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차 송강호, 불사파 두목에서 변호인까지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1997년은 성대모사를 잘 한다는 이유 하나만 믿고 90년대 초반 대학로에 뛰어들었다는 연극배우 송강호가 대중들에게 처음 이름을 알린 해였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영화에 데뷔한 송강호는 1997년 3편의 영화에서 단역과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나쁜 영화>와 <초록물고기>, <넘버3> 세 작품 속에서 송강호의 매력은 비슷한 듯 서로 다르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에서 막둥이(한석규)에게 시비를 걸던 그의 모습은 정말 ‘날’건달의 리얼한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같은 해 개봉한 <넘버3>에서 헝그리정신을 강조하며 “현현현…… 현정화”와 “배배배배…… 배신이야.”를 버벅거리며 “그냥 걸어가. 뚜벅뚜벅 걸어가.”의 무대뽀정신을 설명하는 불사파의 두목은 그 후에 스크린에서 보게 될 송강호 특유의 해학적 인물의 원형이다.

한편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에서 그는 영화가 시작한 지 55분 정도 지난 후에 아주 잠깐 서울역 앞 행려환자로 등장한다. 송강호는 찬송가를 부르는 성가대의 노래를 반박자정도 늦게 따라하며 어설프게 박수까지 친다. <나쁜 영화>는 장선우 감독이 십대 청소년과 거리의 행려환자를 배경으로 아무런 연출이나 시나리오 없이 찍은 작품이라 선언한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행려환자로 등장하는 송강호에게서는 연출된 연기가 읽힌다. 물론 감독의 주문이 아니라 배우 스스로 계산해서 만든 코믹한 행려환자의 모습이 아닐까 추측되는 그런 연기다. 대중들은 그 후에도 종종 반박자 늦게 버벅거려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송강호의 연기를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영화에서 아무리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 연기한들 감독의 세계에 갇힌 듯한 다른 인물들과 달리 영화 속 송강호는 자유롭고 유쾌하게 보인다. 또한 감독이란 거대한 존재에 배우들이 조율되는 인상을 주는 과거의 한국영화와 달리 감독과 배우가 함께 호흡하면서 힘을 발휘하는 듯 보이는 2천 년대의 작품들에 송강호란 이름이 어울리게 된 것도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그해 겨울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할 때쯤 영화잡지 <스크린>에 송강호의 짧은 인터뷰 기사가 실린다. 주름 없는 얼굴에 까치머리처럼 짧은 더벅머리를 한 사진이 실린 그 인터뷰에는 연극배우에서 이제 막 영화판에 발을 디딘 배우의 순박함이 묻어난다. 예를 들면 평소 1년에 한번 영화관에 갈까 말까 했는데 추석에 개봉한 한국영화를 다 보았다거나, 연극은 모든 상황이 배우에게 집중되도록 도와주는데 영화는 시끄럽게 떠들고 놀다가 갑자기 분위기를 잡아야 해서 연기하기가 더 어렵다고 토로하는 답변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 인터뷰에서 송강호는 앞으로 <태백산맥>의 염상진처럼 생생함이 살아 있는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후 송강호는 17년의 세월 동안 영화판의 주연으로 자리 잡으면서 고뇌에 찬 엘리트 혁명가가 아닌 고민 많은 소시민을 주로 연기했다. 진지하기보다 우스꽝스러워도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을 먹먹하게 하는 아버지들이 그의 몫이었다. <효자동 이발사>의 아버지가 그랬고 <우아한 세계>의 아버지가 그랬고 <괴물>의 아버지가 그랬다. 어쩌면 <관상>이나 <설국열차>도 마찬가지인지 몰랐다.

혹은 아버지가 부재한 영화에서 외로운 이들을 푸근한 어른처럼 바라보고 다독이는 인간을 연기했다. <공동경비구역JSA>나 <의형제>가 그런 영화였다. 어쩌면 <밀양>도 그런 영화일지 모른다. 영화 내내 깐족대는 인물이지만 하나님에게 의지할 수조차 없게 된 여주인공 신애(전도연) 옆에서 끝까지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 카센터사장 종찬(송강호)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첫 주연작 <반칙왕>이 두 얼굴의 사나이였듯 송강호의 얼굴에도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그의 어두운 면을 스크린으로 끌어내준 사람은 뚜벅뚜벅 걸어가는 코믹배우 이미지가 강했던 송강호를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정 넘치는 초코파이 사나이로 만들어준 박찬욱 감독이었다. 그후 송강호는 박찬욱의 차기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과거와는 다른 역할에 도전한다. 송강호는 박찬욱 감독과 함께한 영화잡지 <스크린>의 2002년 인터뷰에서 자신의 변화한 연기관에 대해 말한다.

“그동안은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서비스라고 생각했어요. 희로애락을 서비스해줌으로써 감동을 주고 감동을 받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을 만나면서 연기가 내 인생에 대한 도발이자 실험이란 생각이 들었죠.”



유괴된 자신의 아이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가난한 유괴범 류를 살인하는 중소기업체 사장 동진(송강호)은 겉보기엔 평범한 가장이지만 상당히 복잡한 인물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함께 충무로 영화의 주연을 도맡았던 설경구가 그려낸 남자들처럼 징글징글하지도 않고 최민식이 그려낸 인간들처럼 소름끼치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악인이라 부를 수도 선인이라 부를 수도 없지만 송강호가 그려내는 어두운 인물들은 대부분 이율배반적인 인간이다. 그리고 중년남자의 구겨진 양복에 밴 체취처럼 서늘하고 어둡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사회의 안정적인 중소기업체 사장이지만 그 안정적인 삶이 무너지자 냉정한 복수를 하는 인물이고, 영화 <박쥐>에서는 신부면서도 흡혈귀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살인자가 되었던 송강호는 1년 후인 2003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통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배경으로 연쇄살인범을 쫓는 형사 박두만을 연기한다.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송강호가 모두 녹아 있으면서도 기존의 송강호와는 다르다. 박두만의 역할은 해학적인 감초이면서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다. 또 묵묵히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붙잡고 싶어 열심히 쫓지만 결국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이기도하다. 이 영화에서 송강호는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명대사를 직접 만들어낸다.

<살인의 추억> 이후 10년이 지난 2013년 겨울 개봉한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에서 송강호는 형사가 아닌 변호사 송우석을 연기한다. 어쩌면 <변호인>을 통해 송강호는 자신의 대표작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변호인>의 송우석은 바라보는 인물이나 쫓는 인물이 아니라 생각하는 인물이다. 변화하는 인물이며 변화를 이끄는 인물이다. 송강호는 자칫하면 배우가 강렬하고 감상적으로 연기할 법한 이 인물을 일상연기와 감상적인 연기를 부드럽게 조화시키면서 인간적으로 살려낸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송강호는 버벅거리는 대신 잠시 숨을 멈춘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법정에서 이 대사를 외치면서 송강호는 중간에 잠깐 숨을 멈춘다. 이 숨을 멈추는 순간은 짧지만 그 울림은 크다. 그 짧은 침묵의 순간이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한숨을 떠올릴 수 있는 여백이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영화 <변호인><넘버3><괴물><복수는 나의 것><살인의 추억>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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