼센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요. 프레이저 입장에선 엄마도 나에게 뭐라 하니까 좋은 의미의 ‘엄마’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고든 엄마도 도망갔다면, 결국 자식을 사랑했지만 놔 버린건데...제 입장에서 고든은 ‘내 감정을 100퍼센트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고 말 하고 싶어요. 그건 보통 사람에게는 엄마일 수도 있겠죠.



■ “고든의 이야기 속엔 잠재 돼 있는 또 다른 고든이 들어있다.”

-네 친구 중 고든과 프레이저의 관계의 끈이 가장 깊다. 그렇다면 폴이랑 앨런은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나
정문성: 고든 폴 앨런 모두 제가 사랑하는 친구들입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분명히 좋은 친구들인데, 고든의 죽음으로 인해서 관계가 틀어져버린 친구들이요. 고든이 죽고 나서 폐인이 된 나를 부모도 자식 취급을 안 했을 텐데...서로의 안부를 묻는 세상에 두명 밖에 없는 친구죠. 인간 프레이저에겐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지만, 그것보다는 고든의 죽음이 더 지배적이라 그래서 가슴에 못을 박았다고 볼 수 있어요. 마지막 29세 폐교 장면에서 이 친구들하고 완벽한 이별을 마음먹고 나면은 위악을 부리던 것에서 벗어나요. 이 친구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 이 만큼 올라와요.

-고든이 바라보는 폴과 앨런은 어떤가
김재범: 친구죠. 프레이저 주도적으로 손을 내밀어주긴 했지만 그들 역시, 자의적 타의적으로 손을 내밀어준 존재입니다. 그동안 난 한 번도 어딘가에 속해있지 않아봤고 철저히 혼자였기 때문에, 이 아이들의 존재만으로 나에게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폴은 저에게 잘 해주진 않았을 것 같아요. ‘저 자식 언제까지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을꺼야’ 란 대사도 있는데, 공적인 자리에서는 앨렌이 잘 해줬을 것 같아요. 두 친구 모두 놓을 수 없는 끈 같은 존재죠.

-고든은 프레이저와 폴과 앨런을 만나기 전까진 이야기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였다
김재범: 나만의 공간에서 이야기를 쓰는 동안은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어요. 다른 세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 같았던거겠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계속 이야기를 썼던 것 같아요.

-고든이 쓴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분에서 더블 캐스팅 된 송용진 배우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배우 개인적으론 어떤 포인트를 둔 건가?
김재범: <하늘정원>이야기를 말 할 때, 내레이터 적인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고든
보다는 되고 싶었던 또 다른 고든을 그리고 싶었어요. ‘난 이런 아이가 되고 싶은...’잠재 돼 있는 또 다른 고든이라고 생각하고 환상 안에서 이야기를 들려줘요. 고든은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 수 없어요. 어쩌면 자신이 표현해보고 싶은 고든인거죠. ‘내 안의 또 다른 나’인데 내가 되고 싶은 나에요. ‘난 이런 고든이 되고 싶은데 현실의 나는 왜 이렇지?’ 란 생각에 웃기도 하고요. 연출님 역시 이 장면 안에서 웃어도 상관없다고 말씀 하셨어요. 반면에 <나쁜자석> 이야기를 들려주는 19세의 나는 굉장히 예민하고 화가 나 있는 인상도 주고 되게 부정적인 태도도 가지고 있어요. 이 모습 역시 고든의 잠재된 모습으로 봤어요.

-당시 어린아이였던 고든이 <하늘정원>의 이야기를 쓰게 된 배경은 어떠했을까
김재범: <하늘정원>은 아홉 살 때 본 것을 토대로 상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어머니가 꽃을 좋아해 옥상에서 꽃을 키웠고, 그걸 보고 어린 아이가 하늘에 정원이 있을거다는 상상을 갖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상상을 아버지가 짓밟아 버려요.

제가 아홉 살 당시 이야기를 썼을 때 느낌, 이야기를 쓰고 나서 읽었을 때 느낌 또한 달랐을 것 같아요. ‘구원을 받고, 이 삶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을까?’란 불안감이 있었을텐데 이야기 안에서 어머니가 죽고, 내가 죽고 하늘정원이 무너져요. 아름답고 슬픈 아홉 살의 심리가 드러나죠.

-<나쁜자석> 동화 엔 고든의 어떤 마음이 담겨있나
김재범: <나쁜자석> 이야기는 여러 이야기 등 줄 가장 마지막으로 쓴 거라 생각해요. 그것도 하루 동안 썼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 달이면 한 달의 시간 동안, 그날그날의 감정을 썼다고 봤어요. 자석이 나오고 물건이 나오고 사람이 나오는데 그 의미가 뭘까? 사람이 어른들이고, 물건들이 아이들, 자석은 저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던거죠’란 대사가 있는데, ‘사람’(어른들)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생각하고 잘 살았는데 어른이 되고 싶어져요. 하지만 자석인 난 버틸 수 없어 튕겨져 나와요. 논리적으로 설명이 힘들죠. 그래서 이날은 이런 감정, 저 날은 다른 감정이 들어가 감정적으로 쓴 동화라고 생각해요.

-고든의 동화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재범: 처음에 접하고선 이해가 안 돼서 ‘이 동화가 무슨 의미인지’ 물어봤어요. 그런데 곧 지금 제 나이의 논리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구체적으로 상징하는 게 뭔가? 란 생각으로 의미를 찾아가는 것 보다, 고든인 내가 ‘이걸 썼을 때 어떤 감정이었을까?’ 이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는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앞 뒤를 맞춰야 하는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긴 하지만 보시는 분 해석에 따라 다양한 감상이 나올 수 있는 작품입니다.

-재관람 관객이 워낙 많은 작품이다. <나쁜자석>객석을 보면 정말 관객들이 몰입해서 보는 있다는 게 느껴진다.
김재범: 어떤 날은 이 생각, 또 어떤 날은 이 생각이 들어 보고 또 보는 분이 많은 걸로 알아요. 지금도 많지만 보시는 관객들이 더 많았으면 해요.
정문성: 관객들이 정말 몰입해서 봐요. 얼마 전엔 조용한 9세 폐교 장면 중 관객들이 다 들릴 정도로 뱃속에서 ‘꼬르르’ 소리가 났어요. 그날 밥을 못 먹고 무대에 올랐거든요. 모른 척 하고 용진 형이 1초 정도 쉰 다음 대사를 이어갔어요. 난 미안하다는 듯 쳐다봤고요.



■ 무겁고 무서운 ‘휴고’, 너는 누구냐

-‘휴고’란 인형은 어떤 존재인가
정문성: 너무 크고 무거운 아이요.(웃음) 장난 아니에요. 15킬로 정도 무게가 나가지 않을까요? 진짜 아홉 살 아이가 들지 못할 무게죠.

김재범: 고든에겐 질투의 대상이죠. 아버지에게 휴고는 나보다 더 중요한 존재이니까요. 인형이지만 갖고 놀 수 없어요. 그런 환상도 보였을 것 같아요. 혼자라 너무 외롭던 어느 날 휴고가 말을 걸었다고요. 너무 외로워서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냈겠죠. KBS <안녕하세요>란 프로에서 스누피 인형을 동생처럼 생각하는 여자를 봤어요. 그때 고든이 생각나고 휴고가 떠올랐어요. 그 여자는 영화를 볼 때도 인형 티켓을 끊고 밥을 먹을 때도 같이 먹어요. 인형이랑도 이야기를 하는데 그 사람이 미친 건 아니에요. 사연을 들어보니 어린 시절 ‘외로움’이란 이유가 있었어요. 고든도 너무 외로워서 휴고에서 말을 걸었던 거 아닐까요? 휴고가 한 모습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고는 생각 안 해요. ‘휴고’ 하면 떠오르는 건 아버지이지만, 어떤 날은 무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뭐라고 말 한 날도 있지만, 또 어떤 날은 순하게 엄마처럼 이야기 한 날도 있었을거라 봤어요.

정문성: 고든이 휴고가 싫다고 했을 때, 프레이저는 휴고를 혼내주겠다는 마음을 먹어요. 인형이 움직인다고 하니 호기심 반 두려움 반 심정인거죠. 대강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아닌거죠. 되게 무서운 존재인 저걸 어떻게 하지 않으면 고든이 어떻게 될텐데... 내가 고든 대신 목을 조를까? 이런 생각을 했겠죠. 제가 봤을 때 휴고는 무겁고 못생겼고 특이하지만 굉장히 훌륭한 도구입니다. 작품 안에서 휴고는 공통적으로 공포의 대상, 넘어야 할 장애물이 되요. 휴고와 함께 나오는 그 씬 마지막에, 프레이저 같은 경우 이 인형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까지 겪고 당했던 이야기를 쏟아내요. 부모가 아이에게 했던 걸 인형에게 하는 것이죠. 저에겐 그런 도구로 이용되고 있어요.

-프레이저는 폐교에서 귀신과의 싸움, 귀신 막대기 이야기를 한다. 그때 프레이저의 심정은 뭔가?
정문성: 귀신 막대기에 의미를 둔다기보다, 귀신이 나와 귀신하고 싸워 이기려고 했지만 결국엔 졌다는 의미에요. ‘멋지게 싸웠지만 졌다’는 건데 프레이저란 아이의 삶과 생활을 말 해준다고 봤어요. 순수한 아홉 살 아이는 누군가에게 진다고 말 안 해요. 귀신이 나와도 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그 나이인데... 결국 프레이저가 얼마나 억압을 받고 있었는지 드러나는 장면이죠. 그 아픔 때문에 결국 진다고 말하는거라 봤어요. 프레이저는 매번 1등을 해도 아버지에겐 칭찬을 받지 못해요. 아빠는 ‘더해 더해 난 더 잘했어’ 라고 말 했겠죠. 이 말이 어린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줬을 거고, 그런 이유로 프레이저는 만족감이나 성취감 보다는 늘 패배의식, 허탈함을 느꼈을 겁니다.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이런 마음을 다른 아홉살은 이해 못하지만 고든은 이해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어요.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길 수 있다고 싸웠는데, 귀신막대기는 괴물 혹은 귀신같은 아버지 어머니가 만들어낸 페이크였던 거죠, 그토록 허탈한 패배가 있을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것과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 말 한마디면 무너질 것 알기에 대들지 못하는 아이의 심정이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프레이저가 고든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그런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나
정문성: 나중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렇게도 이해될 수 있는데, 그건 작가 '더글라스 맥스웰(Douglas Maxwell)'랑 이야기를 해 보셔야 할 것 같아요.(웃음)

-혹시 번역 대본이 아닌 원서를 읽어 볼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정문성: 책을 읽으면 잠이 와서요. 하하 농담입니다. 전 그럴바에 대본 한 번 더 읽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번안 한 (추)민주 누나가 엄청 읽었을거고, 전 그걸 믿어요.

-19세 폐교에서 프레이저는 왜 고든에게 키스를 하게 되는가
정문성: 그 때 프레이저는 고든이 곧 죽겠다는 의미가 확 느껴지니까 일단 무서워요. 고든이 죽겠다고 하니 너무 놀라 당황해요. 이 애가 내 앞에서 없어진다고 하는데, 폐교에 불도 붙인다고 했는데, ‘애가 죽을 생각이다’는 마음이 들어오니 진짜 솔직한 마음으로 무력으로라도 못하게 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바로 직전에 애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압력을 넣은 상태에요. 내가 이 아이에게 못할 말을 많이 한 상태인데 그걸 후회하고 있어요.

고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키스를 하는데 하면서 확실히 깨닫게 되요. 키스하면서도 변하는 게 없거든요. 날 원망이라도 했다면 (스스로 죽는 걸)다시 안 할 것 같은 기분인데 아니거든요. 프레이저는 키스 하는 순간 두려워져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하며 혼이 빠져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도망을 쳤는데 예상했던 대로 사건이 벌어져있어요.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그가 느꼈을 죄책감이 감히 상상이 안 돼요. 그래서 고든은 안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친구 고든을 죽였다는 생각을 계속 할 테니까요. 어린 나이에 계속 그런 생각을 한다는게...

-19세 폐교에서 고든의 감정에 대해서 말 한다면
김재범: 고든은 감정적인 게 많은 19세는 등장 씬이 많지 않아요. 대사도 많지 않아서 제가 주도적인 감정을 끌고 간다기 보다는 프레이저에 대한 리액션이 많아요. 프레이저가 하는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게 있어요. 문성이는 공연마다 다른 날들이 많아서 저에게 역시 다르게 다가오는 날들이 많아요. 19세 폐교 장면에서 ‘날 기억해줄래’란 대사가 있는데, ‘넌 날 기억해주지 않을꺼야’란 느낌으로 던지는 날이 있고, 굉장히 간절하게 ‘날 기억해주라’ 고 대사를 한 날도 있어요. 고든의 대사가 그 한마디인데...여러 감정이 들어있어요.



■ 프레이저에게 39세 인생이 펼쳐질까

-프레이저는 고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고든과의 끈 역시 없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건가,
정문성: ‘고든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란 질문이라면 그것도 그때 그 때 달라요. 어떤 날은 ‘고든이 안 죽었지 몰라’ 라며 희망하는 날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연기하는 프레이저에게 중요한 건, 고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가 아니에요. 살아있다면 살아있는 고든을 보고 싶고, 죽었다면 죽은 고든의 시체를 보고 싶은거에요. 그랬다면 제가 죽든 살든 뭔가를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고든이 살아있다면 너무 기쁘겠지만, 너무 미안한 실체가 나타나 프레이저는 죽을 수 있어요. 이 아이한테 아는 체 하지 않고, ‘다행이다’ 안도하면서 어딘가에서 죽을 수도 있겠죠. 고든의 시체를 봤다면 확실히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고, 이 아이를 따라서 갈 수 있는거구요. 프레이저는 살아있는 고든을 무조건 보고 싶어서 용바위에 온 게 아니에요. 시체라도 좋으니 그 아이에 관한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온 것이지요.

-이야기를 듣고보니, 프레이저에게 39세 인생은 없을 것 같다.
정문성: 아마 없지 않을까요. 프레이저는 마지막에 친구들 앞에서 고든의 죽음을 인정해요. 꽃비가 터지고 나서 어떤 결정을 하는거죠. 전 공연마다 다른 결정을 해요. 어떻게 할까. 이대로 죽고 싶은 날도 있고, 어떤 날은 미쳐서 고든을 찾고 싶은 날이 있고, ‘아 이제 마음이 편해졌으니까 제대로 살아야지’ 이런 마음을 먹은 날은 없고(웃음)

-마지막 꽃비 내릴 때 감정은 어떤가
정문성 : 그거야 말로 어떤 날은 미쳐서 날뛰는데 꽃비가 내리면서 순간적으로 고든이 느껴졌을 것 같아요. 귀신이 됐든, 살아있는 고든이 됐든 고든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 순간 미안하고 고마워요. ‘미안하단 말을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 하고 싶어요. 꽃비를 맞고 나서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김재범 : 추민주 연출님은 그 장면을 고든이 죽지 않고 살아서 29세의 고든이 <하늘 정원>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이라는 감정으로 ‘그곳은 너무나 다른 광경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립니다. 기뻐서 눈물을 흘립니다. ’란 식으로 장면이 펼쳐진다고 말씀 하셨어요. 지금 든 생각은 고든이 죽고 나서 이 아이들을 보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고든이 꽃비가 되어 내린다?’란 표현은 조금 오그라들구요. 이 세 친구가 꽃비가 내리는 걸 목격하고, 제가 마지막에 나오면 이들이 울고 있어요. 그 때 꽃비가 기쁨의 눈물이라고 생각했고, 전 그런 감정으로 나갔어요. 내가 죽어서 이곳에 왔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 김재범과 정문성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다.

-작품분석을 위해 특별히 더 신경 쓴 게 있었나
김재범 : MBC <아빠 어디가>, SBS 다큐<궁금한 이야기 Y>, 영화 <아홉 살 인생>을 봤어요. 아이들의 세계는 저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요. 이 아이가 이렇게 해서 상상하겠지 그런 원칙들이 없어요. 우리 잣대로 봤을 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 시절엔 뭐든 가능해요. 아홉 살 인생은 우습지 않았어요. 우리가 아홉 살이 뭘 안다고 말 할 수 있지만 그들에겐 그게 인생인거였어요.

-인간 정문성과 프레이저란 인물과 닮은 점이 있나
정문성: 전 저에 대한 집안의 기대감이 높지 않았어요.(웃음) 저희 엄마는 어떤 기대도 안하고 구박도 하지 않고, 제가 알아서 살게 그냥 놔뒀어요. 스스로 판단하게 하셨으니까요. 외아들이 배우를 하겠다는데도 ‘너 좋을대로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프레이저의 고민에 공감하기 어렵진 않았나
정문성: 프레이저처럼 어렸을 때 부자도 아니었고, 가정형편 때문에 엄마랑 떨어져서 할머니 할아버지랑 살아왔어요. 프레이저는 나랑 반대의 환경에 있는 사람인데.
비슷한 게 아예 없진 않은 것 같아요. 그 때 엄마의 부재, 아빠의 부재 이런 아픔을 제 친구들은 전혀 몰랐거든요. 전 그런 감정을 포장하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안 것일 수 있죠. 할아버지가 평상시에 ‘너 이러면 아버지 없는 자식이다는 소리 듣는다’며 밥상 예절을 엄격하게 시키셨어요. 젓가락 숟가락을 똑바로 들어야 한다면서요. 손주를 때리거나 욕하거나 그러신 분이 아니라, 남들에게 잘 보이도록 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던거죠. 전 어린 나이에 사랑을 받는 방법을 남들보다 먼저 알았죠.

물론 프레이저가 느꼈던 아픔이나 스트레스는 저에게 없었어요. 전 몸이나 마음이건 아픈 걸 싫어해서 아플 것 같으면 ‘저건 하지 말아야지’란 생각이 들어요. 또 그거랑 상관없이 오히려 캐릭터와 배우 개인이 너무 비슷하면 자기애에 갇혀서 못하는 것도 있지 않나요.

-김재범: 별일 없이 잘 살아왔어요. 부모님이 뼈가 빠지게 일하셔서 등록금을 마련 해 대학을 보내셨어요. 그 은혜를 갚기 위해...꼭 그러기 위해서 공연하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공연을 하고 있어요. 부모님이 노후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어요.

-출연작을 많이 봤는데, 무대 위에선 본 재범 배우에게선 외로운 기질이라고 해야 하나? 공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느껴진다.
정문성: 고든이랑 비슷한 느낌을 찾는다면, 혼자만의 공간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벽을 쳐 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사람만의 특이한 세계가 있어요. 형이 낯을 많이 가려요. 어떤 자리에서는 분위기에서 섞이지 못하나 이런 느낌을 줄 때가 있고, 어쩔 땐 수다쟁이 아줌마인가? 그런 느낌을 받아요. 얼마 전에 제 생일이었는데, 형이 조각 케익 세 조각을 사와서 노래를 불러줬어요. 꼭 옆집 아줌마가 ‘너희 엄마가 안 해줬지?’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재범 배우가 노래도 직접 불러줬나?
김재범: 제가 음악을 틀어줬어요. 불렀으면 끔찍했게요.(웃음)

-재범 배우는 잔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김재범: 제가 잔정이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몇 안 돼요. 손에 꼽을 몇몇 사람들만 알아요. ‘네가 그렇게 잔정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 하죠. 제가 무뚝뚝하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친해지면 말이 많아져요. 주변에서 그만 좀 해라 할 정도로요.

정문성: 형이랑 친해지기 전에 제일 이해가 안 갔던 말이 ‘재범 형 웃기잖아’ 였어요. 그 말 한 사람에게 ‘장난하냐’ 면서 제가 욕을 한바가지 할 정도로요. 형이 말 장난을 잘 해요.

김재범 : 대학교 때 말장난을 좋아했는데, 이번에 (김)대현이란 친구가 말장난을 잘하더라고요. 옛날 생각도 나긴 한데 지금은 욱하는 게 나와 ‘야’ 라고 반응해요. 대현이는 5분마다 하는 것도 아니고 5초마다 말장난을 해요.(웃음)

인터뷰를 마치며 정문성은 ‘공연을 보며 관객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객들이 무대 위 저 사람들의 인생을 엿보면서 만족을 느낀다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 저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일상에서 표출하지 못한 감정, 아픔들을 대입할 수 있거든요. 울고 나면 개운해지듯, 공연을 보면 해소되는 게 있어요. 무대 위에서 내 감정 상태를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거죠. <나쁜자석>도 마찬가지구요. 어떤 공연을 보고 재미 없어서 화가 나진 않아요. 진짜 대충하는 공연은 화가 나겠지만, 대충하는 공연은 아직까지 본 적 없어요. 그런 공연이 있으면 혼나야죠. 배우들이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집중하고 열심히 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뭔가가 표현 되지 않나요.

김재범은 “힘들고 답답해서 공연을 보러왔는데, 기분이 많이 나아졌어요.”란 말을 들으면 배우로서 감사하고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번 보시고, 도저히 잊을 수 없어서 다시 공연을 보러 오시는 분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더 욕심을 내 보자면, 그 작품 안에서 제가 연기하는 고든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오신 분이 계시면 정말 커다란 영광이죠. 관객들이 공연 안에서 만족할만한 무언가를 얻어서 간다면 저희는 정말 뿌듯할 것 같아요.

인터뷰 막바지에 이르러 김재범 배우의 말장난이 터져 나왔다. “(공연이 시작되는) 8시부터 10시까지 무대 위에서 저 김재범은 없어요. 그리고 인터뷰 기사엔 문성이 사진을 넣어주세요. 무대 위에선 고든일까요?(웃음)”

그러자 정문성 배우가 <나쁜자석> 속 앨런의 대사로 답했다. “고든이 특별한 정신병자라 그래요. 하하”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악어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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